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요리사의 백년가게 산책 #8
‘백년가게’는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 받아 공식 인증받은 점포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신한카드, 그리고 브릭스 매거진이 '백년가게'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 요리사와 함께 백년가게 탐방에 나섰습니다. 여러 저서를 통해 '노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중에 알린 박찬일 요리사와 다양한 지역으로 백년가게 탐방을 떠나보세요.

박찬일 요리사
* * *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회를 먹었다. 당연히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회 하면 바다를 떠올리지만 강과 개천에서 잡은 민물고기가 먼저다. 민물이 어로가 쉬웠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이 든 어른들은 민물회를 먹는다. 어려서부터 먹던 기억 때문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는 민물고기로 회를 시작했다. 내륙지역은 잉어며 붕어, 가물치회를 좋아했고 서울에서는 80년대부터 양식한 향어(이스라엘잉어)와 돔(필라티아)이 대인기였다. 바다 회의 수송이 원활하지 않아서 산 채로 수송하기 쉬운 민물회가 서울과 수도권 대도시에 풀렸다. 점차 광어와 우럭 양식이 생기고, 산소와 냉각시설을 갖춘 활어차가 퍼지면서 바다 회의 전국시대가 열렸다.
마산 강변횟집
그건 그렇고, 우리는 지금 창원시 마산역 앞에 와 있다. 오래된 횟집이다. 놀랍게도 민물회를 판다. 그것도 구색이 아니라 전문점이다. 강변횟집이 이 민물회 골목의 증인이고 노포인데, 그 후에 하나둘 생겨서 80여 곳이 넘었다. 우리는 의문을 가진다.
‘마산은 바다의 항구도시이고, 당연히 바다 회가 유명하다. 그런데 왜 민물회인가? 그것도 도시의 심장부인 마산역 앞에?’
그 해답을 찾아보자.
박찬일 요리사
강변횟집을 운영하는 이동열 대표
“요새는 바다 회도 같이 팝니다. 바다 회도 인기가 좋아요. 하지만 창업하고 오랫동안 민물고기만 팔았습니다.”
젊은 사장 이동열 씨(39세)로부터 창업자인 부모님 세대(부 이철호 님(71세), 모 김쌍점 님(64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변횟집 내부
“부모님 고향이 함안, 창녕 분들입니다. 내륙이지요.”
지금은 창녕이며 밀양 같은 경남의 내륙지역과 마산을 연결할 때는 대개 육로를 이용한다. 기차보다 버스가 편하고 빠르다. 옛날에는 길이 좋지 않아서 기차를 주로 이용했다. 그 전의 역사시대에는 물길이 핵심이었다. 한반도는 근대 이전에는 내륙 수로가 물류의 핵이었다. 배는 사람과 물자를 싸고 빠르게 날랐다.

경상도의 뭍을 적시고 흐르는 낙동강은 태백에서 발원, 여러 지역을 돌아서 마산과 부산의 바다로 빠져나간다. 경상도의 핵심 물류는 낙동강 물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상도의 수탈 물자는 물길로 옮겨서 마산항,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남태평양의 전선으로 옮겨갔다.
“물길이 마산으로 이어지고 철길도 마산으로 통했다고 합니다. 저도 부모님한테 들은 얘기지만. 그때 마산역이 대단했다고 해요. 사람, 물자가 오가고 역 앞이 번성했다고 합니다. 저 어릴 때 기억에도 이 골목이 다 민물고기 골목이라고, 아주 유명했어요.”
내륙의 민물고기가 기차로 마산역 앞에 부려졌다. 마산역은 당시 먹고 마시기에 제일 좋은 지역이었다. 강변횟집에서 붕어찜을 하고 민물회를 떠내자 사람들이 몰렸다.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바다에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별미가 바로 민물회가 아니었을까.
강변횟집의 향어회
강변횟집 사장이 회를 내왔다. 아름다운 접시다. 향어의 살점이 푸짐하되 미학적인 멋까지 담겨 있다. 회를 듬뿍 집어 양념을 올리고 쌈을 쌌다. 그제야 왜 마산에서 민물회가 번성하는지 이해가 됐다. 맛있다. 고소하다.
“양도 많고 인심도 좋아서 많이 왔다고 해요.”


주인의 설명이다. 현장에 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상상에 갇힌다. 마산의 맛의 역사는 마산역 앞에서 민물고기 골목을 봐야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속칭 민물횟집거리를 걸어보았다. 옛 마산지역에 신시가지, 유흥지역이 많이 생기면서 이곳은 과거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가게들이 성업하고 있고, 민물회를 판다.

강변횟집의 매력적인 양념장
“요새는 경상도 내륙에서 생선이 오지는 않습니다. 타지역의 양식장에서 활어 상태로 옵니다. 물류며, 양식장이며 다 바뀐 것이지요.”
강변횟집도 처음에는 향어를 취급하지 않았다. 붕어와 잉어가 전문이었다. 향어는 식욕이 왕성하고 빨리 자란다. 점차 붕어와 잉어라는 양대 민물고기의 왕에 도전한다. 그리고 적어도 횟감으로는 향어가 대세가 된다. 값도 아무래도 더 쌌다. 향어는 마산보다 내륙인 대구권에서 먼저 번성한 어종이다. 점차 마산에도 전해진다.

“맞습니다. 부모님이 개업하셨을 때는 향어가 없었어요.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아마도, 기생충 우려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자연산 민물고기라면 기생충 걱정이 크기 때문이다. 강변횟집은 수도권의 민물횟집 주요 어종이었던 이른바 역돔은 팔아본 적 없다고 한다.
강변횟집의 한 상
민물횟집거리는 한때 얼마나 장사가 잘되고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아무 가게에나 상에 초장 접시 깔고 회를 썰면 바로 대박이 난다고 했다. 오동동과 시장통의 작은 음식점 말고는 본격적인 유흥거리가 없던 80년대, 마산역의 이 거리는 막 성장하던 소비 시대를 거치면서 물이 올랐다. 이제는 많이 한적해졌다. ‘갈 데가 많아진’ 시대의 영향이다.
강변횟집 이동열 대표
“그래도 오래 이 집을 지켜야지요. 아직 젊으니까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팔팔한 사장님의 표정이 믿음직했다. 마산 민물회의 역사가 이렇게 또 이어져 간다.

글·인터뷰 | 박찬일
사진 | 신태진
기획 |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 신한카드 & 브릭스
박찬일 요리사의 백년가게 산책 #8
‘백년가게’는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 받아 공식 인증받은 점포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신한카드, 그리고 브릭스 매거진이 '백년가게'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 요리사와 함께 백년가게 탐방에 나섰습니다. 여러 저서를 통해 '노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중에 알린 박찬일 요리사와 다양한 지역으로 백년가게 탐방을 떠나보세요.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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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회를 먹었다. 당연히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회 하면 바다를 떠올리지만 강과 개천에서 잡은 민물고기가 먼저다. 민물이 어로가 쉬웠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이 든 어른들은 민물회를 먹는다. 어려서부터 먹던 기억 때문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는 민물고기로 회를 시작했다. 내륙지역은 잉어며 붕어, 가물치회를 좋아했고 서울에서는 80년대부터 양식한 향어(이스라엘잉어)와 돔(필라티아)이 대인기였다. 바다 회의 수송이 원활하지 않아서 산 채로 수송하기 쉬운 민물회가 서울과 수도권 대도시에 풀렸다. 점차 광어와 우럭 양식이 생기고, 산소와 냉각시설을 갖춘 활어차가 퍼지면서 바다 회의 전국시대가 열렸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지금 창원시 마산역 앞에 와 있다. 오래된 횟집이다. 놀랍게도 민물회를 판다. 그것도 구색이 아니라 전문점이다. 강변횟집이 이 민물회 골목의 증인이고 노포인데, 그 후에 하나둘 생겨서 80여 곳이 넘었다. 우리는 의문을 가진다.
‘마산은 바다의 항구도시이고, 당연히 바다 회가 유명하다. 그런데 왜 민물회인가? 그것도 도시의 심장부인 마산역 앞에?’
그 해답을 찾아보자.
“요새는 바다 회도 같이 팝니다. 바다 회도 인기가 좋아요. 하지만 창업하고 오랫동안 민물고기만 팔았습니다.”
젊은 사장 이동열 씨(39세)로부터 창업자인 부모님 세대(부 이철호 님(71세), 모 김쌍점 님(64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모님 고향이 함안, 창녕 분들입니다. 내륙이지요.”
지금은 창녕이며 밀양 같은 경남의 내륙지역과 마산을 연결할 때는 대개 육로를 이용한다. 기차보다 버스가 편하고 빠르다. 옛날에는 길이 좋지 않아서 기차를 주로 이용했다. 그 전의 역사시대에는 물길이 핵심이었다. 한반도는 근대 이전에는 내륙 수로가 물류의 핵이었다. 배는 사람과 물자를 싸고 빠르게 날랐다.
경상도의 뭍을 적시고 흐르는 낙동강은 태백에서 발원, 여러 지역을 돌아서 마산과 부산의 바다로 빠져나간다. 경상도의 핵심 물류는 낙동강 물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상도의 수탈 물자는 물길로 옮겨서 마산항,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남태평양의 전선으로 옮겨갔다.
“물길이 마산으로 이어지고 철길도 마산으로 통했다고 합니다. 저도 부모님한테 들은 얘기지만. 그때 마산역이 대단했다고 해요. 사람, 물자가 오가고 역 앞이 번성했다고 합니다. 저 어릴 때 기억에도 이 골목이 다 민물고기 골목이라고, 아주 유명했어요.”
내륙의 민물고기가 기차로 마산역 앞에 부려졌다. 마산역은 당시 먹고 마시기에 제일 좋은 지역이었다. 강변횟집에서 붕어찜을 하고 민물회를 떠내자 사람들이 몰렸다.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바다에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별미가 바로 민물회가 아니었을까.
강변횟집 사장이 회를 내왔다. 아름다운 접시다. 향어의 살점이 푸짐하되 미학적인 멋까지 담겨 있다. 회를 듬뿍 집어 양념을 올리고 쌈을 쌌다. 그제야 왜 마산에서 민물회가 번성하는지 이해가 됐다. 맛있다. 고소하다.
“양도 많고 인심도 좋아서 많이 왔다고 해요.”
주인의 설명이다. 현장에 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상상에 갇힌다. 마산의 맛의 역사는 마산역 앞에서 민물고기 골목을 봐야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속칭 민물횟집거리를 걸어보았다. 옛 마산지역에 신시가지, 유흥지역이 많이 생기면서 이곳은 과거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가게들이 성업하고 있고, 민물회를 판다.
“요새는 경상도 내륙에서 생선이 오지는 않습니다. 타지역의 양식장에서 활어 상태로 옵니다. 물류며, 양식장이며 다 바뀐 것이지요.”
강변횟집도 처음에는 향어를 취급하지 않았다. 붕어와 잉어가 전문이었다. 향어는 식욕이 왕성하고 빨리 자란다. 점차 붕어와 잉어라는 양대 민물고기의 왕에 도전한다. 그리고 적어도 횟감으로는 향어가 대세가 된다. 값도 아무래도 더 쌌다. 향어는 마산보다 내륙인 대구권에서 먼저 번성한 어종이다. 점차 마산에도 전해진다.
“맞습니다. 부모님이 개업하셨을 때는 향어가 없었어요.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아마도, 기생충 우려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자연산 민물고기라면 기생충 걱정이 크기 때문이다. 강변횟집은 수도권의 민물횟집 주요 어종이었던 이른바 역돔은 팔아본 적 없다고 한다.
민물횟집거리는 한때 얼마나 장사가 잘되고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아무 가게에나 상에 초장 접시 깔고 회를 썰면 바로 대박이 난다고 했다. 오동동과 시장통의 작은 음식점 말고는 본격적인 유흥거리가 없던 80년대, 마산역의 이 거리는 막 성장하던 소비 시대를 거치면서 물이 올랐다. 이제는 많이 한적해졌다. ‘갈 데가 많아진’ 시대의 영향이다.
“그래도 오래 이 집을 지켜야지요. 아직 젊으니까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팔팔한 사장님의 표정이 믿음직했다. 마산 민물회의 역사가 이렇게 또 이어져 간다.
글·인터뷰 | 박찬일
사진 | 신태진
기획 |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 신한카드 & 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