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공립도서관의 사서][역사 여행]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편지와 세비야에서 잠든 그의 이야기

2026-01-05


뉴욕 공립도서관의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2


뉴욕공립도서관에 보관된 콜럼버스의 편지


나는 뉴욕공립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도서관이 갖고 있는 특별한 보물들을 방문자들과 나누는 순간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수많은 자료 가운데서도 유독 많은 이들의 발길과 시선을 끄는 문서가 있다.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루이스 데 산탕헬(Luis de Santángel)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 흔히 ‘콜럼버스의 산탕헬 서한’이라 불리는 문서이다. 이 역사적인 편지를 직접 보기 위해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 많은 방문객이 도서관을 찾는다. 그 편지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1493년의 유럽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아메리카라는(콜럼버스는 죽을때까지 아메리카를 인디아라고 믿고 있었다) 신대륙에 대해 전해 들었을 당시의 스페인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분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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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에 레녹스 도서관(Lenox Library)이 런던의 서적상 버나드 콰리치(Bernard Quaritch)로 부터 사들인 콜럼버스의 펀지
(Letter of Columbus to Luis de Santangel, dated 15 February 1493) ⓒ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콜럼버스를 만나기 위한 스페인 세비야 여행


지난 2025년 늦가을, 나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를 여행했다. 세비야(Sevilla)에 머물며 친구들과 렌트카를 타고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 문화 탐방의 여정이었다. 그 여정의 첫 목적지는 세비야 대성당이었다. 그곳에 바로 콜럼버스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비야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스페인 태생도 아닌 이탈리아 사람 콜럼버스를 더 깊이 이해하고, 내가 일하고 있는 뉴욕공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편지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기 위해서, 먼저 세비야라는 도시가 어떤 곳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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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왕립 알카사르의 알미란테의 방에 있는 알레호 페르난데스가 1521년에 그린 바다의 성모(La Virgen de los Mareantes) 중 콜럼버스의 얼굴.
현존하는 그림 중 그를 가장 잘 나타낸 그림이라 한다. @Wikimedia Commons


세비야는 스페인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그 기원은 기원전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성경 역사와 로마사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오고 있는데, 세비야와 관련있는 성경속 일화를 소개한다.


구약 성경 중 요나서에 따르면,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아시리아의 니느웨(오늘날 이라크 지역)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다시스(Tarshish 혹은 Tartessos)’라 불린 먼 서방의 땅으로 도망치려 했다. 일부 전승에서는 이 ‘다시스’를 스페인의 고대 도시 세비야, 즉 히스팔리스(Hispalis)와 연결하여 이해하기도 한다. 기원전 2세기경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세비야는 중요한 행정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재위 AD 98–117)와 하드리아누스(재위 AD 117–138)가 모두 세비야 근교 이탈리카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이 도시가 로마 제국 내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이 시기와 가까운 시대로,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을 집필한 사도 바울은 제1차 로마 옥중 생활(AD 60~62)을 마치고 몇 년 후 로마에서 순교하기 전에, 평소 소원이던 서방 끝, 서바나(스페인) 선교를 위해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남긴 신약성경의 서신에는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세비야에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고 바울의 설교는 주로 유대인 회당에서 이루어졌기에, 이러한 정황은 바울이 서바나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f067ac5224542.png세비야 대성당 ⓒIngo Mehling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 세비야는 다양한 민족과 왕조의 지배를 거치며 수차례 흥망성쇠를 경험했다. 8세기 초 무슬림 아랍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자 세비야는 알 안달루스(Al-Andalus)라 불리던 이슬람 왕국의 핵심 도시로 성장했다. 이 시기 세비야는 상업과 건축이 크게 발달하며 문화적 황금기를 누렸고,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슬람 시대에 도입된 쓴 오렌지 나무(Naranja amarga)는 도시 풍경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당시 아랍인들이 관개시설과 정원 문화를 도입하며 심기 시작한 수만 그루의 오렌지 나무는, 지금도 세비야의 거리와 정원, 성당 안뜰까지 가득 채우고 있으며 특히 겨울에 그 향기와 색깔이 어루러지며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도시의 중심에 우뚝 선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 3대 고딕 성당 가운데 하나로, 한때 모스크였던 터 위에 세워진 만큼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역사를 품은 살아 있는 박물관과도 같다. 이곳은 1189년,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에 의해 모스크로 건립되었으며, 1248년 카톨릭 세력이 세비야를 점령한 이후 성당으로 전환되었다.  


사방으로 뻗은 네 개의 파사드와 열다섯 개의 문, 분수와 오렌지나무가 어우러진 파티오, 그리고 성당의 상징인 히랄다(Giralda) 탑에 이르기까지, 건물 곳곳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흔적이 겹겹이 스며 있다. 탑에 오르면 성당 전경과 함께 세비야 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지며, 그 풍경 속에서 축적된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히랄다 탑은 유럽 대부분의 종탑이 계단을 통해 오르게 설계된 것과 달리, 계단 대신 완만한 경사로가 이어져 있다. 이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탑을 오르내리며 기도 시간을 알렸던 무슬림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로, 말에 올라탄 채 이동할 수 있도록 고안된 지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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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성당의 상징인 히랄다 탑과 성당 전경, 1850.  캡스턴 담배(Capstan Cigarettes) 컬렉션은
여러 나라에서 제작된 담배 카드 약 10만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성당 내부는 조금은 기괴하지만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유럽의 전통 고딕양식과는 전혀 다른 바로크 양식의 제단과 천장 곳곳에 금박 장식이 반짝이며, 이는 중세 스페인의 신앙과 권력을 그대로 드러낸다. 바로 이 화려한 공간 한편에 특별한 관이 놓여 있다. 네 명의 왕국 대표가 거꾸로 들어 올린 그 관 속에 콜럼버스가 잠들어 있다. 생전에 그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거꾸로 들어올린 관으로 발이 땅에 닿지 않았으니 그의 말대로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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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대성당의 황금 제단(레탈보 마요르)은 16세기 스페인 종교 미술의 걸작으로,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대부분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과정에서 가져온 잉카 보물로 만들어졌다. 제단은 식민지 부와 르네상스 미술의 웅장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Ingo Mehling


1493년, 신대륙에서 돌아오며 쓰여진 역사적 편지


1492년 인도를 찾아 항해에 나섰던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뒤 1493년 첫 항해를 마치고 귀환하는 중이었다. 모두 세 척이었던 그의 선단 중 산타마리아호는 이미 오늘날의 아이티 지역에서 침몰한 상태였다. 그런데 남아 있던 두 척의 배 니냐(Niña)와 핀타(Pinta)도 폭풍을 만났다. 그는 자신과 항해 기록이 모두 사라질 것을 두려워해, 탐험 내용을 상세히 적은 편지를 양피지에 기록한 뒤 밀랍 천으로 감싸 나무 통에 넣었다. 그리고 그 통에는 “발견 시 스페인 국왕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지시를 적어 바다에 던졌다. 안타깝게도 이 자필 편지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도 어딘가 대양 위를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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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배들: 산타 마리아호, 니냐호, 핀타호. 1892.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콜럼버스의 배들은 다행히 침몰을 면했다. 거센 폭풍으로 항로를 벗어나 1493년 3월 4일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하며 유럽 본토에 무사히 발을 디뎠다. 이후 스페인 정부의 허락을 받은 그는, 출항지였던 세비야 인근 팔로스 항구(Palos de la Frontera)로 3월 13일부터 15일 사이에 돌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4월이 되어서야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머물고 있던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이는 1492년 1월,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를 정복하며 레콩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를 마무리한 뒤, 두 군주가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곳에서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도착 직전인 1493년 2월 15일, 자신의 항해 소식을 스페인 군주들에게 최대한 신속히 전하기 위해 두 통의 편지를 작성했다. 그중 첫 번째 편지는 가톨릭 군주인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스페인어로 보낸 것이었는데, 이 편지는 곧 국제 공용어였던 라틴어로 번역되어 1493년 말경 로마에서 인쇄되었다. 인쇄된 이 서한은 유럽 전역의 학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널리 배포되며, 신대륙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 편지는 왕실 재무부 서기관이었던 루이스 데 산탕헬(Luis de Santángel)에게 보내졌다. 산탕헬은 군주의 재정과 정치에 깊이 관여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그의 신뢰를 얻어 신대륙의 존재와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풍요로운 자원을 빠르게 알리려 했다. 첫번째 편지가 공식적인 필체로 쓰여졌다면 이 편지는 보다 구체적으로 쓰여졌으며 스페인어로 작성되었고, 번역없이 곧바로 바르셀로나에서 인쇄되었다. 


콜럼버스는 이 편지의 결론에서 군주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금과 원하는 만큼의 향신료와 목화, 그리고 매우 ‘안타깝게도’ 명령에 따라 제공할 수 있는 만큼의 노예를 보낼 수 있다고 기록했다. 이는 서유럽과 아메리카가 처음으로 접촉한 그 순간부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했음을 시사한다. 그는 그 땅과 그곳의 주민들까지도 착취 가능한 자원으로 제시한 것이다. 한편 그의 항해를 계기로 감자, 칠면조, 카카오, 콩, 옥수수, 토마토, 땅콩, 담배, 고추 등의 작물이 유럽과 아시아로 확산되었고, 선원들에 의해 매독이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전파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편지는 신대륙 발견 소식을 담은 최초의 인쇄물 가운데 하나로, 대항해 시대와 유럽 식민지 시대의 서막을 여는 문서로 남아 있다. 


“죽어서도 스페인 땅은 밟지 않겠다” 세비야 대성당에 잠든 콜럼버스


콜럼버스의 삶은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찬란하게 빛났지만, 그의 죽음 이후의 여정은 오히려 그보다 더 파란만장했다. 그는 생전에 “나는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런 말을 남겼을까.


콜럼버스는 1492년부터 150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며 유럽과 신대륙을 연결한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신대륙에서의 통치 방식은 지나치게 엄격했고 때로는 잔혹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로 인해 정착민과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었고, 결국 1500년 스페인 왕실은 그를 총독직에서 해임한 뒤 쇠사슬에 묶어 스페인으로 소환했다.


다행히도 이사벨라 여왕의 보호로 그는 다시 항해에 나설 수 있었으나, 150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입지는 급격히 흔들렸다. 콜럼버스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페르난도 왕 치하의 왕실은 결국 그의 모든 지위와 재산을 박탈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 콜럼버스는 죽음을 앞두고조차 스페인 땅을 밟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말에는 권력을 상실한 데서 비롯된 분노와 정치적 배신에 대한 깊은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신대륙에서의 실패와 불신, 그리고 스스로 이룬 업적이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한 데 대한 좌절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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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 묶인 콜럼버스. Halftone photomechanical prints.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유해는 결국 세비야 대성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관은 땅에 직접 닿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이 인물상은 1891년 아르투로 멜리다(Arturo Mélida)의 작품으로,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을 상징하는 네 명의 조각상이 관을 들어 올린 형태로 안치되어 있다. 특히 무덤 뒤편에 자리한 두 왕국 대표 조각상의 얼굴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  애도를 넘어 그 왕국들이 콜럼버스의 항해를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거나 초기에는 회의적이었음을 반영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는 콜럼버스가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결심과, 그로 인해 왕국들이 감당해야 했던 책임과 아쉬움을 예술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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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대성당의 한 구석에 자리한 콜럼버스의 관. ⓒ유희권


원래 콜럼버스의 유해는 세비야가 아닌 카리브 지역에 있었다. 그가 바야돌리드에서 죽자 유해는 잠깐 세비야에 있다가 1537년에 산토도밍고(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로 이장되었고, 18세기 말에 다시 쿠바로 옮겨졌다가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1898년, 세비야가 그의 유해를 인도받았다. 시 당국은 지금의 장엄한 받침대를 만들어 그의 관을 맞이했다. 수차례의 이장으로 인해 콜럼버스의 시신은 온전한 형태로 이장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만신창이와 같이 분산되었다. 콜럼부스의 무덤을 두고 아직도 이 세 나라가 어느 무덤이 진짜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는 매년 10월 둘째 월요일에 연방 공휴일로 기념되던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를 원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s’ Day)로 바꾸어 기념하고 있다. 이는 콜럼버스를 바라보는 역사적 평가가 분명히 달라졌음을 보여 준다. 뉴욕 센트럴파크가 시작되는 59가 왼쪽에는 콜럼버스 서클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여전히 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재평가의 흐름 속에서 뉴욕시 역시 이 동상의 철거를 검토했으나, 이탈리아계 커뮤니티의 강한 반대로 동상은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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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센트럴파크가 시작되는 59가 왼쪽에는 아메리카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1892년에 세워진 콜럼버스 동상과 콜럼버스 서클이 자리하고 있다. 1933. ⓒThe New York Public Library


나는 도서관 가디스만 전시홀(Gottesman Hall)에 진열된 1493년 콜럼버스의 편지를 마주할 때마다 한 가지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이처럼 작은 종이 한 장이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고, 세계의 지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된 그의 관을 떠올리면, 한 인간의 열망과 야욕이 어떻게 거대한 역사의 서사로 확장되는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콜럼버스의 자필 원본 편지는 사라졌고, 최초로 인쇄된 편지는 뉴욕공립도서관에만 남아 있다. 그렇게 산탕헬 서한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질문과 연구,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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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스만 전시홀. 버몬트산 대리석(Vermont marble)으로 장식된 벽과 기둥, 그리고 조각된 오크 나무 천장, 청동 및 납유리 샹들리에가 특징인
매우 우아하고 고전적인 약 6,400 제곱피트 규모의 공간에 도서관의 보물 (Treasures)들이 상시 전시되어있다. ⓒ유희권




글 | 유희권

5598891e4eade.png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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