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엘리의 모리셔스 이야기 #3
한국에 다녀 온 지 어느덧 일주일이 되어간다. 한국에 갔었는지 조차 의심스럽게 아득히 먼 기억 같다. 작년 여름에 한국을 다녀온 후 올해 2월에 동생 결혼식에 참석차 또 한국에서 한 달을 보냈다.
공항 입국장을 나왔을 때 3년 만에 느끼는 차가운 날씨에 내심 설레기까지 했다.
모리셔스에 겨울옷이 하나도 없어 세 식구가 모두 봄옷을 겹겹이 입고 왔는데 찬 공기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딸아이가 춥다고 하는데도 난 상쾌하기만 했다. 익숙한 냄새,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유모차를 신나게 끌고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느껴보는 추위에 딸아이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셋이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깨끗이 비운 후 난 닭발을 사와 홀로 또 맛있게 먹었다. 배가 찢어질 것 같았지만 행복했다. 누가 보면 모리셔스 거지들이 온 줄 알았을 거다.
교통은 어쩜 이리 편리할까. 한국 지하철이 얼마나 잘되어 있는지 새삼 느꼈다. 모든 게 신속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친절했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서비스 마인드가 배어 있어 손님들에게 친절하지만 모리셔스는 그렇지 않다. 많은 점원들이 돈을 받고 그에 맞는 상품을 제공하면 그뿐이라 여긴다. 친절한 미소와 묻지 않은 설명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종종 물어도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올 때가 많다.)
한국의 배달시스템은 또 어떠한가. 내가 떠난 3년 동안 배달 가능한 상품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배달 앱 하나면 커피에 조각 케이크까지 배달됐다. 인터넷 쇼핑은 또 어떤가. 오늘 주문하면 내일 배송! 다양한 상품, 품질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품질, “오 마이 갓!” 사실 한국의 시스템이 너무나 그리웠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에 살 때는 몰랐다.
2차선 도로와 사탕수수
그런데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핸드폰에 재난 문자가 연일 울려댔다. 미세 먼지 주의보였다. 최고 나쁨의 '최고'라는 단어가 사람의 심리를 위축시켰다. 지난여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와 건조함에 얼굴과 입술이 터질 것만 같았고, 밖에 나가는 것이 꺼려졌다. 건성 피부인 딸아이는 온몸을 긁어서 몸 여기저기 손톱자국이었다. 이미 눈 주위까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모리셔스는 습도가 놓아 화장을 해도 화장이 들뜨거나 밀리는 느낌이 없었는데 화장을 하면 가뭄에 마른 땅이 갈라지듯 주름 하나하나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갑자기 몇 년은 더 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지인들과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심각한 미세먼지, 그리고 서울의 높은 아파트값이었는데 자연스레 많은 지인들로부터 미세먼지 없고 자녀가 영어와 불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곳에서 사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한국에도 모리셔스에도 집이 없는 나에겐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이 몰려왔다. 언제가 될지 모르나 나중에 서울에 돌아올 그날, 우리 가족은 과연 집을 살 수 있을까. 느리게 가는 모리셔스에서 모든 현실과 동떨어져 살다가 다시 돌아오면 우리만 뒤처진 바보가 되어 있지 않을까.
또, 시작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나를 옥죄었던 그 무게감, 타인과의 경쟁, 비교, 시기, 질투의 감정이. 이런 숙제 같은 감정을 안고 난 다시 모리셔스로 돌아왔다.
미세먼지 낀 한국의 보통 날
모리셔스 공항에 착륙하니 더운 기운이 이 날씨를 잊고 있던 나의 세포들을 깨운다. 그동안 건조함에 터질 것 같던 얼굴과 가려움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확실히 한국보다 하늘이 가까이 있는 느낌이다. 공기가 너무 다르다. 이제 살 것 같다.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인가. 이곳에서 살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한 달 간 돌보지 못한 잡풀이 정원에 무성하다. 집안에 들어가니 곳곳에 도마뱀이 똥이 싸 놨다. 음식도 없는데 개미들이 주방을 기어 다닌다. 천장의 팬을 돌려도 더위는 가시지 않는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싶은데 그럼 외국인 피를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 집 힘센 모기들이 집안으로 돌진할 것이 뻔해 방충망을 설치한 창문을 제외하곤 열 수가 없다. 현지인들은 방충망을 설치하지 않기 때문에 설치 업자를 찾는 것도 힘들었고 제품을 설치하기까지 한 달 이상이 걸렸다. 비용이 높기도 하고 우리 집도 아니어서 창문 몇 개는 그냥 놔뒀는데 여름마다 그게 너무나 아쉽다. 그리고 집주인이 에어컨을 방 하나에만 설치 해줘서 거실은 그냥 더운 바람이 부는 찜통이다. 샤워를 할까 하고 물을 트니 물은 맥없이 졸졸 나온다. 딸아이 욕조에 한참을 물을 받아 대충 씻은 후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때운다. 억척스럽게 싸온 떡볶이 떡과 조기, 엄마의 김장 김치를 집주인이 사준 300리터도 안 되는 일반형 냉장고에 구겨 넣는데 진짜 냉장고가 터질 것만 같다.
그러더니 이번엔 정전이다. 멀리서 사이클론이라도 지나가고 있나 보다. 작년 12월에 제작을 맡긴 직원 유니폼도 돌아오기 전에 끝나 있어야 했는데, 업체는 4개월 째 2주 후에 된다는 말만 다시 반복하고 있다. 마침내 짜증이 솟구친다. 한국에서 누렸던 그 모든 문명의 혜택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엉망인 시스템에 불평이 터져 나온다. 이 모든 게 내가 모리셔스에 돌아온 지 일주일 안에 벌어진 일이다. “오 마이 갓!”
전봇대가 나무라 강풍, 스콜에 자주 전기가 나간다.
3년 전 이곳에 오며 기존의 습관을 버리고 느리게 살자. 맥시멈 라이프 대신 미니멀 라이프를 살자…고 다짐했다. 3년은 35년의 습관을 고치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감사한 건 이곳에 살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은 덜 난다는 것이다.
월세 40만 원의 우리 집은 서울의 고층 아파트나 고급 주택처럼 근사하진 않지만,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노란색 집이고 넓은 정원이 딸려 있다. 남편은 그 정원에서 골프를 연습한다. 한 달에 한 번 2만 원 정도만 지불하면 마음씨 좋은 가드너가 와서 말끔히 잔디도 정리해 준다. 딸아이는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딸린 유치원에 다닌다. 인터내셔널 스쿨이기 때문에 모든 커리큘럼이 영어로 되어 있다. 과거엔 프랑스어가 공용어였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 딸아이는 지금은 영어를 못해서 유치원에서 눈치로 살고 있지만 곧 한국어 폭발시기가 왔듯이 영어와 프랑스어도 자연스럽게 구사할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딸 아이의 등원길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환경적 요인, 사회적 요인으로 해외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 역시 한국에 살 때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평생을 내내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았다. 도전 정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 기사나 잡지에 나오는 지상 낙원이 럭셔리 여행일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실제 거주를 한다면 한국의 풍습과는 다른 그들과의 문화차이(또는 생각의 차이)와 마주하게 되고, 또 다른 사회 시스템에 적응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안다. 무엇보다 모든 문제는 의식주로 귀결되니 결국 돈도 벌어야 한다. 삶은 서울에서나 모리셔스에나 똑같은 노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한국과 모리셔스 중에 어디가 더 좋아? 라고 많은 사람들이 묻지만 여전히 정답이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결핍된 것들을 모리셔스에서 채워주고, 모리셔스에서 결핍된 것들을 한국에 가면 채워주니 이 정도면 우는 소리 말고 ‘난 행복한 사람이에요’ 해야 할 듯싶다.
글/사진 정은숙
서울에서 10년간 무역회사에 근무하다 2016년 남편, 딸 아이와 함께 모리셔스로 건너가 작은 사업을 하며 시트콤 삶을 살고 있는 한국아줌마. 영어이름이 Elly라서 이곳에서는 마담 앨리로 불린다.
마담 엘리의 모리셔스 이야기 #3
한국에 다녀 온 지 어느덧 일주일이 되어간다. 한국에 갔었는지 조차 의심스럽게 아득히 먼 기억 같다. 작년 여름에 한국을 다녀온 후 올해 2월에 동생 결혼식에 참석차 또 한국에서 한 달을 보냈다.
공항 입국장을 나왔을 때 3년 만에 느끼는 차가운 날씨에 내심 설레기까지 했다.
모리셔스에 겨울옷이 하나도 없어 세 식구가 모두 봄옷을 겹겹이 입고 왔는데 찬 공기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딸아이가 춥다고 하는데도 난 상쾌하기만 했다. 익숙한 냄새,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유모차를 신나게 끌고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느껴보는 추위에 딸아이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셋이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깨끗이 비운 후 난 닭발을 사와 홀로 또 맛있게 먹었다. 배가 찢어질 것 같았지만 행복했다. 누가 보면 모리셔스 거지들이 온 줄 알았을 거다.
교통은 어쩜 이리 편리할까. 한국 지하철이 얼마나 잘되어 있는지 새삼 느꼈다. 모든 게 신속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친절했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서비스 마인드가 배어 있어 손님들에게 친절하지만 모리셔스는 그렇지 않다. 많은 점원들이 돈을 받고 그에 맞는 상품을 제공하면 그뿐이라 여긴다. 친절한 미소와 묻지 않은 설명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종종 물어도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올 때가 많다.)
한국의 배달시스템은 또 어떠한가. 내가 떠난 3년 동안 배달 가능한 상품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배달 앱 하나면 커피에 조각 케이크까지 배달됐다. 인터넷 쇼핑은 또 어떤가. 오늘 주문하면 내일 배송! 다양한 상품, 품질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품질, “오 마이 갓!” 사실 한국의 시스템이 너무나 그리웠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에 살 때는 몰랐다.
2차선 도로와 사탕수수
그런데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핸드폰에 재난 문자가 연일 울려댔다. 미세 먼지 주의보였다. 최고 나쁨의 '최고'라는 단어가 사람의 심리를 위축시켰다. 지난여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와 건조함에 얼굴과 입술이 터질 것만 같았고, 밖에 나가는 것이 꺼려졌다. 건성 피부인 딸아이는 온몸을 긁어서 몸 여기저기 손톱자국이었다. 이미 눈 주위까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모리셔스는 습도가 놓아 화장을 해도 화장이 들뜨거나 밀리는 느낌이 없었는데 화장을 하면 가뭄에 마른 땅이 갈라지듯 주름 하나하나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갑자기 몇 년은 더 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지인들과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심각한 미세먼지, 그리고 서울의 높은 아파트값이었는데 자연스레 많은 지인들로부터 미세먼지 없고 자녀가 영어와 불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곳에서 사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한국에도 모리셔스에도 집이 없는 나에겐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이 몰려왔다. 언제가 될지 모르나 나중에 서울에 돌아올 그날, 우리 가족은 과연 집을 살 수 있을까. 느리게 가는 모리셔스에서 모든 현실과 동떨어져 살다가 다시 돌아오면 우리만 뒤처진 바보가 되어 있지 않을까.
또, 시작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나를 옥죄었던 그 무게감, 타인과의 경쟁, 비교, 시기, 질투의 감정이. 이런 숙제 같은 감정을 안고 난 다시 모리셔스로 돌아왔다.
미세먼지 낀 한국의 보통 날
모리셔스 공항에 착륙하니 더운 기운이 이 날씨를 잊고 있던 나의 세포들을 깨운다. 그동안 건조함에 터질 것 같던 얼굴과 가려움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확실히 한국보다 하늘이 가까이 있는 느낌이다. 공기가 너무 다르다. 이제 살 것 같다.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인가. 이곳에서 살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한 달 간 돌보지 못한 잡풀이 정원에 무성하다. 집안에 들어가니 곳곳에 도마뱀이 똥이 싸 놨다. 음식도 없는데 개미들이 주방을 기어 다닌다. 천장의 팬을 돌려도 더위는 가시지 않는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싶은데 그럼 외국인 피를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 집 힘센 모기들이 집안으로 돌진할 것이 뻔해 방충망을 설치한 창문을 제외하곤 열 수가 없다. 현지인들은 방충망을 설치하지 않기 때문에 설치 업자를 찾는 것도 힘들었고 제품을 설치하기까지 한 달 이상이 걸렸다. 비용이 높기도 하고 우리 집도 아니어서 창문 몇 개는 그냥 놔뒀는데 여름마다 그게 너무나 아쉽다. 그리고 집주인이 에어컨을 방 하나에만 설치 해줘서 거실은 그냥 더운 바람이 부는 찜통이다. 샤워를 할까 하고 물을 트니 물은 맥없이 졸졸 나온다. 딸아이 욕조에 한참을 물을 받아 대충 씻은 후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때운다. 억척스럽게 싸온 떡볶이 떡과 조기, 엄마의 김장 김치를 집주인이 사준 300리터도 안 되는 일반형 냉장고에 구겨 넣는데 진짜 냉장고가 터질 것만 같다.
그러더니 이번엔 정전이다. 멀리서 사이클론이라도 지나가고 있나 보다. 작년 12월에 제작을 맡긴 직원 유니폼도 돌아오기 전에 끝나 있어야 했는데, 업체는 4개월 째 2주 후에 된다는 말만 다시 반복하고 있다. 마침내 짜증이 솟구친다. 한국에서 누렸던 그 모든 문명의 혜택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엉망인 시스템에 불평이 터져 나온다. 이 모든 게 내가 모리셔스에 돌아온 지 일주일 안에 벌어진 일이다. “오 마이 갓!”
전봇대가 나무라 강풍, 스콜에 자주 전기가 나간다.
3년 전 이곳에 오며 기존의 습관을 버리고 느리게 살자. 맥시멈 라이프 대신 미니멀 라이프를 살자…고 다짐했다. 3년은 35년의 습관을 고치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감사한 건 이곳에 살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은 덜 난다는 것이다.
월세 40만 원의 우리 집은 서울의 고층 아파트나 고급 주택처럼 근사하진 않지만,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노란색 집이고 넓은 정원이 딸려 있다. 남편은 그 정원에서 골프를 연습한다. 한 달에 한 번 2만 원 정도만 지불하면 마음씨 좋은 가드너가 와서 말끔히 잔디도 정리해 준다. 딸아이는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딸린 유치원에 다닌다. 인터내셔널 스쿨이기 때문에 모든 커리큘럼이 영어로 되어 있다. 과거엔 프랑스어가 공용어였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 딸아이는 지금은 영어를 못해서 유치원에서 눈치로 살고 있지만 곧 한국어 폭발시기가 왔듯이 영어와 프랑스어도 자연스럽게 구사할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딸 아이의 등원길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환경적 요인, 사회적 요인으로 해외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 역시 한국에 살 때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평생을 내내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았다. 도전 정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 기사나 잡지에 나오는 지상 낙원이 럭셔리 여행일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실제 거주를 한다면 한국의 풍습과는 다른 그들과의 문화차이(또는 생각의 차이)와 마주하게 되고, 또 다른 사회 시스템에 적응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안다. 무엇보다 모든 문제는 의식주로 귀결되니 결국 돈도 벌어야 한다. 삶은 서울에서나 모리셔스에나 똑같은 노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한국과 모리셔스 중에 어디가 더 좋아? 라고 많은 사람들이 묻지만 여전히 정답이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결핍된 것들을 모리셔스에서 채워주고, 모리셔스에서 결핍된 것들을 한국에 가면 채워주니 이 정도면 우는 소리 말고 ‘난 행복한 사람이에요’ 해야 할 듯싶다.
글/사진 정은숙
서울에서 10년간 무역회사에 근무하다 2016년 남편, 딸 아이와 함께 모리셔스로 건너가 작은 사업을 하며 시트콤 삶을 살고 있는 한국아줌마. 영어이름이 Elly라서 이곳에서는 마담 앨리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