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공립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3
발레의 거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2001년 12월, 러시아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며 오래도록 꿈꿔왔던 러시아 땅을 처음 밟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핀란드만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나는 푸시킨의 단편 「눈보라」와 『대위의 딸』 속 폭설 장면을 떠올렸다. 이렇게 혹독한 추위 속에서,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산 두꺼운 밍크 모피 코트를 즐겨 입고, 기름기 많은 돼지고기 수프(솔랸카)와 독한 보드카를 마시는 이유를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서관 관련 일을 하던 어느 날, 마린스키 극장(Mariinsky Theatre,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의 이름에서 유래하며, 한때는 키로프 극장으로 불렸다)에서 나를 초청해 준 러시아인과 함께 ‘러시아 발레’를 관람했다. 그날 공연된 작품은 〈라 바야데르〉(La Bayadère, ‘인도 사원의 무희’)로, 고전 발레의 정수로 꼽히는 명작이다. 이 발레는 1877년,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1818–1910)의 안무로 바로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나는 이 경험을 계기로 발레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황실 마린스키 극장의 외관 전경. 1895. ⓒNew York Public Library

1914년에 제작된 알렉산드르 골로빈(Aleksandr Golovin, 1863-1930)의 화려한 커튼이 걸린 무대.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마린스키 극장.
디아길레프는 이 극장에서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일했다.(Wikipedia Commons)
내가 일하는 도서관에는 발레 관련 자료가 수없이 쌓여 있고, 도시 곳곳의 박물관과 대학에서 끊임없이 발레를 주제로 한 전시와 컨퍼런스가 열리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내가 살고 있는 뉴욕이야말로 발레의 중심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자료를 연구하고 전시회를 찾아다니면서 러시아 예술과 역사의 흐름의 한가운데에 존재했던 한 사람의 삶과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러시아 발레의 거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1929)다. 이제 그의 열정과 그가 창단한 발레 뤼스(Ballets Russes, 1909–1929),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1913. ⓒ New York Public Library.
디아길레프는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진정한 야망은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 음악사에 빼놓을 수 없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했으나, 작곡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큰 좌절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친구의 소개로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예술 잡지 <Mir Iskusstva>(1899–1904)를 창간하고,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와 파리에서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회를 연이어 기획하면서, 그는 단숨에 ‘임프레사리오(impresario)’로서 예술계의 중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19세기 말 러시아에서는 마린스키 극장과 볼쇼이 극장이 발레의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이미 명성을 얻은 작곡가 피오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걸작 발레 음악을 작곡하며 발레 예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발레가 점점 진부해지고 있다고 느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당대의 유명 발레리나들을 이끌고 파리로 건너가 발레 뤼스를 창단한다.
이 무대에는 당대 최고의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89–1950)를 비롯해, 그의 평생 동반자이자 혁신적인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1–1971), 이미 급진적 화가로 명성을 얻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등 음악과 미술 분야의 거장들이 합류했다. 발레 뤼스의 미술 감독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 레온 박스트(Leon Bakst, 1866–1924)였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바슬라프 니진스키. 1913년 원작의 1961년 버전. ⓒNew York Public Library.
이들은 전통과 형식에 얽매인 기존의 발레를 넘어, 귀족 관객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호소하는 혁신적인 대중예술로 발레를 탈바꿈시켰다. 발레 뤼스가 과감히 규칙을 깨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발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디아길레프는 ‘나를 놀라게 하라 (Astonish me)’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발레 뤼스를 위해 선택한 안무가(미셸 포킨, 바슬라프 니진스키, 레오니드 마신, 조지 발란신), 작곡가(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마누엘 데 파야, 모리스 라벨), 미술가(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나탈리아 곤차로바)들이 그 요구에 부응했고, 오늘날까지도 관객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 당시 프랑스 발레의 흐름과는 비교가 되는 발레 뤼스의 이국적이고 독창적인 표현 방식, 강렬한 색채, 원시주의, 커다란 생동감은 이후 야수파 화가들과 아르데코 초기 양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레온 박스트의 셰헤라자데(Schéhérazade)에 등장하는 파란 술타나. 1916. ⓒNew York Public Library.
디아길레프와 피카소의 만남은 발레를 한층 대중 가까이 인도했다. 디아길레프는 1916년 로마에서 피카소를 처음 만났으며, 1917년 파리에서 두 사람의 첫 협업 작품 <Parade>가 초연되었다. 당시 파리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일자리를 찾아 끊임없이 모여 들던 도시였고, 발레 뤼스는 그들에게 창작의 기회와 예술가로서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일종의 낙원이었다.
디아길레프는 늘 자신의 발레 작품을 함께할 혁신적인 예술가를 찾고 있었으며, 피카소는 이미 대담하고 아방가르드한 화가로 주목받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두 거장이 함께 작업한 시기는 대략 5년 정도로, 1921년을 마지막으로 협업은 종료되었다. 이 결별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강한 통제력 아래 장기적인 협업을 선호했던 디아길레프와 달리, 피카소는 자유로운 개인 예술 세계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21년 이후 두 예술가의 방향성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두 거장의 협업과 관련된 작품으로 〈르 트리코른, Le Tricorne〉을 들 수 있다. 피카소는 1919년, 발레 뤼스의 공연을 위해 투우 장면을 묘사한 대형 무대 커튼을 제작하였다. 이후 발레단이 심각한 재정난에 처하자, 1928년 디아길레프는 커튼 중앙에 그려진 주요 부분을 잘라내어 개인 수집가에게 판매했는데, 이는 공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이 작품은 1959년부터 2014년까지 뉴욕 파크 애비뉴에 위치한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 하부,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이 설계한 포시즌스 레스토랑(Four Seasons Restaurant)에 걸려 있었다. 이후 이 작품은 뉴욕시에 기증되었으며, 2015년부터 뉴욕 역사협회(New-York Historical Society)에 설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뉴욕 역사협회 (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 뉴욕의 피카소(New York’s Picasso)”라는 이름으로 2015년 부터 전시되어 있는 〈르 트리코른〉 커튼.
크기는 약 19피트 × 20피트 (5.8m × 6.1m). ⓒ유희권
이 작품이 피카소의 최고 회화 걸작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존하는 피카소의 대형 회화 무대 커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 이 커튼은 2008년 약 160만 달러로 평가되었는데, 이는 2010년 경매에서 1932년작 피카소 회화가 기록한 약 1억 650만 달러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금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의 대표적인 전기 작가인 존 리처드슨 경(Sir John Richardson)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작품은 항상 피카소의 연극 무대 장식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취 중 하나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를 바탕으로 제작된 태피스트리가 뉴욕 유엔 본부에 설치되어 있다. 이 태피스트리는 1955년, 미국의 정치가이자 미술 후원가였던 넬슨 A. 록펠러가 피카소에게 원작 구매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이후, 대신 주문 제작한 직물 작품이다. 원작과 동일한 크기로 제작된 이 태피스트리는 피카소가 미국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 과정에 협력하고 최종적으로 승인한 작품이다. 이후 1985년, 록펠러 가문은 이 태피스트리를 유엔에 장기 대여하였고, 현재까지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 입구에 설치되어 전쟁의 참상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이미지로서 방문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Guernica) 태피스트리, 1955년. 10피트 × 22피트 (약 3 m × 6.7 m). 뉴욕 유엔 본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막대한 영향 아래 발레 뤼스에서 활동했던 무용가와 예술가들은 그의 사후 파리와 몬테카를로, 뉴욕으로 흩어지며 새로운 발레의 세계를 열어 갔다. 세르주 리파르(Serge Lifar, 1905–1986)는 20세기 발레의 핵심 인물로, 파리 오페라 발레의 발레 마스터이자 예술적 지도자로 활동하며 19세기 말 이후 침체되었던 프랑스 발레를 부흥시켰다. 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Ballet Russe de Monte-Carlo)는 르네 블룸(René Blum)과 바실리 드 바질 대령(Colonel Wassily de Basil)에 의해 1930년대에 조직되어, 디아길레프 사후 발레 뤼스의 전통을 계승·변형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1904–1983)은 1933년 링컨 커스틴(Lincoln Kirstein)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발레 학교(School of American Ballet)를 설립했으며, 이후 커스틴과 함께 뉴욕 시티 발레(New York City Ballet, 1948)를 공동 창립함으로써 미국 발레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처럼 디아길레프는 발레라는 장르를 넘어, 20세기 예술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상징적 전설로 남아 있다.
디아길레프가 남긴 유산은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하다. 그와 관련된 주요 원고와 기록 자료(Manuscripts and Archives)는 현재 미국 국회도서관, 하버드 대학교, 뉴욕공립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뉴욕공립도서관 공연예술도서관(The New York Public Library for the Performing Arts) 산하 제롬 로빈스 무용부(Jerome Robbins Dance Division)서에는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에 관한 자료가 압도적인 분량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디아길레프를 조명하는 전시와 연구는 뉴욕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지금도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발레를 둘러싼 또 하나의 중요한 유산이 있다. 영화 〈백야, White Nights, 1985〉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 1948-)는 1974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0년대부터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re, ABT)에서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으로 활약했으며, 2011년 자신의 예술적 기록과 자료 일체를 뉴욕공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기증은 디아길레프로부터 이어진 발레의 역사와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발레 뤼스의 1916–1917년 미국 순회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컬러 브로슈어에 실린
리디아 로포코바(Lydia Lopokova)의 초상. ⓒNew York Public Library
2009년은 발레 뤼스 창단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가 분주했던 해였다. 뉴욕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나도 도서관 무용 부서가 주관한 기념 전시에 참여했다. 〈디아길레프의 경이의 극장: 발레 뤼스와 그 이후 (Diaghilev’s Theater of Marvels: The Ballets Russes and Its Aftermath)〉 전시는 2009년 6월 26일부터 9월 12일까지 열렸으며, 발레 뤼스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국제적 영향력을 조명했다. 러시안 컬렉션 희귀본 담당자였던 나는 당시 바나드 칼리지 교수이자 큐레이터였던 린 가라폴라(Lynn Garafola)와 함께 디아길레프를 후원했던 알렉산더 3세의 동생 블라디미르 대공 (Vladimir Aleksandrovich Romanov, 1847–1909)과 세르게이 대공(Sergei Aleksandrovich Romanov, 1857–1905)에 관한 도서관 소장 자료들을 조사했다. 이 문서와 서적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20세기 초 뉴욕공립도서관이 소련 정부로부터 구입한 것들이다.
디아길레프는 해상 여행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여행은 육로를 이용했는데 딱 두 번 어쩔 수 없이 바다를 이용했다. 첫 번째는 발레 뤼스가 해외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공연을 온 1916년이었는데 비행기가 없었던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은 베니스를 사랑한 그가 생의 마지막 날들을 그곳에서 보내고 곤돌라에 실려 베니스를 이루는 수많은 섬 가운데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는 미카엘 섬(Isola di San Michele)으로 운반되면서이다.

1929년 8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베네치아의 장례 행렬(트라우르니 코르테시, Траурный кортеж) ⓒ유희권
2015년 이탈리아 베니스를 방문했을 때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그가 묻힌 미카엘 섬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목소리와 그 안에 깃든 한탄을 듣고 싶은 마음에 들떠 찾아간 그의 묘소는 막연히 웅장할 것이라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작은 묘비에 아주 소박했다. 발레리나들이 신었던 토슈즈(pointe shoes)가 얹혀 있는 무덤에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의 안타까움이 고요히 스며나오는 듯했다.
그의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석관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스트라빈스키는 누구보다도 디아길레프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무명이었던 그에게 세르게이는 작곡을 의뢰했고, 그 인연 속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발레단의 대표작인 <불새>(The Firebird, 1910), <페트루슈카>(Petrushka, 1911),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 1913)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발레 역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발레 뤼스가 문을 닫은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생을 마칠 때까지 활동했다. 1973년 세상을 떠나며 그는 “예술 인생의 근원 옆에 있고 싶다”는 바람을 남겼고, 영원한 친구였던 세르게이의 무덤 가까이에 잠들게 되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1937. ⓒNew York Public Library.
디아길레프는 평생을 발레에 바쳤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결과 그가 죽은 후 세상에 남긴 것은 빚뿐이었지만,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20세기 예술의 흐름을 바꾼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비록 물질적 유산은 남기지 못했으나, 그의 예술적 유산은 뉴욕을 비롯해 오늘날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의 삶이 충분히 충만하고 행복했으리라 믿고 싶다.

발레리나들이 신었던 토슈즈 (pointe shoes)가 얹혀있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무덤 앞에서.
그의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스트라빈스키의 무덤이 있다. ⓒ유희권
글 | 유희권
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
뉴욕공립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3
발레의 거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2001년 12월, 러시아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며 오래도록 꿈꿔왔던 러시아 땅을 처음 밟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핀란드만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나는 푸시킨의 단편 「눈보라」와 『대위의 딸』 속 폭설 장면을 떠올렸다. 이렇게 혹독한 추위 속에서,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산 두꺼운 밍크 모피 코트를 즐겨 입고, 기름기 많은 돼지고기 수프(솔랸카)와 독한 보드카를 마시는 이유를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서관 관련 일을 하던 어느 날, 마린스키 극장(Mariinsky Theatre,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의 이름에서 유래하며, 한때는 키로프 극장으로 불렸다)에서 나를 초청해 준 러시아인과 함께 ‘러시아 발레’를 관람했다. 그날 공연된 작품은 〈라 바야데르〉(La Bayadère, ‘인도 사원의 무희’)로, 고전 발레의 정수로 꼽히는 명작이다. 이 발레는 1877년,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1818–1910)의 안무로 바로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나는 이 경험을 계기로 발레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황실 마린스키 극장의 외관 전경. 1895. ⓒNew York Public Library
1914년에 제작된 알렉산드르 골로빈(Aleksandr Golovin, 1863-1930)의 화려한 커튼이 걸린 무대.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마린스키 극장.
디아길레프는 이 극장에서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일했다.(Wikipedia Commons)
내가 일하는 도서관에는 발레 관련 자료가 수없이 쌓여 있고, 도시 곳곳의 박물관과 대학에서 끊임없이 발레를 주제로 한 전시와 컨퍼런스가 열리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내가 살고 있는 뉴욕이야말로 발레의 중심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자료를 연구하고 전시회를 찾아다니면서 러시아 예술과 역사의 흐름의 한가운데에 존재했던 한 사람의 삶과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러시아 발레의 거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1929)다. 이제 그의 열정과 그가 창단한 발레 뤼스(Ballets Russes, 1909–1929),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1913. ⓒ New York Public Library.
디아길레프는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진정한 야망은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 음악사에 빼놓을 수 없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했으나, 작곡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큰 좌절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친구의 소개로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예술 잡지 <Mir Iskusstva>(1899–1904)를 창간하고,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와 파리에서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회를 연이어 기획하면서, 그는 단숨에 ‘임프레사리오(impresario)’로서 예술계의 중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19세기 말 러시아에서는 마린스키 극장과 볼쇼이 극장이 발레의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이미 명성을 얻은 작곡가 피오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걸작 발레 음악을 작곡하며 발레 예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발레가 점점 진부해지고 있다고 느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당대의 유명 발레리나들을 이끌고 파리로 건너가 발레 뤼스를 창단한다.
이 무대에는 당대 최고의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89–1950)를 비롯해, 그의 평생 동반자이자 혁신적인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1–1971), 이미 급진적 화가로 명성을 얻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등 음악과 미술 분야의 거장들이 합류했다. 발레 뤼스의 미술 감독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 레온 박스트(Leon Bakst, 1866–1924)였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바슬라프 니진스키. 1913년 원작의 1961년 버전. ⓒNew York Public Library.
이들은 전통과 형식에 얽매인 기존의 발레를 넘어, 귀족 관객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호소하는 혁신적인 대중예술로 발레를 탈바꿈시켰다. 발레 뤼스가 과감히 규칙을 깨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발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디아길레프는 ‘나를 놀라게 하라 (Astonish me)’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발레 뤼스를 위해 선택한 안무가(미셸 포킨, 바슬라프 니진스키, 레오니드 마신, 조지 발란신), 작곡가(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마누엘 데 파야, 모리스 라벨), 미술가(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나탈리아 곤차로바)들이 그 요구에 부응했고, 오늘날까지도 관객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 당시 프랑스 발레의 흐름과는 비교가 되는 발레 뤼스의 이국적이고 독창적인 표현 방식, 강렬한 색채, 원시주의, 커다란 생동감은 이후 야수파 화가들과 아르데코 초기 양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레온 박스트의 셰헤라자데(Schéhérazade)에 등장하는 파란 술타나. 1916. ⓒNew York Public Library.
디아길레프와 피카소의 만남은 발레를 한층 대중 가까이 인도했다. 디아길레프는 1916년 로마에서 피카소를 처음 만났으며, 1917년 파리에서 두 사람의 첫 협업 작품 <Parade>가 초연되었다. 당시 파리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일자리를 찾아 끊임없이 모여 들던 도시였고, 발레 뤼스는 그들에게 창작의 기회와 예술가로서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일종의 낙원이었다.
디아길레프는 늘 자신의 발레 작품을 함께할 혁신적인 예술가를 찾고 있었으며, 피카소는 이미 대담하고 아방가르드한 화가로 주목받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두 거장이 함께 작업한 시기는 대략 5년 정도로, 1921년을 마지막으로 협업은 종료되었다. 이 결별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강한 통제력 아래 장기적인 협업을 선호했던 디아길레프와 달리, 피카소는 자유로운 개인 예술 세계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21년 이후 두 예술가의 방향성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두 거장의 협업과 관련된 작품으로 〈르 트리코른, Le Tricorne〉을 들 수 있다. 피카소는 1919년, 발레 뤼스의 공연을 위해 투우 장면을 묘사한 대형 무대 커튼을 제작하였다. 이후 발레단이 심각한 재정난에 처하자, 1928년 디아길레프는 커튼 중앙에 그려진 주요 부분을 잘라내어 개인 수집가에게 판매했는데, 이는 공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이 작품은 1959년부터 2014년까지 뉴욕 파크 애비뉴에 위치한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 하부,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이 설계한 포시즌스 레스토랑(Four Seasons Restaurant)에 걸려 있었다. 이후 이 작품은 뉴욕시에 기증되었으며, 2015년부터 뉴욕 역사협회(New-York Historical Society)에 설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뉴욕 역사협회 (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 뉴욕의 피카소(New York’s Picasso)”라는 이름으로 2015년 부터 전시되어 있는 〈르 트리코른〉 커튼.
크기는 약 19피트 × 20피트 (5.8m × 6.1m). ⓒ유희권
이 작품이 피카소의 최고 회화 걸작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존하는 피카소의 대형 회화 무대 커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 이 커튼은 2008년 약 160만 달러로 평가되었는데, 이는 2010년 경매에서 1932년작 피카소 회화가 기록한 약 1억 650만 달러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금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의 대표적인 전기 작가인 존 리처드슨 경(Sir John Richardson)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작품은 항상 피카소의 연극 무대 장식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취 중 하나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를 바탕으로 제작된 태피스트리가 뉴욕 유엔 본부에 설치되어 있다. 이 태피스트리는 1955년, 미국의 정치가이자 미술 후원가였던 넬슨 A. 록펠러가 피카소에게 원작 구매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이후, 대신 주문 제작한 직물 작품이다. 원작과 동일한 크기로 제작된 이 태피스트리는 피카소가 미국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 과정에 협력하고 최종적으로 승인한 작품이다. 이후 1985년, 록펠러 가문은 이 태피스트리를 유엔에 장기 대여하였고, 현재까지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 입구에 설치되어 전쟁의 참상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이미지로서 방문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Guernica) 태피스트리, 1955년. 10피트 × 22피트 (약 3 m × 6.7 m). 뉴욕 유엔 본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막대한 영향 아래 발레 뤼스에서 활동했던 무용가와 예술가들은 그의 사후 파리와 몬테카를로, 뉴욕으로 흩어지며 새로운 발레의 세계를 열어 갔다. 세르주 리파르(Serge Lifar, 1905–1986)는 20세기 발레의 핵심 인물로, 파리 오페라 발레의 발레 마스터이자 예술적 지도자로 활동하며 19세기 말 이후 침체되었던 프랑스 발레를 부흥시켰다. 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Ballet Russe de Monte-Carlo)는 르네 블룸(René Blum)과 바실리 드 바질 대령(Colonel Wassily de Basil)에 의해 1930년대에 조직되어, 디아길레프 사후 발레 뤼스의 전통을 계승·변형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1904–1983)은 1933년 링컨 커스틴(Lincoln Kirstein)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발레 학교(School of American Ballet)를 설립했으며, 이후 커스틴과 함께 뉴욕 시티 발레(New York City Ballet, 1948)를 공동 창립함으로써 미국 발레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처럼 디아길레프는 발레라는 장르를 넘어, 20세기 예술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상징적 전설로 남아 있다.
디아길레프가 남긴 유산은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하다. 그와 관련된 주요 원고와 기록 자료(Manuscripts and Archives)는 현재 미국 국회도서관, 하버드 대학교, 뉴욕공립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뉴욕공립도서관 공연예술도서관(The New York Public Library for the Performing Arts) 산하 제롬 로빈스 무용부(Jerome Robbins Dance Division)서에는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에 관한 자료가 압도적인 분량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디아길레프를 조명하는 전시와 연구는 뉴욕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지금도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발레를 둘러싼 또 하나의 중요한 유산이 있다. 영화 〈백야, White Nights, 1985〉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 1948-)는 1974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0년대부터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re, ABT)에서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으로 활약했으며, 2011년 자신의 예술적 기록과 자료 일체를 뉴욕공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기증은 디아길레프로부터 이어진 발레의 역사와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발레 뤼스의 1916–1917년 미국 순회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컬러 브로슈어에 실린
리디아 로포코바(Lydia Lopokova)의 초상. ⓒNew York Public Library
2009년은 발레 뤼스 창단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가 분주했던 해였다. 뉴욕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나도 도서관 무용 부서가 주관한 기념 전시에 참여했다. 〈디아길레프의 경이의 극장: 발레 뤼스와 그 이후 (Diaghilev’s Theater of Marvels: The Ballets Russes and Its Aftermath)〉 전시는 2009년 6월 26일부터 9월 12일까지 열렸으며, 발레 뤼스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국제적 영향력을 조명했다. 러시안 컬렉션 희귀본 담당자였던 나는 당시 바나드 칼리지 교수이자 큐레이터였던 린 가라폴라(Lynn Garafola)와 함께 디아길레프를 후원했던 알렉산더 3세의 동생 블라디미르 대공 (Vladimir Aleksandrovich Romanov, 1847–1909)과 세르게이 대공(Sergei Aleksandrovich Romanov, 1857–1905)에 관한 도서관 소장 자료들을 조사했다. 이 문서와 서적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20세기 초 뉴욕공립도서관이 소련 정부로부터 구입한 것들이다.
디아길레프는 해상 여행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여행은 육로를 이용했는데 딱 두 번 어쩔 수 없이 바다를 이용했다. 첫 번째는 발레 뤼스가 해외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공연을 온 1916년이었는데 비행기가 없었던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은 베니스를 사랑한 그가 생의 마지막 날들을 그곳에서 보내고 곤돌라에 실려 베니스를 이루는 수많은 섬 가운데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는 미카엘 섬(Isola di San Michele)으로 운반되면서이다.
1929년 8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베네치아의 장례 행렬(트라우르니 코르테시, Траурный кортеж) ⓒ유희권
2015년 이탈리아 베니스를 방문했을 때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그가 묻힌 미카엘 섬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목소리와 그 안에 깃든 한탄을 듣고 싶은 마음에 들떠 찾아간 그의 묘소는 막연히 웅장할 것이라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작은 묘비에 아주 소박했다. 발레리나들이 신었던 토슈즈(pointe shoes)가 얹혀 있는 무덤에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의 안타까움이 고요히 스며나오는 듯했다.
그의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석관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스트라빈스키는 누구보다도 디아길레프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무명이었던 그에게 세르게이는 작곡을 의뢰했고, 그 인연 속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발레단의 대표작인 <불새>(The Firebird, 1910), <페트루슈카>(Petrushka, 1911),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 1913)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발레 역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발레 뤼스가 문을 닫은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생을 마칠 때까지 활동했다. 1973년 세상을 떠나며 그는 “예술 인생의 근원 옆에 있고 싶다”는 바람을 남겼고, 영원한 친구였던 세르게이의 무덤 가까이에 잠들게 되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1937. ⓒNew York Public Library.
디아길레프는 평생을 발레에 바쳤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결과 그가 죽은 후 세상에 남긴 것은 빚뿐이었지만,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20세기 예술의 흐름을 바꾼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비록 물질적 유산은 남기지 못했으나, 그의 예술적 유산은 뉴욕을 비롯해 오늘날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의 삶이 충분히 충만하고 행복했으리라 믿고 싶다.
발레리나들이 신었던 토슈즈 (pointe shoes)가 얹혀있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무덤 앞에서.
그의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스트라빈스키의 무덤이 있다. ⓒ유희권
글 | 유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