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공립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6 #2
아관파천 (1896–1897)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 세력에 의해 시해되면서 궁궐 내 권력은 친일 세력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훗날 순종)와 비밀리에 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이후 약 1년 동안 그곳에서 국정을 처리하였다. 이 공사관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높은 지대에 위치한 단지로, 1895년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에(Afanasy Ivanovich Seredin-Sabatin)가 건립하였다.

서울 중심가를 내려다보는 러시아 공사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 건물은 당시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명지대학교 LG연암도서관
이 사건은 이후 대한제국 수립(1897)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역사학자 김문식은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이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이 과정에서도 알렌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조선, 러시아, 미국 사이에서 정보를 교환하며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흐름 속에서, 알렌은 그가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 그의 일기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활동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그는 이 역사적 사건과 세계사의 흐름에 중요한 주변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럽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물은 한국 전쟁 중 대부분이 파괴되어, 현재는 3층 높이의 탑만 남아 있다. © 유희권
같은 해 러시아에서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열렸고, 고종은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우여곡절 끝에 대관식이 열리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대표자였던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은 니콜라스 2세 황제에게 준비해 간 선물과 고종의 특서를 전달했다. 사절단 방문 이후 러시아 황제는 약 10명 내외의 장교 및 군사 교관을 서울에 파견하여 조선 군대의 근대식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비록 사절단 파견에 알렌이 직접 관여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당시 그가 보여준 외교적 성향과 역할을 고려할 때 그의 간접적인 중재와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6년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앨범에 수록된 조선사절단.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영어 통역관 윤치호, 세 번째가 특명전권공사 민영환. ©New York Public Library
알렌의 별장
공무원의 신분으로 살았던 알렌이 제물포에 여름 별장을 짓고 소유한 기록은 다소 흥미롭다. 이를 보아 조선에서의 그의 삶은 상당히 풍요로웠으리라 짐작된다. 1899년에 건립된 이 2층 벽돌 건물은 단순한 개인 주거 공간을 넘어서, 여름철 서울의 더위를 피해 인천에 머물며 외국 외교관들과의 비공식 회담과 교류를 이어가는 장소로 쓰였다. 휴식의 장소인 동시에 외교적 소통의 장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1899년에 제물포 높은 위치에 건립된 2층 벽돌 건물 별장 ©New York Public Library
1905년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이 건물은 여러 차례 소유자가 바뀌었다. 이후 1956년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천부교의 창시자 박태선 장로의 ‘전도관’ 건물이 세워졌다. 결과적으로 알렌이 직접 사용했던 원래의 별장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전도관 건물이 한동안 남아 있었다고 하나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은 채 방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동 가톨릭 성당 서울 헌당식. 1898년 5월 29일. 화살표가 가리키는 사람이 알렌 공사. ©New York Public Library
시베리아 횡단을 통한 세계 여행 (1903)
1903년 6월 1일, 알렌은 두 번째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미 1899년에 한 차례 세계 여행을 했지만, 당시에는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분명했다. 영국에서 유학 중인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직접 만나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특히 일본을 지지하는 노선이 중대한 실수임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여정은 인천에서 시작되었다. 배를 타고 러시아 관할의 여순(뤼순)으로 이동한 뒤, 열차를 타고 대련으로 향했다. 이후 바이칼호를 거쳐 막 개통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 모스크바까지 이동하는 긴 여정이 이어졌다. 알렌은 여행 내내 매우 꼼꼼하게 일기를 남겼는데, 기차 안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예상치 못한 문제들, 음식과 날씨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다. 예를 들어, 기차가 별다른 이유 없이 장시간 지연되자 “만약 미국 정부가 운영했다면 모스크바-여순 구간을 8일 안에 주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러시아의 비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비판하기도 한다. 또 오브강을 지날 때는 증기기관이 아닌 말이 끄는 배를 목격하며 인상 깊은 장면을 기록했다. 그는 약 보름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러시아를 떠난 그는 베를린을 거쳐 런던으로 이동한다. 서유럽의 발전된 도시와 마을을 보며 그는 “러시아는 소수의 관료가 수많은 농민을 지배하는 나라처럼 보인다”고 회고했다. 이어 스위스를 여행한 뒤, 배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고, 이후 뉴욕에 들러 연극과 뮤지컬을 관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맨해튼 42번가와 매디슨 애비뉴에 위치한 호텔 맨해튼(Hotel Manhattan)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뉴욕 공립도서관이 막 건설 중이던 시기였는데, 그는 5번가를 거닐며 훗날 자신의 자료를 이곳에 기증하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워싱턴 D.C.에 도착한 알렌은 극동 문제 전문가인 윌리엄 우드빌 록힐(William Woodville Rockhill)과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외교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그는 미국이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와 협력해야 하며, 그렇게 할 경우 러시아가 만주 지역에서 미국에 더 큰 경제적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러시아가 이미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만주 지역에 철도와 항구, 도로를 건설했기 때문에 쉽게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형성된 거대한 시장이 미국에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외교관의 역할을 넘어선 그의 강한 발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알렌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계속해서 주장하며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예를 들어, 1903년 10월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Colorado Springs Telegraph)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을 비판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워싱턴 정부로부터 ‘침묵하라’는 경고를 받게 되는 등 그의 외교 경력에 중대한 위기로 이어진다.
에밀리 브라운: 대한제국의 ‘미국인 황후’ 소동
1903년 11월, 미국 신문 보스톤 선데이 포스트(The Boston Sunday Post)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다소 자극적인 해외 뉴스를 실었다. 기사 내용은 놀랍게도 “미국 여성 에밀리 브라운이 고종과 결혼했다”는 기사였다. 이보다 앞서 10월에는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역시 “한 미국 여성이 조선의 황후가 된 지 두 달이 지났다”는 식의 보도를 내보낸 바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해외 정보에 대한 검증 시스템이 매우 미흡했고,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도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가십성 기사가 비교적 쉽게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알렌이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방문해 해당 신문과 인터뷰를 한 직후 보도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신문의 편집장이었던 리텐하우스는 알렌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으며, 그의 외교적 입장을 지지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이 보도가 알렌의 친러·반일 성향의 정책을 옹호하는 맥락에서, 미국인인 알렌의 ‘한국에 대한 호의’를 상징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표현하려 한 시도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문제는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닌 명백한 오보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20세기 초 언론 환경에서는 이러한 오류에 대해 공식적인 정정이나 사과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 사건 역시 별다른 정정보도 없이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이후 알렌은 조선으로 돌아와 공식 문서를 통해 “고종 황제가 미국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문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해명했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당시 미국 언론이 비서구 세계를 어떻게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당시의 국제 인식과 미디어 환경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The Boston Sunday Post, November 29, 1903. Wikipedia Commons.
미국으로의 소환 (1905)
알렌은 러일 전쟁(1904-1905)을 둘러싼 미국 정부의 대아시아 정책과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1905년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특히 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같은 친일적 외교 노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러한 공개적인 발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정책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결국 알렌은 외교관으로서의 입장을 넘어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고, 1905년 미국으로 소환되었다.

1905년, 서울에 모인 외국 공사들. 알렌 공사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찍은 사진. ©유희권
알렌 문서
호러스 뉴턴 알렌은 1924년, 한국과 관련하여 자신이 생산하고 수집한 모든 기록을 뉴욕공립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이 자료들은 현재 도서관 기록보관 부서에 “Horace Newton Allen Papers”라는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해당 컬렉션에는 알렌의 일기, 서신, 메모, 원고 등 개인 기록뿐 아니라 주한 미국 공사관 관련 문서, 각종 공식 기록, 지도, 사진, 신문 스크랩 등 다양한 유형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20세기 초 한국의 외교 활동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1차 사료(primary sources)이며, 오랜 기간 여러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활용해 왔다. 이 자료들은 한국의 외교 정책은 물론 선교 활동과 국제 관계의 실제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2016년경부터 건양대학교 김현숙 교수 연구팀이 약 3년에 걸쳐 해당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여, 연구자와 일반 대중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렌 공사의 영어 서신들은 읽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아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향후 학자들의 번역을 기다리고 있다. ©유희권
이 컬렉션이 연구자들에게 사용된 사례
2000년도 초에 한 한국인 연구자가 이완용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뉴욕공립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이완용의 후손으로서 가족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이완용의 재산은 한국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고, 후손들은 이에 대해 재산 반환 소송을 제기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 연구자는 자신의 조부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근거를 찾기 위해 알렌의 문서에 주목하였다. 예를 들어, 알렌은 초기에는 이완용에 대해 “박정양과 함께 지난 20년간 정부가 임명한 외무대신 중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하나이며, 뛰어난 판단력과 용기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그러다 아관파천 시기 이완용이 친러 성향이 강하고 기회주의자라며 ‘가장 나쁜 악인’, 자신이 한국에 있는 한 ‘공직을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 했고, 결국엔 황제의 뜻을 따르지 않아 신임을 잃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연구자는 알렌의 문서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의 조부가 조선의 주권을 지지하고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렌이 의사이자 외교관으로서 조선의 고위 인사들과 직접 접촉했던 만큼, 그의 일기와 서신에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을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보도에 따르면, 2011년 ‘친일재산환수법’이 합헌으로 결정되면서 친일파 후손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알렌의 유산
오랫동안 알렌은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자,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 설립에 기여한 미국인 의사, 그리고 초기에는 조선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변하려 했던 외교관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는 고종에게서 세 차례 훈장을 받았으며, 그중 최고 등급인 태극장은 그가 한국과 맺은 깊은 인연을 상징한다. 이 훈장은 2015년 그의 증손녀 리디아 알렌(Lydia Allen)에 의해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그의 활동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알렌의 조선에서의 행보는 선교적 사명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외교적, 경제적 이해관계와도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제국주의적 국제 질서 속에서 활동한 인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기록에서는 한국인을 다른 민족과 비교하며 위계적인 시각을 드러낸 흔적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하와이 이민자 모집과 관련한 서신에서 그는 한국인을 “근면하고 순종적이며 다루기 쉽다”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렌이 한국 근대 의료와 외교 형성 과정에 끼친 영향은 분명하다. 그의 삶은 공로와 한계를 동시에 지닌 사례로, 한 인물을 단순한 찬사나 비판만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안련(安連)’이라는 그의 조선식 이름이 시사하듯, 그는 조선과 미국을 오가며 두 세계를 연결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알렌이 자신의 소중한 기록을 연고지가 전혀 없는 뉴욕공립도서관에 기증한 이유가 궁금했다. 1905년 47세의 나이에 조선을 떠난 알렌은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국 정부로부터 공무원 연금 수령도 거부당한 그는, 의사로서의 일상과 더불어 뉴욕 등지에서 선교 단체와 교회의 초청을 받아 여러 차례 강연을 이어갔고, 조선에 관한 집필 활동도 지속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심한 당뇨 합병증으로 두 다리를 절단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1932년 12월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말년을 두고 일부는 불운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알렌은 자신의 문서를 판매할 수도 있었지만, 기부를 선택했다. 다만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밝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924년 당시 뉴욕공립도서관은 일반에 개관한 지 불과 13년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새로운 기관이었다. 여러 도서관과 박물관을 방문하며 전시와 연구를 준비해 온 경험을 떠올려 보면, 알렌은 자신의 기록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연구자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후대에 유산으로 남길 수 있는 공간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뉴욕공립도서관은 그러한 조건을 충분히 갖춘 장소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결정은 자신의 문서를 안전하게 보존함과 동시에 한국과 미국을 잇는 역사적 가치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글 | 유희권

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
뉴욕공립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6 #2
아관파천 (1896–1897)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 세력에 의해 시해되면서 궁궐 내 권력은 친일 세력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훗날 순종)와 비밀리에 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이후 약 1년 동안 그곳에서 국정을 처리하였다. 이 공사관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높은 지대에 위치한 단지로, 1895년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에(Afanasy Ivanovich Seredin-Sabatin)가 건립하였다.
서울 중심가를 내려다보는 러시아 공사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 건물은 당시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명지대학교 LG연암도서관
이 사건은 이후 대한제국 수립(1897)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역사학자 김문식은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이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이 과정에서도 알렌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조선, 러시아, 미국 사이에서 정보를 교환하며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흐름 속에서, 알렌은 그가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 그의 일기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활동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그는 이 역사적 사건과 세계사의 흐름에 중요한 주변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럽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물은 한국 전쟁 중 대부분이 파괴되어, 현재는 3층 높이의 탑만 남아 있다. © 유희권
같은 해 러시아에서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열렸고, 고종은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우여곡절 끝에 대관식이 열리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대표자였던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은 니콜라스 2세 황제에게 준비해 간 선물과 고종의 특서를 전달했다. 사절단 방문 이후 러시아 황제는 약 10명 내외의 장교 및 군사 교관을 서울에 파견하여 조선 군대의 근대식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비록 사절단 파견에 알렌이 직접 관여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당시 그가 보여준 외교적 성향과 역할을 고려할 때 그의 간접적인 중재와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6년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앨범에 수록된 조선사절단.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영어 통역관 윤치호, 세 번째가 특명전권공사 민영환. ©New York Public Library
알렌의 별장
공무원의 신분으로 살았던 알렌이 제물포에 여름 별장을 짓고 소유한 기록은 다소 흥미롭다. 이를 보아 조선에서의 그의 삶은 상당히 풍요로웠으리라 짐작된다. 1899년에 건립된 이 2층 벽돌 건물은 단순한 개인 주거 공간을 넘어서, 여름철 서울의 더위를 피해 인천에 머물며 외국 외교관들과의 비공식 회담과 교류를 이어가는 장소로 쓰였다. 휴식의 장소인 동시에 외교적 소통의 장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1899년에 제물포 높은 위치에 건립된 2층 벽돌 건물 별장 ©New York Public Library
1905년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이 건물은 여러 차례 소유자가 바뀌었다. 이후 1956년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천부교의 창시자 박태선 장로의 ‘전도관’ 건물이 세워졌다. 결과적으로 알렌이 직접 사용했던 원래의 별장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전도관 건물이 한동안 남아 있었다고 하나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은 채 방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동 가톨릭 성당 서울 헌당식. 1898년 5월 29일. 화살표가 가리키는 사람이 알렌 공사. ©New York Public Library
시베리아 횡단을 통한 세계 여행 (1903)
1903년 6월 1일, 알렌은 두 번째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미 1899년에 한 차례 세계 여행을 했지만, 당시에는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분명했다. 영국에서 유학 중인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직접 만나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특히 일본을 지지하는 노선이 중대한 실수임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여정은 인천에서 시작되었다. 배를 타고 러시아 관할의 여순(뤼순)으로 이동한 뒤, 열차를 타고 대련으로 향했다. 이후 바이칼호를 거쳐 막 개통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 모스크바까지 이동하는 긴 여정이 이어졌다. 알렌은 여행 내내 매우 꼼꼼하게 일기를 남겼는데, 기차 안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예상치 못한 문제들, 음식과 날씨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다. 예를 들어, 기차가 별다른 이유 없이 장시간 지연되자 “만약 미국 정부가 운영했다면 모스크바-여순 구간을 8일 안에 주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러시아의 비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비판하기도 한다. 또 오브강을 지날 때는 증기기관이 아닌 말이 끄는 배를 목격하며 인상 깊은 장면을 기록했다. 그는 약 보름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러시아를 떠난 그는 베를린을 거쳐 런던으로 이동한다. 서유럽의 발전된 도시와 마을을 보며 그는 “러시아는 소수의 관료가 수많은 농민을 지배하는 나라처럼 보인다”고 회고했다. 이어 스위스를 여행한 뒤, 배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고, 이후 뉴욕에 들러 연극과 뮤지컬을 관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맨해튼 42번가와 매디슨 애비뉴에 위치한 호텔 맨해튼(Hotel Manhattan)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뉴욕 공립도서관이 막 건설 중이던 시기였는데, 그는 5번가를 거닐며 훗날 자신의 자료를 이곳에 기증하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워싱턴 D.C.에 도착한 알렌은 극동 문제 전문가인 윌리엄 우드빌 록힐(William Woodville Rockhill)과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외교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그는 미국이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와 협력해야 하며, 그렇게 할 경우 러시아가 만주 지역에서 미국에 더 큰 경제적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러시아가 이미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만주 지역에 철도와 항구, 도로를 건설했기 때문에 쉽게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형성된 거대한 시장이 미국에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외교관의 역할을 넘어선 그의 강한 발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알렌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계속해서 주장하며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예를 들어, 1903년 10월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Colorado Springs Telegraph)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을 비판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워싱턴 정부로부터 ‘침묵하라’는 경고를 받게 되는 등 그의 외교 경력에 중대한 위기로 이어진다.
에밀리 브라운: 대한제국의 ‘미국인 황후’ 소동
1903년 11월, 미국 신문 보스톤 선데이 포스트(The Boston Sunday Post)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다소 자극적인 해외 뉴스를 실었다. 기사 내용은 놀랍게도 “미국 여성 에밀리 브라운이 고종과 결혼했다”는 기사였다. 이보다 앞서 10월에는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역시 “한 미국 여성이 조선의 황후가 된 지 두 달이 지났다”는 식의 보도를 내보낸 바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해외 정보에 대한 검증 시스템이 매우 미흡했고,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도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가십성 기사가 비교적 쉽게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알렌이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방문해 해당 신문과 인터뷰를 한 직후 보도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신문의 편집장이었던 리텐하우스는 알렌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으며, 그의 외교적 입장을 지지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이 보도가 알렌의 친러·반일 성향의 정책을 옹호하는 맥락에서, 미국인인 알렌의 ‘한국에 대한 호의’를 상징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표현하려 한 시도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문제는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닌 명백한 오보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20세기 초 언론 환경에서는 이러한 오류에 대해 공식적인 정정이나 사과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 사건 역시 별다른 정정보도 없이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이후 알렌은 조선으로 돌아와 공식 문서를 통해 “고종 황제가 미국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문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해명했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당시 미국 언론이 비서구 세계를 어떻게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당시의 국제 인식과 미디어 환경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The Boston Sunday Post, November 29, 1903. Wikipedia Commons.
미국으로의 소환 (1905)
알렌은 러일 전쟁(1904-1905)을 둘러싼 미국 정부의 대아시아 정책과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1905년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특히 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같은 친일적 외교 노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러한 공개적인 발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정책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결국 알렌은 외교관으로서의 입장을 넘어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고, 1905년 미국으로 소환되었다.
1905년, 서울에 모인 외국 공사들. 알렌 공사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찍은 사진. ©유희권
알렌 문서
호러스 뉴턴 알렌은 1924년, 한국과 관련하여 자신이 생산하고 수집한 모든 기록을 뉴욕공립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이 자료들은 현재 도서관 기록보관 부서에 “Horace Newton Allen Papers”라는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해당 컬렉션에는 알렌의 일기, 서신, 메모, 원고 등 개인 기록뿐 아니라 주한 미국 공사관 관련 문서, 각종 공식 기록, 지도, 사진, 신문 스크랩 등 다양한 유형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20세기 초 한국의 외교 활동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1차 사료(primary sources)이며, 오랜 기간 여러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활용해 왔다. 이 자료들은 한국의 외교 정책은 물론 선교 활동과 국제 관계의 실제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2016년경부터 건양대학교 김현숙 교수 연구팀이 약 3년에 걸쳐 해당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여, 연구자와 일반 대중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렌 공사의 영어 서신들은 읽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아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향후 학자들의 번역을 기다리고 있다. ©유희권
이 컬렉션이 연구자들에게 사용된 사례
2000년도 초에 한 한국인 연구자가 이완용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뉴욕공립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이완용의 후손으로서 가족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이완용의 재산은 한국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고, 후손들은 이에 대해 재산 반환 소송을 제기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 연구자는 자신의 조부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근거를 찾기 위해 알렌의 문서에 주목하였다. 예를 들어, 알렌은 초기에는 이완용에 대해 “박정양과 함께 지난 20년간 정부가 임명한 외무대신 중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하나이며, 뛰어난 판단력과 용기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그러다 아관파천 시기 이완용이 친러 성향이 강하고 기회주의자라며 ‘가장 나쁜 악인’, 자신이 한국에 있는 한 ‘공직을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 했고, 결국엔 황제의 뜻을 따르지 않아 신임을 잃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연구자는 알렌의 문서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의 조부가 조선의 주권을 지지하고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렌이 의사이자 외교관으로서 조선의 고위 인사들과 직접 접촉했던 만큼, 그의 일기와 서신에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을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보도에 따르면, 2011년 ‘친일재산환수법’이 합헌으로 결정되면서 친일파 후손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알렌의 유산
오랫동안 알렌은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자,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 설립에 기여한 미국인 의사, 그리고 초기에는 조선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변하려 했던 외교관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는 고종에게서 세 차례 훈장을 받았으며, 그중 최고 등급인 태극장은 그가 한국과 맺은 깊은 인연을 상징한다. 이 훈장은 2015년 그의 증손녀 리디아 알렌(Lydia Allen)에 의해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그의 활동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알렌의 조선에서의 행보는 선교적 사명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외교적, 경제적 이해관계와도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제국주의적 국제 질서 속에서 활동한 인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기록에서는 한국인을 다른 민족과 비교하며 위계적인 시각을 드러낸 흔적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하와이 이민자 모집과 관련한 서신에서 그는 한국인을 “근면하고 순종적이며 다루기 쉽다”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렌이 한국 근대 의료와 외교 형성 과정에 끼친 영향은 분명하다. 그의 삶은 공로와 한계를 동시에 지닌 사례로, 한 인물을 단순한 찬사나 비판만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안련(安連)’이라는 그의 조선식 이름이 시사하듯, 그는 조선과 미국을 오가며 두 세계를 연결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알렌이 자신의 소중한 기록을 연고지가 전혀 없는 뉴욕공립도서관에 기증한 이유가 궁금했다. 1905년 47세의 나이에 조선을 떠난 알렌은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국 정부로부터 공무원 연금 수령도 거부당한 그는, 의사로서의 일상과 더불어 뉴욕 등지에서 선교 단체와 교회의 초청을 받아 여러 차례 강연을 이어갔고, 조선에 관한 집필 활동도 지속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심한 당뇨 합병증으로 두 다리를 절단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1932년 12월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말년을 두고 일부는 불운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알렌은 자신의 문서를 판매할 수도 있었지만, 기부를 선택했다. 다만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밝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924년 당시 뉴욕공립도서관은 일반에 개관한 지 불과 13년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새로운 기관이었다. 여러 도서관과 박물관을 방문하며 전시와 연구를 준비해 온 경험을 떠올려 보면, 알렌은 자신의 기록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연구자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후대에 유산으로 남길 수 있는 공간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뉴욕공립도서관은 그러한 조건을 충분히 갖춘 장소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결정은 자신의 문서를 안전하게 보존함과 동시에 한국과 미국을 잇는 역사적 가치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글 | 유희권
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