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공립도서관의 사서][종교사] 뉴욕공립도서관과 천년을 넘어 온 성경의 이야기

2026-03-04


뉴욕공립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4



누군가 당신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상상해 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책은 무엇인가요?”


아마 많은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1611)이요.” 혹은 조금 더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텐베르크 성경(Gutenberg Bible, 1455) 아닐까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 수도 있다. “불가타 성경(Vulgata, 382–406)입니다.” 히브리어와 코이네 그리스어 원문을 바탕으로, 5세기 초 라틴어로 번역된 그 성경일것이라고.


아니다. 정답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오늘 우리가 함께 추적할 바로 이 책이다. 이 사본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어디에서 잠들어 있었는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 밖으로 끌어냈는가, 그리고 지금, 그 조각들은 어디에 흩어져 있을까.. 자, 이제 나와 함께 ‘인디아나 존스’가 되어 보자. 이집트에서 시작해 독일로, 러시아로, 영국을 거쳐, 마침내 미국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긴 여정을 떠나보자.


시내 사본, 로마 제국에서 필사되다


기원후 4세기, 대략 330년에서 360년 사이.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어딘가에 지금은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느 필사실에서 몇몇 필경사들이 양피지(vellum)를 조심스럽게 펼쳐 놓았다. 양피지는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여러 차례 정제해 만든 재료로, 견고하고 값비싼 책의 재료였다. 정성껏 다듬어진 얇고 매끈한 표면 위에, 한 시대의 신앙과 지식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 귀한 사본은, 누구의 의뢰로 제작되었는지는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제작 규모와 재료, 그리고 필사에 들어간 노동을 고려하면, 국가적 혹은 교회적 후원을 받았거나, 혹은 막대한 재력을 가진 신앙인의 후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I, r. 306–337)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신자들은 더 이상 숨어 지낼 필요가 없었다. 신앙은 점차 공적 영역으로 나아갔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자신만의 성경을 갖는 일이 실현가능한 꿈이 되었다.


필경사들은 한 장, 한 장을 정성스럽게 옮겨 적었다. 글씨는 둥글고 단정한 대문자 형태의 운셜체(Uncial script)였고,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이렇게 탄생한 책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시내 사본’, 혹은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라 부르는 기독교 성경 필사본이다. 이 사본은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신약성경 완전본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구약의 칠십인역(Septuagint)—히브리어 성경을 기원전 3–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전통—을 포함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바르나바 서신(Epistle of Barnabas), 헤르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 같은 초기 기독교 문헌까지 함께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본은 단순한 성경책을 넘어 초기 기독교의 신앙과 정경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언이기도 하다.


원래 이 사본은 약 730장의 양피지(총 1,460쪽)로 이루어진 방대한 규모였으며, 한 장의 크기는 약 381 × 345mm에 달했다. 페이지마다 글은 네 단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여러 필경사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는 손실되었고, 곳곳에는 후대의 수정과 보완의 흔적도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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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신약성경 완전본을 담고 있는시내 사본. ©British Library


시나이산 수도원과 오랜 보관의 역사


이 귀중한 사본은 수세기 동안 이집트 시내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Saint Catherine’s Monastery, 6세기 중엽 건립)에 보관되어 왔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수도원 중 하나이다. 전승에 따르면, 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작은 예배당을 세웠고, 이후 6세기 중엽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r. 527–565)가 그 자리에 오늘날의 요새화된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외딴 지리적 위치와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어져 온 공동체 덕분에, 수많은 고대 사본들은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오랜 세월 동안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시내 사본 역시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긴 시간을 견디며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시내 사본에 대한 가장 이른 문헌 기록은 17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방문한 이탈리아 학자 비탈리아노 도나티(Vitaliano Donati)는 여행 일기에서, 수도원에서 “아름답고 크며, 섬세하고 정사각형에 가까운 양피지 장들로 이루어진 성서”를 보았다고 적었다. 그는 그 책이 “둥글고 단정한 문자로 쓰여 있었다”고도 기록했는데, 이 묘사는 훗날 우리가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로 확인하게 되는 사본의 특징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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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가타리나 수도원 전경. 왼쪽 화살표가 가리키는 모퉁이는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소이고
오른쪽 화살표가 가리키는 중앙 지붕이 덮인 작은 문은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사용된 입구이다. | 출처: Wikipedia Commons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고요한 장소의 역사는 뜻밖의 전환점을 맞는다. 시내 사본의 발견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된 것은, 독일의 성서학자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 1815–1874)가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찾으면서부터였다.


1844년, 그는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북동쪽 벽에 있는 작은 출입구—지면에서 약 30피트(약 9미터) 높이에 달린 지붕이 덮인 문(wicket gate)—를 통해 끌어올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수도원의 한쪽 구석에서 마치 버려진 것처럼 바구니에 모아두었던 오래된 양피지 조각 더미를 보게 된다. 티셴도르프는에 따르면, 당시 일부 승려들은 그것을 더 이상 쓸모없는 낡은 문서로 여기고 폐기하거나, 심지어 난로에 넣을 연료로 사용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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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타리나 수도원 – 고대의 출입 방식(입장 방법). 앞 쪽에 있는 지붕이 덮인 작은 문(wicket gate)을 통해
콘스탄틴 티셴도르프도 수도원 안으로 들어 갔다. ©아메리칸 콜로니(American Colony): 이집트와 시나이


그 양피지 더미 속에서, 티셴도르프는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그리스어 성서 필사본의 일부를 발견했다. 그가 손에 든 조각들에는 둥글고 단정한 운셜체(Uncial) 대문자 그리스어가 네 단으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순간 그는 직감했다. 이것은 단순한 오래된 문서가 아니라, 이른 시기의 성경 전통을 담은 사본 어쩌면 그가 평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성서 필사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이 양피지 조각들은, 그렇게 한 학자의 눈앞에서 갑자기 ‘역사’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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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 © Leipzig University


라이프치히 대학의 신학자였던 티셴도르프는 그때 발견한 양피지 가운데 43장을 확보했고, 이후 그것을 독일로 가져가 라이프치히 대학교 도서관(Leipzig University Library)에 기증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라이프치히 단편(Leipzig fragments)’으로 불리는 시내 사본의 첫 공개 분량이었다. 이 페이지들은 단지 오래된 양피지 몇 장이 아니라,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4세기 그리스어 성경 사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한 결정적인 증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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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예레미야서」. © Leipzig University

 

그 후 1859년 2월, 티셴도르프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 r. 1855–1881)의 후원을 받아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다시 찾았다. 마침내 그는 사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347장을 발견하고, 면밀히 조사한 끝에 이 사본이야말로 현존하는 가장 귀중한 성서 보물이라는 확신을 굳혔다.


그는 이후 중동 지역을 더 여행한 뒤, 카이로로 돌아왔고, 사본을 ‘대여’ 형식으로 옮기는 데 관한 영수증(확인서)에 서명했다. 그렇게 티셴도르프는 이 귀중한 사본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훗날 이 ‘대여’는 사실상 ‘기증’으로 전환되었는데 (1869년 이체 과정의 일환으로 수도원에 9,000루블이 지급되었다), 그 과정에는 단순한 학술 교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정치적 맥락이 얽혀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겠다.


티셴도르프는 1862년에 출판한 『시나이 성서 사본 서문(Vorworte zur Sinaitischen Bibelhandschrift)』에서, 그날의 충격과 기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59년 2월 4일 오후, 나는 수도원의 만치플(manciple, 관리자)과 함께 산으로 산책을 나갔고, 그 길에서 칠십인역 번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도원으로 돌아온 뒤, 그는 자신도 칠십인역 사본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구석에 붉은 천으로 싸여 있던 것을 꺼내어 내 앞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천을 펼쳤고, 그 순간 내 모든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을 보게 되었다. …

그리고 나는 즉시 알아차렸다. 그것은 신약성서 전체였다. 조금의 훼손도 없이 보존되어 있었고… 이 발견이 내게 준 강렬한 충격을 나는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그날 밤 즉시 바르나바 서신을 필사했다. 이렇게 아직 아무도 탐구하지 않은 기독교의 보물 곁에서 잠을 자는 것은, 나에게는 하나의 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1862년, 러시아 황제에게 바쳐진 ‘선물’


러시아로 옮겨진 뒤, 티셴도르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내 사본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1862년, 그는 사본을 정교하게 재현한 화려한 인쇄 판본의 영인본(facsimile)을 출판한다. 이 판본은 같은 해 11월,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e Selo)에서 열린 공식 알현 자리에서, 후원자이자 헌정 대상이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에게 바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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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승천대성당(Uspenskii Sobor)에서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장면.
미하이 지치(Mihály Zichy)의 그림으로 황제가 황후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에게 Kissing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 New York Public Library


티셴도르프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학문적 작업이 완료되었음을 알렸고, 시내 사본의 주요 분량인 347장이 황제 측에 정식으로 넘겨졌다. 이후 이 사본은 약 7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가 기관에 보관되었으며, 1869년에 이르러서야 제정 도서관(당시 황실 공공도서관)으로 옮겨져 공식 소장품이 되었다.


티셴도르프가 출판한 이 영인본은 『Bibliorum Codex Sinaiticus Petropolitanus』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총 4권으로 구성된 인쇄 본(facsimile)이며, 약 300부만 제작된 한정판이었다. 제작 비용은 전액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부담했는데, 이 출판은 러시아 건국(862년) 100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적 프로젝트로도 여겨졌다.


황제는 이 책을 단순한 학술 출판물이 아니라, 제국의 권위와 문화적 위신을 상징하는 ‘기념 선물’로 간주했다. 그래서 일부는 외국 군주, 총대주교청, 주요 대학 등에 증정되었다. 특히 몇몇 판본에는 황제의 양각 문장과 헌정 문구가 새겨져 있어, 책은 더 이상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라 진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보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권이 오늘날 뉴욕공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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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셴도르프가 1862년에 출판한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 영인 판의 표지 페이지. © New York Public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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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황제의 명령으로 Codex Sinaiticus 판본을 유일한 개인 도서관인 뉴욕의 James Lenox에게 전달했다는 공식 서한.
봉투 입구 부분에 붉은색 인장이 찍혀 있다. 중앙에는 쌍두독수리 문양이 있으며, 테두리를 따라 문구가 적혀 있다. © New York Public Library


현대의 여정


시내 사본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세상은 급격히 변했고, 새로 들어선 레닌과 요제프 스탈린의 소련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1933년, 소련 정부는 귀중한 문화재 중 하나였던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를 영국 박물관(현 대영도서관)에 £100,000에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4세기에 만들어진 이 사본은 러시아를 떠나, 영국에서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2006년, 내가 런던 대영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시내 사본을 처음 마주한 순간의 기쁨은 아직도 생생하다. 기독교 문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티셴도르프가 처음 사본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환희와 비슷한 경이로움에 공감했다.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던, 오늘날 법치주의와 기본권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는 대헌장(Magna Carta, 1215)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도 대영도서관에서는 특별 전시회를 통해 시내 사본을 부분적으로 공개하고 있다고 하니,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런던을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이 도서관을 찾아, 그 영적이고 특별한 환희를 직접 느껴보기를 권한다.


하지만, 시내 사본 전체가 영국으로 간 것은 아니다. 현재 러시아 국립도서관(National Library of Russia)에는 여전히 사본 6장과 일부 단편이 남아 있다. 티셴도르프가 1859년 시내 사본의 본체(347장)를 러시아로 가져온 주역이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은 소량의 단편들은 대부분 이미 별도의 러시아 컬렉션에 속해 있던 것들로, 1933년 영국으로 매각될 때 포함되지 않았다. 이 컬렉션은 포르피리 우스펜스키(Porfirij Uspenskij)를 비롯한 여러 학자와 수집가들의 노력을 거쳐 형성된 것이었다. 


몇 년 전, 내가 러시아 국립도서관을 방문했을 때는 아쉽게도 시내 사본을 직접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교회 슬라브어로 된 최초의 완전 인쇄 성경인 1581년 오스트로그 성경(Ostrog Bible)을 만날 수 있었다. 오스트로그(현 우크라이나)에서 출판된 이 성경은, 그 자체로도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첫번째 러시아 제국에서 인쇄된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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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사본(Codex Sinaiticus). 구약 성서 단편, 창세기.
러시아 국립도서관(Российская национальная библиотека, National Library of Russia); 오스트로그 성경. 1581.
교회 슬라브어로 된 최초의 완전 인쇄 성경이며, 키릴 문자를 사용한 최초의 전권 성경이기도 하다. © 유희권


시내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 (St. Catherine’s Monastery)


소련 정부가 시내 사본을 영국에 매각한 지 40여 년이 지난 1975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추가 분량의 단편들이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새롭게 발견되었다. 수도원 북벽에 있는 성 게오르기오스 예배당 아래 공간을 정리하던 중 대량의 필사본 단편들이 확인되었고, 그 가운데 여러 장과 조각이 시내 사본의 일부임이 곧 밝혀졌다. 그 결과 오늘날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최소 18장(완전한 형태 또는 단편 형태)의 시내 사본이 보존되어 있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재도 사람이 거주하는’ 기독교 수도 공동체인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텍사스 출신의 한 그리스 정교회 수도사가 있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해상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수도원이 소장한 약 3,300점(약 180만 페이지)에 달하는 귀중한 고대 필사본들을 보존하고 전산화하는 작업을 맡고 있다. 그 수도사는 저스틴 시나이테스(Rev. Justin Sinaites, 1949– ) 신부로, 수도원의 사서이기도 하다.


저스틴 신부는 텍사스 포트워스(Fort Worth)에서 태어나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평소 사진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 시절에는 비잔틴 역사와 문화에 깊이 매료되었다. 졸업 후,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사가 되었으며, 1996년부터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본격적으로 필사본 전산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수도원에서 가장 최신의 장비로 일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그는 서로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2004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저스틴 신부를 만났다. 그가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디지털화(digitization) 작업에 대해 강연했을 때였다. 강연 후 신부님과의 짧은 대화에서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은, 마침 뉴욕공립도서관의 전산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던 내게도 심오한 영감과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경건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다만 저스틴 신부가 사실상 홀로 이 방대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가 생전에 이 일을 모두 마무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다 보니 시내 사본이 태어나고 잠들어 있으며, 지금도 저스틴 신부가 그 사본 곁에서 일하고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아직 방문하지 못했다는 것이 내게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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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전산화 작업을 하고 있는 저스틴 신부. © Father Justin, St. Catherine’s Monastery

 

천년을 넘어 이어진 가치


자, 이제 우리의 여정을 정리할 시간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시내 사본은 오늘날 여러 곳에 나뉘어 보존되어 있다. 가장 많은 분량인 347장은 영국 대영도서관에, 43장은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 도서관에 있다.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도서관과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일부 단편들이 남아 있다. 2005년, 이 네 기관은 시내 사본의 현존하는 모든 페이지와 단편을 보존하고, 출판하며, 전산화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그 협력의 결과, 우리는 이제 도서관의 열람실에 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이 보물같은 사본을 직접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는 단순한 성경 필사본이 아니다. 그것은 초대 기독교 시대 사람들이 문헌을 어떻게 만들고 보존했는지, 필경사들이 어떤 세심함으로 글자를 새겨 넣었는지, 그리고 초기 신학적 해석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시간을 초월한 역사서이자 성서학의 보고다. 4세기에 제작된 이 사본이 19세기에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20세기에는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지정학적 이동을 거쳐, 21세기에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다시 한 번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가히 믿기 어려울 정도다. 수세기를 건너 이어져 온 이 위대한 여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고대 성경의 숨결과 학문적 깊은 영감을 선사한다.




글 | 유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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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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