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요리사의 백년가게 산책 #1
‘백년가게’는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 받아 공식 인증받은 점포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신한카드, 그리고 브릭스 매거진이 '백년가게'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 요리사와 함께 백년가게 탐방에 나섰습니다. 여러 저서를 통해 '노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중에 알린 박찬일 요리사와 다양한 지역으로 백년가게 탐방을 떠나보세요.
박찬일 요리사
* * *
흔히 대전은 심심한 도시라고들 한다. 충청도 특유의 튀지 않는 문화는 음식에서도 강렬한 취향이나 드러냄이 적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원도심(구도심) 쪽에는 대전을 상징하는 여러 음식 문화가 꽤 충실하게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칼국수다. 역전의 굳건한 노포 신도칼국수를 중심으로 꽤 많은 업소가 있다. 대전뿐 아니라 충청도 일대가 칼국수를 잘하는 노포가 많다. 맛은 소박하지만 깊은 무엇이 있다.
흥미롭게도 두부도 대전의 맛으로 꼽힌다. 하얀 성정, 다른 재료를 돋보이게 하지만, 결국 자신으로 ‘수렴’하는 맛. 그게 칼국수와 두부의 공통점이다. 이 맛을 대전답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전시 대흥동의 ‘진로집’
대전은 노포에 진심인 도시다. 〈백년가게〉의 위상이 높다. 대전의 원도심 지역은 오래된 가게들이 단단한 어금니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대흥동, 은행동 등 부도심이 발달하기 전 찬란했던 지역이 다시 부활하면서 그동안 이 지역을 선산 지키듯 하던 노포들도 다시 어깨를 펴고 있다. 대흥동의 ‘진로집’도 그렇다.
“원래 친정어머니가 요 앞에서 포장집을 하고 있었어요. 그 가게부터 사실 우리 집의 역사가 시작된 거요. 나는 효동의 중화실업에 공채1기로 합격해서 회사원 생활을 하느라 들여다보질 못했어요. 툭하면 단속에 걸려 생활 수단인 리어카가 압수되곤 했쥬. (웃음) 사촌오빠들이 경찰서 가서 엄마를 모시고 나오고 그랬어요. 엄마가 단속 때문에 안 되겠다 해서 지금 가게 가까운 데에 기와집을 세 얻어서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게 진로집의 시작이에유.”

박찬일 요리사와 대전 '진로집'에서 만난 남임순 사장님
역시 그때는 거의 무허가 시대였다. 당연히 가게 이름도 없었다. 단골손님이 “진로 소주를 파니 진로집이라 해라” 해서 공식 이름이 됐다.
진로집은 두부로 시작해서 두부로 큰 가게다. 그 심심한 듯 무심한 듯한 두부에 색깔을 입힌 게 바로 진로집이고 남임순 씨(77세)다. 두부라면 보통 부치고 삶아서 내는 게 고작인데, 맵게 만들어서 두부 두루치기란 용어를 퍼뜨린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진로집'을 키운 남임순 씨. 현재는 아들 김동현 씨가 진로집을 운영하고 있다.
“결혼해서 애기들 낳고 살았쥬. 아이고, 쟤(가게를 맡고 있는 아들 김동현 씨(42세))가 다섯 살 때 남편이 그만 세상을 떴어유. 큰애들 학교 보내고 아들은 가게서 기르면서 진로집을 했쥬. 다 살자고 한 거예유.”
두부 두루치기는 다른 도시에 나와 사는 대전 출신 인사들이 고향의 음식으로 기억하는 음식이다. 그만큼 상징적이고 유명하다. 진로집 이후 청양식당, 광천식당 등의 두부 두루치기 전문점이 생겨서 큰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다.

진로집의 두부 두루치기와 수육
“요 근처에 버스터미널이 있었고 아주 번화했쥬. 우리 집이 있는 데는 번화가 옆 골목길이고. 간단하게 한 끼 때우고 소주 한 잔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왔어유.”
관공서가 이주하면서 이 일대는 한동안 텅텅 비다시피 했다. 그래도 진로집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멀리서 일부러 오는 단골들이었다.
그러면 왜 하필 두부였을까.
“뭐 별 이유가 있었겠유? 새벽이면 살래에서 두부장수들이 나와 중앙시장에서 팔았쥬. 그거 사다가 부쳐서 조려서 팔던 게 진로집 명물이 됐쥬.”

진로집의 또 다른 메뉴 부추전과 밑반찬으로 나오는 시원한 동치미
‘살래’란 대전시로 통합되기 전 대덕군 산내면을 말한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산내면이다. 대전의 도심과 가까운 면이다. 거기서 두부 만드는 이들이 밤새 끓여 굳힌 두부를 들고 와서 팔았다는 얘기다.
진로집 메뉴는 단출하다. 두부가 주인공이고 칼국수와 전, 수육과 칼국수가 있다. 두부는 아주 미묘하면서 깊은 맛을 낸다. 매운맛이 입을 확 끌어당기는데 두부의 ‘순정’ 같은 심심함 위에 맛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이게 진로집의 맛을 결정한다.
두부 두루치기에는 칼국수 사리를 추가하여 비벼 먹을 수 있다.
“매운 고춧가루 넣고 멸치 같은 양념으루 오래 내서 조려유. 그게 우리 두루치기 맛이유.”
그게 전부가 아닌 듯하다. 두루치기란 딱 정해진 조리법이 있는 요리가 아니다. 역사도 잘 모른다. 국물이 있는 듯 없는 듯, 재료를 볶는 듯 끓이는 듯 만들어낸 요리가 바로 두루치기다. 돼지고기나 오징어 같은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쓴다. 이 집은 두부를 쓰되, 물리적인 기술을 넣었다. 두부는 부드럽지만 오래 끓여도 의외로 맛을 깊게 받아들이는 재료가 아니다. 찌개에 넣은 두부를 팔팔 끓여도 먹어보면 자기 존재를 잘 간직한다. 그래서 진로집 두부는 살짝 으깨어져 있다. 여기에 ‘고의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진로집
“처음에는 그냥 조렸는데 탁탁 뭉개서 조리니까 맛이 잘 배유. 손님들이 좋아하니까 계속 하게 된 거쥬.”
한 입만 먹어도 입 안 가득 퍼지는 양념과 두부의 부드러운 씹힘, 비결이 그것이었구나. 원래는 두부가 아니라 오징어 두루치가 원조였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에게 처음 하시는 말씀이다. 친정어머니가 시장에서 오징어를 ‘다라이(함지)’로 떼어다가 두루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손님이 “이것만 하지 말고 다른 안주도 좀 하라”고 해서 두부를 떼어 지져내던 것이 두부 두루치기로 발전했다.
“간장에 생두부로도 내고, 누가 지져 달라면 지져주고 하다가 결국은 두부 두루치기가 된 거쥬.”


주방에서
창조란 사실 우연하게 일어난다. 요새는 요리를 개발하지만 옛날엔 이런 식으로 사소한 변화가 오늘날 한국의 유명 음식의 뿌리가 된 사례가 많다. 한국식 안주의 대명사인 해물파전이며, 섞어찌개, 족발 같은 요리가 다 그런 방식으로 생겨났다. 대중의 요구와 가게 주인의 합작품이다. 국물 많은 서울식 불고기도 사리와 밥을 비벼먹고자 했던 탄수화물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 낸 60년대식 불고기다.




진로집은 오래도록 옛날 자리, 가게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더 인상적이다. 가게에 앉아 찬찬히 둘러보면, 이 구조가 바로 수수한 한옥집을 개조한 형태 그대로라는 걸 알 수 있다. 두부 두루치기의 매운 향이 가득 퍼지는 자리에 앉아서 술을 한 잔 마신다. 생각해 보면 이 집을 다녀간 수많은 이들이 앉아 있던 그 자리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꼭 두루치기가 뜨끈하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진로집 두 사장님과 박찬일 요리사
글/인터뷰 박찬일
사진 신태진
기획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 신한카드 & 브릭스
박찬일 요리사의 백년가게 산책 #1
‘백년가게’는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 받아 공식 인증받은 점포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신한카드, 그리고 브릭스 매거진이 '백년가게'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 요리사와 함께 백년가게 탐방에 나섰습니다. 여러 저서를 통해 '노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중에 알린 박찬일 요리사와 다양한 지역으로 백년가게 탐방을 떠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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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대전은 심심한 도시라고들 한다. 충청도 특유의 튀지 않는 문화는 음식에서도 강렬한 취향이나 드러냄이 적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원도심(구도심) 쪽에는 대전을 상징하는 여러 음식 문화가 꽤 충실하게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칼국수다. 역전의 굳건한 노포 신도칼국수를 중심으로 꽤 많은 업소가 있다. 대전뿐 아니라 충청도 일대가 칼국수를 잘하는 노포가 많다. 맛은 소박하지만 깊은 무엇이 있다.
흥미롭게도 두부도 대전의 맛으로 꼽힌다. 하얀 성정, 다른 재료를 돋보이게 하지만, 결국 자신으로 ‘수렴’하는 맛. 그게 칼국수와 두부의 공통점이다. 이 맛을 대전답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전은 노포에 진심인 도시다. 〈백년가게〉의 위상이 높다. 대전의 원도심 지역은 오래된 가게들이 단단한 어금니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대흥동, 은행동 등 부도심이 발달하기 전 찬란했던 지역이 다시 부활하면서 그동안 이 지역을 선산 지키듯 하던 노포들도 다시 어깨를 펴고 있다. 대흥동의 ‘진로집’도 그렇다.
“원래 친정어머니가 요 앞에서 포장집을 하고 있었어요. 그 가게부터 사실 우리 집의 역사가 시작된 거요. 나는 효동의 중화실업에 공채1기로 합격해서 회사원 생활을 하느라 들여다보질 못했어요. 툭하면 단속에 걸려 생활 수단인 리어카가 압수되곤 했쥬. (웃음) 사촌오빠들이 경찰서 가서 엄마를 모시고 나오고 그랬어요. 엄마가 단속 때문에 안 되겠다 해서 지금 가게 가까운 데에 기와집을 세 얻어서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게 진로집의 시작이에유.”
역시 그때는 거의 무허가 시대였다. 당연히 가게 이름도 없었다. 단골손님이 “진로 소주를 파니 진로집이라 해라” 해서 공식 이름이 됐다.
진로집은 두부로 시작해서 두부로 큰 가게다. 그 심심한 듯 무심한 듯한 두부에 색깔을 입힌 게 바로 진로집이고 남임순 씨(77세)다. 두부라면 보통 부치고 삶아서 내는 게 고작인데, 맵게 만들어서 두부 두루치기란 용어를 퍼뜨린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애기들 낳고 살았쥬. 아이고, 쟤(가게를 맡고 있는 아들 김동현 씨(42세))가 다섯 살 때 남편이 그만 세상을 떴어유. 큰애들 학교 보내고 아들은 가게서 기르면서 진로집을 했쥬. 다 살자고 한 거예유.”
두부 두루치기는 다른 도시에 나와 사는 대전 출신 인사들이 고향의 음식으로 기억하는 음식이다. 그만큼 상징적이고 유명하다. 진로집 이후 청양식당, 광천식당 등의 두부 두루치기 전문점이 생겨서 큰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다.
“요 근처에 버스터미널이 있었고 아주 번화했쥬. 우리 집이 있는 데는 번화가 옆 골목길이고. 간단하게 한 끼 때우고 소주 한 잔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왔어유.”
관공서가 이주하면서 이 일대는 한동안 텅텅 비다시피 했다. 그래도 진로집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멀리서 일부러 오는 단골들이었다.
그러면 왜 하필 두부였을까.
“뭐 별 이유가 있었겠유? 새벽이면 살래에서 두부장수들이 나와 중앙시장에서 팔았쥬. 그거 사다가 부쳐서 조려서 팔던 게 진로집 명물이 됐쥬.”
‘살래’란 대전시로 통합되기 전 대덕군 산내면을 말한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산내면이다. 대전의 도심과 가까운 면이다. 거기서 두부 만드는 이들이 밤새 끓여 굳힌 두부를 들고 와서 팔았다는 얘기다.
진로집 메뉴는 단출하다. 두부가 주인공이고 칼국수와 전, 수육과 칼국수가 있다. 두부는 아주 미묘하면서 깊은 맛을 낸다. 매운맛이 입을 확 끌어당기는데 두부의 ‘순정’ 같은 심심함 위에 맛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이게 진로집의 맛을 결정한다.
“매운 고춧가루 넣고 멸치 같은 양념으루 오래 내서 조려유. 그게 우리 두루치기 맛이유.”
그게 전부가 아닌 듯하다. 두루치기란 딱 정해진 조리법이 있는 요리가 아니다. 역사도 잘 모른다. 국물이 있는 듯 없는 듯, 재료를 볶는 듯 끓이는 듯 만들어낸 요리가 바로 두루치기다. 돼지고기나 오징어 같은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쓴다. 이 집은 두부를 쓰되, 물리적인 기술을 넣었다. 두부는 부드럽지만 오래 끓여도 의외로 맛을 깊게 받아들이는 재료가 아니다. 찌개에 넣은 두부를 팔팔 끓여도 먹어보면 자기 존재를 잘 간직한다. 그래서 진로집 두부는 살짝 으깨어져 있다. 여기에 ‘고의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조렸는데 탁탁 뭉개서 조리니까 맛이 잘 배유. 손님들이 좋아하니까 계속 하게 된 거쥬.”
한 입만 먹어도 입 안 가득 퍼지는 양념과 두부의 부드러운 씹힘, 비결이 그것이었구나. 원래는 두부가 아니라 오징어 두루치가 원조였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에게 처음 하시는 말씀이다. 친정어머니가 시장에서 오징어를 ‘다라이(함지)’로 떼어다가 두루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손님이 “이것만 하지 말고 다른 안주도 좀 하라”고 해서 두부를 떼어 지져내던 것이 두부 두루치기로 발전했다.
“간장에 생두부로도 내고, 누가 지져 달라면 지져주고 하다가 결국은 두부 두루치기가 된 거쥬.”
주방에서
창조란 사실 우연하게 일어난다. 요새는 요리를 개발하지만 옛날엔 이런 식으로 사소한 변화가 오늘날 한국의 유명 음식의 뿌리가 된 사례가 많다. 한국식 안주의 대명사인 해물파전이며, 섞어찌개, 족발 같은 요리가 다 그런 방식으로 생겨났다. 대중의 요구와 가게 주인의 합작품이다. 국물 많은 서울식 불고기도 사리와 밥을 비벼먹고자 했던 탄수화물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 낸 60년대식 불고기다.
진로집은 오래도록 옛날 자리, 가게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더 인상적이다. 가게에 앉아 찬찬히 둘러보면, 이 구조가 바로 수수한 한옥집을 개조한 형태 그대로라는 걸 알 수 있다. 두부 두루치기의 매운 향이 가득 퍼지는 자리에 앉아서 술을 한 잔 마신다. 생각해 보면 이 집을 다녀간 수많은 이들이 앉아 있던 그 자리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꼭 두루치기가 뜨끈하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진로집 두 사장님과 박찬일 요리사
글/인터뷰 박찬일
사진 신태진
기획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 신한카드 & 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