[몽상의 장면들]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2

몽상의 장면들 #4



#3


며칠이 지났을까? 그저 시간이 흐를 뿐 가늠할 수가 없다. 차를 타고, 차에서 내리고. 어제 일도 몇 달은 지난 일처럼 까마득하다. 오래된 팬에 기름기 없이 눌어붙는 야채 볶는 냄새가 메슥거린다. 매주 목요일은 고기를 먹지 않는 날이라 한다. 안 그래도 고기를 안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굳이 날을 정해서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또 뭘까.


목요일이라, 그러면 이곳에 온 지 5일째구나. 오늘은 누브라 밸리Nubra Valley에 다녀오기로 돼 있다. 일찍부터 서둘렀는데도 누브라 밸리에 도착하니 오후 3시다. 눈앞엔 또 다른 히말라야 산이 보이고 머리 위엔 살구나무, 하늘과 구름이 마구 흩어져 뒤엉켜 있는 캠핑장에 앉아 웰컴 짜이를 마신다. 한 시간 뒤엔 사막으로 간다.


꼬불꼬불 흙길을 따라 산을 서너 개쯤 넘은 것 같다. 그중엔 해발 5,000m 패스도 있었다. 산허리에서 맨손으로 돌을 깨고 있는 사람들을 몇 번 지나쳤고, 흙인지 돌인지 사람인지, 얼굴도 손등도 몸의 형태도 돌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는 듯했다. 카르둥라 패스를 앞두고 악착같은 엔진 음을 짜내며 산길을 오르는 큰 트럭이 우리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트럭 짐칸은 돌 깨는 일꾼들이 어깨를 촘촘히 모으고 있었다. 얇은 신발을 신고, 겨우 추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옷을 입고서 손바닥에 종이 접시를 올리고 돌가루 범벅이 된 손으로 커리에 짜파티를 찍어 먹고 있었다. 내가 탄 차는 너무 안락했고, 내 몸을 감싼 너무 많은 것들. 우리들은 가진 게 너무 많았다.



중간 중간 쉬어 가는 곳에서는 한국인들과도 마주쳤다. 인도 현지인처럼 형형색색의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여자와 반바지에 버켄스탁을 신고 있는 남자들. 한국에서 온 소녀와 소년들은 다들 외형이 너무나 비슷하다. 딱 봐도 한국인이라는 게 티가 날 정도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낯설 만큼 내 표정과 몸의 무게가 일치해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차에 실려 왔을 뿐이지만 온몸에 기운이 다 빠졌다. 구부러진 벼랑길을 따라 종일 달렸더니 너무 메슥거리고 어지럽다. 레몬이 가득 들어 있는 미지근한 물을 마셔도 도저히 씻겨 내려가질 않는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태어나 무엇을 볼까?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디를 향해 갈까? 왜 하필 이곳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자신보다 큰 돌을 부수고 잘게 쪼아 탑을 쌓아 올려야 하는 걸까. 인생은 정해져 있는 거라고, 한 인간의 둘레는 예정되어 있고 또 정해져 있는 거라는 성경 말씀처럼 어떤 사람은 태어나 돌을 쌓고 또 어떤 사람은 쌓여진 돌 위에서 세상을 굽어 보다 죽게 되는 걸까?


나는 어떤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누브라 밸리에서 한 시간쯤 차를 타고 무슬림 마을인 Turtuk에 닿았다. 바람이 불었다. 마음껏 자태를 뽐내며 바람이 불고, 내 옆으로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하늘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고 구름도 햇빛도 친구처럼 머리 바로 위에 둥둥 떠다닌다. 몇몇 꼬마 천사와 만났다. 길을 잃었을 때 나의 손을 잡고 마을 입구로 인도해 주던 당당한 소녀(그 소녀는 무슬림이라 함께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 내가 들고 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소년들. 그리고 목마른 날 위해 예비한 듯 나뭇잎보다 열매가 더 많았던 살구나무. 루체른 호수와 닮은 옥색 계곡.


우연히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큰 결심이 필요하다.


극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더 큰 결심이 필요하다.



다시 Nubra valley로 돌아와 이곳에서 이틀 동안 캠핑을 하기로 했다. 고도가 조금 낮아지니 뛸 수 있을 만큼 체력이 회복되는 것 같다. 초콜릿을 조금 베어 먹고 고열량의 참치를 삼키니 급격하게 에너지가 치솟는 것도 같다. 그런데 막 생겨난 여력이 5분을 채 넘기지 못한다. 다시 초콜릿을 베어 먹고 참치를 먹고, 또 얼마 못 가 축 늘어진 채 걷지도 기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걸을라치면 발을 질질 끌어야 할 만큼 몸이 무겁다.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한 횟수로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다. 이런 발상은 끔찍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한 것이고, 가벼움은 아름다운 것일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받기를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모처럼 다시 밀란 쿤데라의 책을 펼쳐 본다. 그는 나를 투영할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작가였다. 그래서 제발 죽지 않기를 바라는. 그도 나도 작곡을 공부했다. 현란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오케스트라 곡을 마지막으로 나의 작곡 행위는 끝이 났으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번번이 깨달아 가며,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살며, 그의 소설을 네 번쯤 읽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히말라야를 등지고 읽는 쿤데라는 새로웠다. 하늘로 올라오니 드디어 새로움을 만나게 된 걸까?


글자를 뒤섞으며 망상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사랑의 구체적 형태를 그리는 듯도, 사람의 형태를 닮은 듯도, 존재하는 것 같기도, 환상인 것 같기고. 산소 부족 때문이겠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육체가 망상을 따라 한없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말 그대로 환상 그 자체였다. 무기력함과 동시에 쉽게 에너지가 차오른다. 방전 직전의 자동차처럼.


밤 12시. 수많은 별들이 내가 동그란 구 안에 갇혀 있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별똥별. 희미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수없이 바라고 선택해 왔지만, 선택의 결과가 어떨지, 옳을지, 늘 불분명했다. 습관적으로, 혹은 굳이 전혀 의외의 선택을 해 왔다. 그러니까 지금 내 모습은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거다. 일상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별똥별.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 애쓰지 말아야지.




#4


7년 전 테레사가 살고 있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스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에 걸려 꼼작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스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다섯 개의 호텔이 있었는데, 토마스는 〈우연히〉 테레사가 일하던 호텔에 들어갔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사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스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스를 테레사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개의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사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위 우연의 일치라고 불리는, 사람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들이 그것이다. 예기치 않은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거나 조우하는 순간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소설의 신비스러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이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섯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판공초에 도착했다. 바다가 올라와 하늘 아래 맺힌 판공초를 보니 새삼스럽다. 오늘 길에 마모트도 보고 양들도 보고 또 다른 길을 보았고, 숭고함에 대해 생각했다. 꿈에서 계속 숭고함에 대해 이야기 한다. 누군가와 숭고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무엇이 더 괜찮은 건지 혹은 무엇이 더 원대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눈앞은 중국 땅이고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인도 라다크. 구역을 정하고 그 안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사람들. 어디서든 주어진 현실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



꼬불거리는 산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산 중턱에서 손으로 돌을 깨며 도로를 만들던 사람들이 뭐라 소리쳤다. 라다크 사람들의 언어라 우리는 무슨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씨가 급하게 차를 세우더니 그들과 이야기하고 우리가 갖고 있던 물병을 하나 건넸다. 그들의 눈은 진지했고 살아있었으며 흔히 볼 수 없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계곡이 없는 고산에서 일하는 그들에겐 물이 필요했다. 지나가는 차마다 소리를 지르며 물을 달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들이 일하는 곳 주변에는 돌과 흙뿐, 산에서는 물 한 줄기 흘러내리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차 안을 슬쩍 보는 그들의 눈빛에서 내 삶은 공허해지고 말았다. 차는 다시 흙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맺힌 상이 지워지지 않아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그들을 다시 바라봤다. 물을 받아 들고 씩씩하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그들은 그 뜨거운 태양 아래, 흙 위에 걸터앉아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한 예행연습. 육신의 비루함을 깨닫는 여정. 아무리 좋아하던 것도 좋게 여겨지지 않고, 아무리 싫어하던 것도 내치지 않는 무기력함. 사랑보다 갈증이 먼저 느껴지는 곳. 구름은 내 어깨 높이에 있고, 초콜릿을 들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마모트가 다가온다. 더위는 견딜 수 없는 추위와 공존하고 있다. 너무 추워서 입고 있는 옷을 다 껴입었는데도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미리 준비해 간 핫 패치를 배와 목과 등에 붙이고 타이즈를 신고 꽁꽁 싸맨 채 캠핑장에 있는 두꺼운 담요 속에 들어가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래도 추웠다. 샤워는커녕 겨우 물티슈로 세수를 하고 침대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기록은 남겨 둬야 할 것 같아 손을 움직여 보았다. 그때였다. 허벅지 안쪽이 따끔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누가 꼬집는 것도 아니고 할퀴는 것도 아니고 뭔가 날카로운 게 날 꽉 문 것 같은 기분. 이렇게 추운 날씨, 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는데 설마 이 틈을 비집고 물 수 있는 벌레가 있을까? 그리고 얼마 뒤 뉴델리 호텔에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빈대에 물렸다는 것이었다. 빈대가 나를 물기 위해 한 행동들은 절대 우연이 아니겠지만, 나는 2017년에도 빈대에 물릴 수 있었던 나의 우연한 행로를 격려했다. 라다크는 과거이자, 훗날 늙은 나 자신의 복선이었다.




#5


레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너무 높아 느낄 것도 없이 피곤한 하루, 하루 지나면 또 하루가 오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깊은 잠을 잤다.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잠이 들었고, 아주 다양한 꿈을 꾸었다. 너무 다양해서 할 말이 없을 만큼 어이없는 꿈을 꾸기도 했다. 고산병 예방약을 먹고 되도록 천천히 걷는 것도 열흘 정도 하고 나니 이젠 습관이 되었다. 그래도 도무지 이성적인 판단은 가능하지 않고, 심지어 간단한 셈도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고 있다.


보름에 가까운 일정이 끝났다. 무엇을 느끼고 보았는지, 정리하려면 평생은 걸릴 것 같다. 질문이 가득한 채로 돌아간다. 그건 또 그것대로 받아들인다. 미디어가 발달하고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서 이곳 사람들 역시 본인들이 태어난 척박한 땅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 적은 없을까? 가족과 공동체를 떠나 더 나은 삶이 있을 만한 곳을 바란 적은 없었을까? 갖고 싶은 건, 되고 깊은 건? 어떤 사랑을 꿈꿨을까, 사랑보다 갈증이 먼저인 곳에서. 엉성한 망치로 커다란 바위를 한없이 쪼개고 또 쪼개는 한 남자의 손등, 그리고 눈빛.


헬조선을 벗어나야지. 유럽이나 어디 더 좋은 나라에서 내 삶의 가장 좋은 때를 보내고 나중에 아이들이 생기면 그곳에서 자녀들은 여러 언어를 쓰게 하고 더 다양하고 깊은 문화 안에서 살아가게 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지나 돌아보니 그게 열등감이자 편협한 사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의식에 가득 찬 감정으로 인해 지금 옆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인간이 태어나 삶의 원래의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 그 과정 속에서 자라나고 다듬어지고 깎이고 도려내지고 세공되고. 드물게는 보석이 되고. 대개는 보석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시간이 지나며 잊게 되고, 그저 누군가의 세공된 상태를 부러워하며 산다. 누군가 나를 단련시키려 할 때 왜 내가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에 대해 따지려 들었을지도 모르고.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지금의 나까지 얼마나 많은 세공의 과정을 거쳐 왔을까? 보석에 가까워졌을까? 여전히 투박한 표면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단련되고 깎인 다음엔 어떤 빛을 띠게 될까? 어떤 형태로 남을까?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온전한 나의 모습 같은 건 찾을 수 없을 거다. 그 온전함을 찾기 위한 과정만 살다 갈 뿐.


진리에 가까운 선善, 선의 아름다움, 세상에 태어난 목적. 내 삶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미학 공부를 시작했다. 인도 행 비행기를 타기 한 시간 전,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지금까지 나의 삶은 시작만을 반복해 왔다. 러시아와 포르투갈, 무작정 걷던 유럽에서의 기억은 인도 바라나시의 시간으로 이어졌고, 지금 라다크에 이르렀다. 내가 알고 배워온 신은 인간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며 자신의 모습으로 창조한 인간에게 선한 자유의지를 주었다. 하지만 인도에 세 차례 다녀온 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그것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무한한 사랑 뒤에 감춰진 유한한 진실, 죽음이라 표현되는. 평범한 자유의지로 옳은 선택을 한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선택할 것은 수도 없고, 그 선택의 결과로 나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이것만이 명백한 사실이므로 나는 옳은 선택을 하고 싶고, 내 선택에 자신감을 갖고 싶다. 내 존재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그는 그녀 때문에 돌아왔다. 그녀 때문에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이제는 그녀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그가 아니다 : 이제부터는 그녀가 그를 책임져야 한다. 이러한 책임은 그녀의 힘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다, 그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불쑥 고민으로부터 그녀를 구원하고 새로운 삶의 욕구를 그녀 가슴에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의 의미였다. 다시 한 번 우연의 새가 그녀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곁에서 자고 있는 토마스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메타포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어깨에 짐이 부과되었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 모든 인용문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발췌




글/사진 별나

클래식 작곡 전공, 빌보드 코리아 기자, 예술 강사를 거쳐 이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우아한) 몽상가. 수전 손택을 닮고 싶고, 그보단 소박하게 전 세계를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현재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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