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요리사의 백년가게 산책 #5
‘백년가게’는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 받아 공식 인증받은 점포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신한카드, 그리고 브릭스 매거진이 '백년가게'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 요리사와 함께 백년가게 탐방에 나섰습니다. 여러 저서를 통해 '노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중에 알린 박찬일 요리사와 다양한 지역으로 백년가게 탐방을 떠나보세요.

박찬일 요리사
* * *
을지로에서 시작해 현재는 홍대 경의선 기찻길에 자리를 잡은 을지OB베어
생맥주는 한국에 들어온 게 100년 정도 됐다. 병맥주는 더 길다. 적어도 대한제국 시기부터 황실에 수요가 있었다고 한다. 외국 대사관, 기업들이 가지고 오기도 했다. 일본이나 상해가 루트였다. 나중에는 맥주 공장도 생겼다. 우리가 마시는 주요 국산 맥주는 사실 이때 뿌리가 생겼다. ‘물 좋은’ 영등포에 공장이 만들어졌다.

박찬일 요리사와 을지OB베어의 사장님들
당시 신문이나 문학작품에는 맥주가 자주 등장한다. 1930년대 기준으로 한 병에 50전 내외였다고 한다. 회사원 월급이 10원, 20원 할 때니까 아주 비쌌다. 장안의 모던보이와 모던걸, 부자들이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카페나 레스토랑, 요정과 ‘비어홀’에서 맥주를 팔았다.
맥주가 대중화의 길을 걸은 건 1970년대 정도부터다. 수입이 올라가고 맥주값도 ‘무리하면’ 감당할 수 있었다. 이때 맥주 인기는 생맥주가 이끌었다. 병맥주보다 더 쌌고, 신선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70년대 젊음의 문화는 청바지와 장발, 통기타와 생맥주가 상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명동과 종로, 신촌 일대에 생맥줏집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원한 생맥주는 지금도 직장인들의 생명수와 같다
그 생맥주의 살아 있는 전설이 바로 을지OB베어다. 이 가게는 당시 오비의 생맥주 체인 1호로 시작했다. 을지로는 인쇄소와 공구상이 밀집한 전형적인 상업지역이었다. 80, 90년대는 대한민국의 호황기였다. 밤새 기계를 돌린 인쇄소 사람들, 지하철 교대한 역무원들이 이 가게를 찾았다. 생맥주가 고급주에서 청춘의 상징으로, 다시 노동자의 술이 되는 과정에 이 가게가 있었다.


을지OB베어 와우
필자는 어쩌다 노포 전문 작가가 됐다. 노포를 백여 곳 이상 취재해서 책을 두 권 냈다. 노포에 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이 전국에서 쇄도했다. 노포가 인기를 끌게 된 5년 전의 일이다. 요새는 가게마다 자기 역사를 꺼내어 닦고 광내서 선전한다. 노포는 이제 가게의 신뢰를 상징하는 의미가 됐다. 오래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우습게도 그 때문에 ‘가짜’ 노포도 생겼다. 가게 역사를 속여서 내건다. 별일이 다 생겼다. 그게 다 노포 바람 때문이다.
하지만 노포라고 다 좋은 일만 생긴 건 아니다. 주인이 노쇠하고, 대를 잇지 못해 스스로 문을 닫는 경우도 꽤 있다. 하지만 남이 나가라고 해서 쫓겨난 집도 있다. 을지OB베어가 그 한 예다. 2015년 서울시는 ‘서울미래유산’을 선정했다. 을지로에서는 노가리 골목이 그 영예를 안았다. 을지OB베어 덕이다. 1980년에 문을 열어 원조다. 하지만 40년 이상 장사해 오던 가게가 건물주의 재계약 거부로 졸지에 터전을 잃었다. 가게는 공중에 떠버렸다. 주인은 긴 싸움을 이어갔다. 속칭 노가리골목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몰려들었지만, 원조는 없어져 버렸다. 그 와중에 도시계획으로 노가리골목의 절반이 또 헐렸다.


여전히 연탄불로 노가리, 쥐포 등의 안주를 굽는 최주영 사장님
올해 초, 이 가게의 후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가게를 처음 열었던 강효근 옹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향년 97세. 황해도 출신 실향민. 딸과 사위에게 가게를 내주고 자택에 칩거하다가 별세했다. 한국 생맥주의 살아 있는 증인이 가신 것이었다.
을지OB베어의 상징과도 같은 간판
이 가게는 오랜 단골이 유난히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생맥주 한잔으로 목을 씻어내던 이들이다. 그 단골들이 갈 곳을 잃었다. 2세대인 딸 부부는 을지로의 다른 가게 터를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미 ‘힙지로’가 되어 월세도 크게 올랐고, 마땅한 터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마포 경의선 기찻길에 가게를 마련했다. 하지만 다시 을지로로 돌아갈 궁리다.
“을지로에서 시작해서 홍대입구로 왔지만, 그래도 뿌리는 을지로입니다. 다시 가야지요.”

아귀포와 오리지널&황태 노가리
가게를 다시 찾으려는 긴 싸움에 지칠 법도 하지만 을지로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최주영, 강호신 부부다. 아들 성혁도 전역 후 합류한 지 벌써 4년. 무엇보다 이 집의 상징인 생맥주 맛은 여전하다. 40년 이상 똑같은 브랜드에서 받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냉장해서 똑같은 온도로 따라내는 맛이다. 생맥주도 노포가 되는 세상, 우리나라도 이제 오래된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시대가 된 셈이다. 이 가게가 다시 을지로 시대를 열면 또 그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이어간다고나 할까.
창업주 고 강효근 옹의 디스펜싱 기술을 그대로 이어받은 따님 강호신 사장님
한 잔의 생맥주를 통쾌하게 마셨다. 여전한 맛이다. 노포는 이렇게 이어진다.


개업 당시 오비맥주에서 공급했던, 40년 넘은 역사적인 1,000cc 잔
글/인터뷰 박찬일
사진 신태진
기획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 신한카드 & 브릭스
박찬일 요리사의 백년가게 산책 #5
‘백년가게’는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 받아 공식 인증받은 점포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신한카드, 그리고 브릭스 매거진이 '백년가게'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 요리사와 함께 백년가게 탐방에 나섰습니다. 여러 저서를 통해 '노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중에 알린 박찬일 요리사와 다양한 지역으로 백년가게 탐방을 떠나보세요.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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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맥주는 한국에 들어온 게 100년 정도 됐다. 병맥주는 더 길다. 적어도 대한제국 시기부터 황실에 수요가 있었다고 한다. 외국 대사관, 기업들이 가지고 오기도 했다. 일본이나 상해가 루트였다. 나중에는 맥주 공장도 생겼다. 우리가 마시는 주요 국산 맥주는 사실 이때 뿌리가 생겼다. ‘물 좋은’ 영등포에 공장이 만들어졌다.
당시 신문이나 문학작품에는 맥주가 자주 등장한다. 1930년대 기준으로 한 병에 50전 내외였다고 한다. 회사원 월급이 10원, 20원 할 때니까 아주 비쌌다. 장안의 모던보이와 모던걸, 부자들이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카페나 레스토랑, 요정과 ‘비어홀’에서 맥주를 팔았다.
맥주가 대중화의 길을 걸은 건 1970년대 정도부터다. 수입이 올라가고 맥주값도 ‘무리하면’ 감당할 수 있었다. 이때 맥주 인기는 생맥주가 이끌었다. 병맥주보다 더 쌌고, 신선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70년대 젊음의 문화는 청바지와 장발, 통기타와 생맥주가 상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명동과 종로, 신촌 일대에 생맥줏집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생맥주의 살아 있는 전설이 바로 을지OB베어다. 이 가게는 당시 오비의 생맥주 체인 1호로 시작했다. 을지로는 인쇄소와 공구상이 밀집한 전형적인 상업지역이었다. 80, 90년대는 대한민국의 호황기였다. 밤새 기계를 돌린 인쇄소 사람들, 지하철 교대한 역무원들이 이 가게를 찾았다. 생맥주가 고급주에서 청춘의 상징으로, 다시 노동자의 술이 되는 과정에 이 가게가 있었다.
필자는 어쩌다 노포 전문 작가가 됐다. 노포를 백여 곳 이상 취재해서 책을 두 권 냈다. 노포에 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이 전국에서 쇄도했다. 노포가 인기를 끌게 된 5년 전의 일이다. 요새는 가게마다 자기 역사를 꺼내어 닦고 광내서 선전한다. 노포는 이제 가게의 신뢰를 상징하는 의미가 됐다. 오래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우습게도 그 때문에 ‘가짜’ 노포도 생겼다. 가게 역사를 속여서 내건다. 별일이 다 생겼다. 그게 다 노포 바람 때문이다.
하지만 노포라고 다 좋은 일만 생긴 건 아니다. 주인이 노쇠하고, 대를 잇지 못해 스스로 문을 닫는 경우도 꽤 있다. 하지만 남이 나가라고 해서 쫓겨난 집도 있다. 을지OB베어가 그 한 예다. 2015년 서울시는 ‘서울미래유산’을 선정했다. 을지로에서는 노가리 골목이 그 영예를 안았다. 을지OB베어 덕이다. 1980년에 문을 열어 원조다. 하지만 40년 이상 장사해 오던 가게가 건물주의 재계약 거부로 졸지에 터전을 잃었다. 가게는 공중에 떠버렸다. 주인은 긴 싸움을 이어갔다. 속칭 노가리골목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몰려들었지만, 원조는 없어져 버렸다. 그 와중에 도시계획으로 노가리골목의 절반이 또 헐렸다.
올해 초, 이 가게의 후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가게를 처음 열었던 강효근 옹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향년 97세. 황해도 출신 실향민. 딸과 사위에게 가게를 내주고 자택에 칩거하다가 별세했다. 한국 생맥주의 살아 있는 증인이 가신 것이었다.
이 가게는 오랜 단골이 유난히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생맥주 한잔으로 목을 씻어내던 이들이다. 그 단골들이 갈 곳을 잃었다. 2세대인 딸 부부는 을지로의 다른 가게 터를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미 ‘힙지로’가 되어 월세도 크게 올랐고, 마땅한 터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마포 경의선 기찻길에 가게를 마련했다. 하지만 다시 을지로로 돌아갈 궁리다.
“을지로에서 시작해서 홍대입구로 왔지만, 그래도 뿌리는 을지로입니다. 다시 가야지요.”
가게를 다시 찾으려는 긴 싸움에 지칠 법도 하지만 을지로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최주영, 강호신 부부다. 아들 성혁도 전역 후 합류한 지 벌써 4년. 무엇보다 이 집의 상징인 생맥주 맛은 여전하다. 40년 이상 똑같은 브랜드에서 받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냉장해서 똑같은 온도로 따라내는 맛이다. 생맥주도 노포가 되는 세상, 우리나라도 이제 오래된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시대가 된 셈이다. 이 가게가 다시 을지로 시대를 열면 또 그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이어간다고나 할까.
한 잔의 생맥주를 통쾌하게 마셨다. 여전한 맛이다. 노포는 이렇게 이어진다.
개업 당시 오비맥주에서 공급했던, 40년 넘은 역사적인 1,000cc 잔
글/인터뷰 박찬일
사진 신태진
기획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 신한카드 & 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