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가게] 상다리 휘는 회관음식, 익산 '영빈회관'

박찬일 요리사의 백년가게 산책 #7


‘백년가게’는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 받아 공식 인증받은 점포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신한카드, 그리고 브릭스 매거진이 '백년가게'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 요리사와 함께 백년가게 탐방에 나섰습니다. 여러 저서를 통해 '노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중에 알린 박찬일 요리사와 다양한 지역으로 백년가게 탐방을 떠나보세요.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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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익산군과 합쳐 익산시가 되었는데 한때 이리는 한강 아래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도 했다. 우리에게는 70년대 이리역 폭발사고로 기억되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리는 일제강점기에 성장한다. 너른 토지, 풍부한 물산을 모으고 중개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원광대 등이 있는 교육도시, 이미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화교들이 포목상을 전개하던 국제도시(노포 중국집이 많은 이유다), 강력한 소비도시였다.


전라도가 대체로 그렇지만, 반찬 깔아주는 문화는 익산이 최고 수준이다. 중국집에서도 반찬이 서너 개 깔릴 정도다. 이런 문화의 흔적을 과거 회관 문화에서 찾는 현지인들이 많다. 장석만(61) 사장이 그 회관 문화 증인 중 한 분이다.


영빈회관을 운영하는 장석만 대표


박찬일 요리사


“회관은 술값만 내면 반찬이 서른 가지 이상 깔렸어요. 다 요리사들이 새벽부터 만드는 거예요. 술을 더 시키면 안주가 더 나갔어요. 주인은 돈을 많이 벌었지요.”


익산시, 아니 과거의 이리시는 역전 건너편으로 상업 중심지가 발달했다. 지금은 신도심이 생겨서 과거만 못하지만, 거리를 걸으면 옛 영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동네에 사람들 바글거리는 중국집, 요릿집이 가득했지요. 회관 골목, 불고기 골목도 있었고, 회사원들도 많았고요. 뭣보다 옛날엔 계를 많이 했잖아요? 쌀계, 금반지계, 친목계, 낙찰계 등 온갖 계가 있었어요. 계원들이 모여서 밥을 먹는 데가 이 동네예요. 요리 먹는 접대 자리도 많았고요.”


영빈회관 내·외관


이리 귀금속단지 등이 세워지면서 사람과 돈이 더 몰렸다. 회관은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요릿집, 요정의 후신이라 할 만하다. 정종(일본식 청주의 속칭)에 온갖 요리를 깐 상을 놓았다. 접대부가 있었다. 이 지역을 일제강점기에는 영정통이라 불렀다. 서울로 치면 최대 번화가이자 환락가였던 명동, 충무로에 비견된다.


“장사가 얼마나 잘 되던지 사람이 줄을 섰어요. 당시 술값이 지금과 같아요. 40년 전과 똑같다면, 그때 얼마나 비싼 동네였겠어. 그래도 손님이 넘쳐났어요.”


이리시는 당시 정상적인 금융보다 성행하던 계, 사채가 많았다. 당연히 조폭도 많았다. 이 조직들이 나중에 서울로 진출하여 강남의 폭력계보를 잇기도 했다.


영빈회관의 생선회, 해산물


흔히 술과 각종 요리가 지천으로 깔리는 문화를 ‘다찌’, ‘통술’, ‘실비’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전국에 여러 문화가 있다.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과거 고급 요릿집과 서민술집 문화가 혼재된 것이다. 요릿집은 고급주에 한 상 요리가 차려졌고, 서민의 실비집은 술을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그날의 요리를 딸려 제공했다.


“교수, 고급공무원, 부자들이 오던 곳이 회관이에요. 그때는 외상 문화였어요. 먹고, 나중에 월말 수금을 해요. 지배인이 돈 받으러 시내를 돌아다녀요. 돈을 떼이면 지배인이 고초를 겪었죠.”


그는 유일한 회관 전문가다. 문자 그대로.


장석만 대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변변히 못 다녔어요. 열다섯 살에 서울 가서 방앗간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위독해서 1977년에, 이리역 폭발사고 나던 해에 고향에 돌아와서 회관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당시 제일 잘나가는 회관이 화신과 실비회관이었다. 이리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실비회관이 아마도 이리만의 독특한 회관 문화의 시조인 듯하다. 그는 화신회관에 들어갔다. 어린아이였으나, 그때는 그런 소년 노동이 흔했다. 그는 불판 닦는 일로 회관 시대의 첫발을 디뎠다.


영빈회관의 다양한 반찬들


“그땐 삼겹살 같은 건 고급 식당에서 안 팔았어요. 소고기, 불고기지요. 불판 닦고 홀도 보고. 2층까지 요리를 나르다가 그릇을 숱해 깼어요. 결국 미안해서 그만뒀어요.”


그리고는 다시 서울행. 명동 주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를 아끼던 화신회관 주인이 그곳까지 쫓아왔다. 다시 스카우트된 셈이었다. 회관 전성시대. 인근의 따로회관에서 그에게 쌀 한 가마니 선불을 주고 또 스카우트했다. 그러다 제대로 요리를 배울 요량으로 다시 상경했다. 서울사람들에게도 전설적인 일식집인 종로 부산초밥에서 일했다.


“1987년부터 다시 회관 골목으로 돌아왔어요.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저도 결혼하고 이제 고향에서 살기로 한 것이지.”


당시 화신, 낙원, 등대, 중앙회관이 유명했다. 그는 등대회관의 주방장에 취임했다. 마지막으론 중앙회관에 들어갔고 1991년에 영빈회관을 인수, 드디어 주인이 되었다.


영빈회관의 반찬들. 마지막 사진은 따로 주문한 민어탕


사실, 필자는 영빈회관에 가보기 전에 중앙생선가라는 인근의 다른 집에서 회관음식 체험을 처음 했다. 놀랍게도, 탕 한 그릇을 시키니 회가 정식으로 한 접시 나왔다. 온갖 조림에 튀김, 구이, 반찬이 한가득이었다. 그게 바로 익산의 명물, 회관음식이었다.


익산의 지인에게 부탁하여 그 역사를 증언해줄 분을 찾았고, 장 사장과 연결되었다. 그는 십 대부터 고된 노동으로 무릎이 다 상해 이미 수술까지 했다. 그러나 고생담조차 웃으며 담담하게 술회하는, 낙천적인 셰프였다. IMF로 빚내어 산 가게가 흔들리고, 돈 때문에 큰 고생을 치렀지만 영빈회관은 건재하다. 그의 낙천성이 지켜온 것으로 보였다.



그가 회를 썰어왔다. 칼맛이 서늘한, 놀라운 솜씨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단 말은, 적어도 요리업계에서 장석만 사장 같은 분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닐지.




글/인터뷰 박찬일
사진 신태진
기획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 신한카드 & 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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