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공립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7 #1
레프 톨스토이(Count Lev Nikolaevich Tolstoy, 1828~1910)는 단 한 번도 뉴욕 땅을 밟은 적이 없다. 그는 유럽의 몇몇 나라를 방문했을 뿐, 대서양 너머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과는 물리적인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오늘날 뉴욕 도처에는 그의 거대한 레거시(Legacy)가 숨 쉬고 있다.
그의 막내딸이자 출판 일을 도맡았던 알렉산드라 톨스타야(Alexandra Tolstaya, 1884~1979)가 세운 '톨스토이 재단'이 이곳에 있고,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한 뉴욕공립도서관은 그의 수많은 작품과 귀중한 기록들을 품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톨스토이의 대작 『부활』에 결정적인 영감을 준 인물 조지 케넌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자,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건너온 수많은 이민자, 그리고 그의 문학을 사랑하는 연구자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톨스토이가 살아 숨 쉬는 도시가 바로 이곳, 뉴욕이다.
톨스토이의 수많은 작품 중 『전쟁과 평화』와 『부활』은 그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축이다. 전자가 간결한 문체와 살아 있는 현장감 속에 인간의 행복과 슬픔, 그리고 폭력의 비애를 웅장하게 서사화했다면, 후자는 시베리아 감옥의 참혹한 현실과 구원의 비전, 그리고 사랑을 통한 용서를 깊이 있게 그려낸다. 10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이 러시아 거장의 숨결은 오늘날 세계 문학의 중심인 뉴욕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거장이 단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대도시와 그의 대작들은 놀랍게도 뉴욕공립도서관이라는 거대한 지성의 아카이브를 통해 필연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 매혹적인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 한다.

1884년 니콜라이 게 (Nikolai Ge, 1831-1894) 가 그린 ‘서재에서 글쓰는 레프 톨스토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박물관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Русский музей) 소장. ©유희권.
『부활』의 예술적, 인도적 성취
사람들이 아무리 한곳에 수십만 명씩 모여 그들이 발 딛고 사는 땅을 망가뜨리려 애써도, 아무리 돌로 땅을 덮어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하고, 돋아나는 풀을 모조리 뽑아내며, 석탄과 석유 냄새로 공기를 더럽히고, 나무를 베어내고 새와 짐승을 몰아내더라도, 봄은 도시에도 여전히 찾아왔다.
이 유명한 ‘부활’의 도입부는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과 인간 문명의 파괴성을 강렬하게 대비시키며 소설의 문을 연다. 필자가 대학 시절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만 해도 이 문장은 단지 제목 그대로의 ‘부활’을 암시하는 아름다운 문장처럼 다가왔고, 지금까지도 내게 가장 뛰어난 소설의 첫 문장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훗날 톨스토이가 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를 알고 난 뒤에는, 이 문장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 예찬이 아니라, 거대한 권력에 맞서며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할 것을 예견한 한 작가의 처절한 절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부활』을 발표한 지 2년 뒤인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공식 파문을 당했다. 그는 교회의 맹목적인 권위와 성직 제도를 부정했고, 기적과 성례전을 믿지 않았다. 대신 예수를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최고의 윤리적 교사로 보았다. 기득권 종교계가 볼 때 그는 위험한 이단아일 뿐이었다.
교회와의 불화를 무릅쓰고 톨스토이가 이 마지막 불꽃 같은 장편소설 『부활』을 집필한 데에는 결정적이고도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다. 바로 자신이 지원하던 종교 공동체인 ‘두호보르파(Dukhobors)’의 캐나다 이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구교도(Старообря́дчество, Old Believers) 계열인 두호보르파는 ‘영혼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닌다. 기독교 평화주의에 따라 살인과 전쟁을 거부했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했던 이들의 신념은 톨스토이의 사상과도 깊이 맞닿아 있었다. 그 결과 두호보르파는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1895년, 카프카스 지방에서 세금과 병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두호보르파 공동체에는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러시아 정부가 고용한 까자크(Cossack) 군대는 천 여 명이 넘는 두호보르파 신도들을 무참히 살육했고, 나아가 정부는 이들을 영토 밖으로 강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두호보르파는 톨스토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고,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부의 학대로부터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 캐나다 이주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부활』의 인세 수익 전액을 그들의 캐나다 망명 비용으로 내놓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극적인 연대에 대해 슬라브학 학자 앤드루 돈스코프(Andrew Donskov)는 《모스크바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 이렇게 적고 있다.
톨스토이와 두호보르파는 일종의 공생 관계에 있었다. 두호보르파는 지옥 같은 러시아를 떠나기 위해 톨스토이라는 거장의 현실적인 도움이 필요했고, 톨스토이는 자신이 평생 정립해 온 기독교적 가르침과 비폭력 사상을 세상에 증명하고 실천할 살아있는 사례로서 두호보르파를 필요로 했다.
계획대로 톨스토이의 장남 세르게이(Sergei L’vovich Tolstoy, 1863–1947)는 1899년 Lake Superior 선편으로 약 2,300명의 두호보르를 이끌고 캐나다 할리팩스에 도착했다. 그 당시 약 7,500명 정도의 두호보르가 1898~1899년에 캐나다로 이주했으며, 톨스토이는 자신의 소설 부활의 저작권료와 기금 약 17,000달러 상당을 이주 지원에 사용했다. 오늘날 두호보르 후손은 주로 캐나다에 30,000~40,000명 정도 살고 있다.

1906년경 위니펙의 두호보르 정착민들을 담은 엽서 | 출처: 롭 맥이니스(Rob McInnes), WP1026
톨스토이의 사상적 상속자,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 소피아 사이에는 13명의 자녀가 있었다. 대문호의 거대한 가문 안에서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아이들이 자라났지만, 그중에서도 막내딸 알렉산드라 (Alexandra Tolstaya)는 단연 특별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결단력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기독교적 평화주의와 인간애를 가장 깊이 물려받은 ‘사상적 상속자’였다.

1909년. 러시아 제국 툴라 주(Tula Gubernia). 러시아의 작가 레프 톨스토이가 딸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와 함께
야스나야 폴랴나 저택의 서재에서 작업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알렉산드라가 타이핑할 글을 구술하고 있다. © TASS
거장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은 막내딸 알렉산드라는 소련 체제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후, 1939년 뉴욕에 '톨스토이 재단'을 설립했다. 톨스토이 재단은 필자가 살고 있는 뉴저지 북부의 올드타판 이라는 작은 타운에서 차로 10여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뉴욕주 허드슨 강 인근 벨리 코티지(Valley Cottage, NY)라는 마을에 있다.

톨스토이 재단 전경, 1975. 레이크 로드에 위치한 톨스토이 재단 건물의 정면 모습.
이 재단은 1939년 레프 톨스토이의 막내딸인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에 의해 설립되었다. ©Library Association of Rockland County
톨스토이 재단을 세운 알렉산드라의 생애 또한 혁명과 전쟁, 망명과 구호 활동이 교차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간호사로 봉사하며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또한 아버지 톨스토이의 마지막 시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아버지의 원고와 편지, 사상과 기억을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톨스토이 사후에는 그의 영지였던 야스나야 폴랴나의 박물관 관리인이 되어 유산을 지키는 역할까지 맡았다.
그러나 톨스토이주의의 핵심이었던 비폭력 사상과 국가 권력에 대한 회의적 태도는 새롭게 등장한 소비에트 체제와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소련 정부와 어느 정도 협력하며 아버지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려 했지만, 러시아 안팎에서 상징적 권위를 지닌 ‘톨스토이의 딸’이라는 존재 자체가 신생 소련 정권에는 늘 민감한 문제였다. 그녀는 정치적 의심과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고, 한때는 굴락(Gulag, 옛 소련에서 운영되던 강제 노동 수용소 체계를 가리키는 말) 수용소에 수감되는 시련까지 겪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그러한 압박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석방 이후에도 끊임없는 감시와 갈등을 견뎌낸 끝에 결국 소련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후 1929년 그녀는 소련을 떠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며, 일본에서 18개월 동안 머문 뒤 1931년 미국에 정착했다. 그후 강연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양계장을 운영하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이 시기 그녀는 시베리아에서 수년간 수감과 유형 생활을 겪었던 오랜 친구 친구인 따찌야나 샤우푸스와 (Tatiana Schaufuss, 1891-1986) 재회했고, 두 사람은 전쟁과 혁명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러시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모으기로 뜻을 합친다. 그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1939년 뉴욕을 중심으로 탄생한 ‘톨스토이 재단(Tolstoy Foundation)’이었다.

1963년 톨스토이 재단의 도움으로 구교도들이 뉴욕의 JFK 공항에 도착 하고 있다.
© 톨스토이 재단 (Valley Cottage, NY)
알렉산드라에게 삶의 가장 큰 목표는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 신념은 개인적 고난이나 정치적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필요하다면 조지프 스탈린에게조차 직접 도움을 요청할 만큼 현실적인 용기와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1941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는 알렉산드라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톨스토이 백작부인이 뉴욕시의 내 아파트를 방문했다. 그녀는 더 이상 아주 젊지는 않았지만, 우리 대부분보다도 숨을 덜 헐떡이며 3층 계단을 올라왔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도 커서, 그녀는 자신의 수고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톨스토이 백작부인은 그녀의 열정과 헌신만으로도 우리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크게 불러일으킨다.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의 삶은 단순히 ‘톨스토이의 딸’이라는 이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견디며, 아버지가 이름으로만 남긴 평화주의를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가장 아름답고 실천적인 형태로 '부활'시켰다.

톨스토이 재단안에 있는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의 무덤.
그녀는 1979년 95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글 | 유희권

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
뉴욕공립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7 #1
레프 톨스토이(Count Lev Nikolaevich Tolstoy, 1828~1910)는 단 한 번도 뉴욕 땅을 밟은 적이 없다. 그는 유럽의 몇몇 나라를 방문했을 뿐, 대서양 너머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과는 물리적인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오늘날 뉴욕 도처에는 그의 거대한 레거시(Legacy)가 숨 쉬고 있다.
그의 막내딸이자 출판 일을 도맡았던 알렉산드라 톨스타야(Alexandra Tolstaya, 1884~1979)가 세운 '톨스토이 재단'이 이곳에 있고,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한 뉴욕공립도서관은 그의 수많은 작품과 귀중한 기록들을 품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톨스토이의 대작 『부활』에 결정적인 영감을 준 인물 조지 케넌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자,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건너온 수많은 이민자, 그리고 그의 문학을 사랑하는 연구자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톨스토이가 살아 숨 쉬는 도시가 바로 이곳, 뉴욕이다.
톨스토이의 수많은 작품 중 『전쟁과 평화』와 『부활』은 그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축이다. 전자가 간결한 문체와 살아 있는 현장감 속에 인간의 행복과 슬픔, 그리고 폭력의 비애를 웅장하게 서사화했다면, 후자는 시베리아 감옥의 참혹한 현실과 구원의 비전, 그리고 사랑을 통한 용서를 깊이 있게 그려낸다. 10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이 러시아 거장의 숨결은 오늘날 세계 문학의 중심인 뉴욕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거장이 단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대도시와 그의 대작들은 놀랍게도 뉴욕공립도서관이라는 거대한 지성의 아카이브를 통해 필연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 매혹적인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 한다.
1884년 니콜라이 게 (Nikolai Ge, 1831-1894) 가 그린 ‘서재에서 글쓰는 레프 톨스토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박물관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Русский музей) 소장. ©유희권.
『부활』의 예술적, 인도적 성취
이 유명한 ‘부활’의 도입부는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과 인간 문명의 파괴성을 강렬하게 대비시키며 소설의 문을 연다. 필자가 대학 시절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만 해도 이 문장은 단지 제목 그대로의 ‘부활’을 암시하는 아름다운 문장처럼 다가왔고, 지금까지도 내게 가장 뛰어난 소설의 첫 문장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훗날 톨스토이가 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를 알고 난 뒤에는, 이 문장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 예찬이 아니라, 거대한 권력에 맞서며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할 것을 예견한 한 작가의 처절한 절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부활』을 발표한 지 2년 뒤인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공식 파문을 당했다. 그는 교회의 맹목적인 권위와 성직 제도를 부정했고, 기적과 성례전을 믿지 않았다. 대신 예수를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최고의 윤리적 교사로 보았다. 기득권 종교계가 볼 때 그는 위험한 이단아일 뿐이었다.
교회와의 불화를 무릅쓰고 톨스토이가 이 마지막 불꽃 같은 장편소설 『부활』을 집필한 데에는 결정적이고도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다. 바로 자신이 지원하던 종교 공동체인 ‘두호보르파(Dukhobors)’의 캐나다 이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구교도(Старообря́дчество, Old Believers) 계열인 두호보르파는 ‘영혼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닌다. 기독교 평화주의에 따라 살인과 전쟁을 거부했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했던 이들의 신념은 톨스토이의 사상과도 깊이 맞닿아 있었다. 그 결과 두호보르파는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1895년, 카프카스 지방에서 세금과 병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두호보르파 공동체에는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러시아 정부가 고용한 까자크(Cossack) 군대는 천 여 명이 넘는 두호보르파 신도들을 무참히 살육했고, 나아가 정부는 이들을 영토 밖으로 강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두호보르파는 톨스토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고,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부의 학대로부터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 캐나다 이주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부활』의 인세 수익 전액을 그들의 캐나다 망명 비용으로 내놓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극적인 연대에 대해 슬라브학 학자 앤드루 돈스코프(Andrew Donskov)는 《모스크바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 이렇게 적고 있다.
계획대로 톨스토이의 장남 세르게이(Sergei L’vovich Tolstoy, 1863–1947)는 1899년 Lake Superior 선편으로 약 2,300명의 두호보르를 이끌고 캐나다 할리팩스에 도착했다. 그 당시 약 7,500명 정도의 두호보르가 1898~1899년에 캐나다로 이주했으며, 톨스토이는 자신의 소설 부활의 저작권료와 기금 약 17,000달러 상당을 이주 지원에 사용했다. 오늘날 두호보르 후손은 주로 캐나다에 30,000~40,000명 정도 살고 있다.
1906년경 위니펙의 두호보르 정착민들을 담은 엽서 | 출처: 롭 맥이니스(Rob McInnes), WP1026
톨스토이의 사상적 상속자,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 소피아 사이에는 13명의 자녀가 있었다. 대문호의 거대한 가문 안에서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아이들이 자라났지만, 그중에서도 막내딸 알렉산드라 (Alexandra Tolstaya)는 단연 특별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결단력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기독교적 평화주의와 인간애를 가장 깊이 물려받은 ‘사상적 상속자’였다.
1909년. 러시아 제국 툴라 주(Tula Gubernia). 러시아의 작가 레프 톨스토이가 딸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와 함께
야스나야 폴랴나 저택의 서재에서 작업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알렉산드라가 타이핑할 글을 구술하고 있다. © TASS
거장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은 막내딸 알렉산드라는 소련 체제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후, 1939년 뉴욕에 '톨스토이 재단'을 설립했다. 톨스토이 재단은 필자가 살고 있는 뉴저지 북부의 올드타판 이라는 작은 타운에서 차로 10여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뉴욕주 허드슨 강 인근 벨리 코티지(Valley Cottage, NY)라는 마을에 있다.
톨스토이 재단 전경, 1975. 레이크 로드에 위치한 톨스토이 재단 건물의 정면 모습.
이 재단은 1939년 레프 톨스토이의 막내딸인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에 의해 설립되었다. ©Library Association of Rockland County
톨스토이 재단을 세운 알렉산드라의 생애 또한 혁명과 전쟁, 망명과 구호 활동이 교차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간호사로 봉사하며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또한 아버지 톨스토이의 마지막 시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아버지의 원고와 편지, 사상과 기억을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톨스토이 사후에는 그의 영지였던 야스나야 폴랴나의 박물관 관리인이 되어 유산을 지키는 역할까지 맡았다.
그러나 톨스토이주의의 핵심이었던 비폭력 사상과 국가 권력에 대한 회의적 태도는 새롭게 등장한 소비에트 체제와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소련 정부와 어느 정도 협력하며 아버지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려 했지만, 러시아 안팎에서 상징적 권위를 지닌 ‘톨스토이의 딸’이라는 존재 자체가 신생 소련 정권에는 늘 민감한 문제였다. 그녀는 정치적 의심과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고, 한때는 굴락(Gulag, 옛 소련에서 운영되던 강제 노동 수용소 체계를 가리키는 말) 수용소에 수감되는 시련까지 겪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그러한 압박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석방 이후에도 끊임없는 감시와 갈등을 견뎌낸 끝에 결국 소련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후 1929년 그녀는 소련을 떠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며, 일본에서 18개월 동안 머문 뒤 1931년 미국에 정착했다. 그후 강연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양계장을 운영하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이 시기 그녀는 시베리아에서 수년간 수감과 유형 생활을 겪었던 오랜 친구 친구인 따찌야나 샤우푸스와 (Tatiana Schaufuss, 1891-1986) 재회했고, 두 사람은 전쟁과 혁명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러시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모으기로 뜻을 합친다. 그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1939년 뉴욕을 중심으로 탄생한 ‘톨스토이 재단(Tolstoy Foundation)’이었다.
1963년 톨스토이 재단의 도움으로 구교도들이 뉴욕의 JFK 공항에 도착 하고 있다.
© 톨스토이 재단 (Valley Cottage, NY)
알렉산드라에게 삶의 가장 큰 목표는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 신념은 개인적 고난이나 정치적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필요하다면 조지프 스탈린에게조차 직접 도움을 요청할 만큼 현실적인 용기와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1941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는 알렉산드라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의 삶은 단순히 ‘톨스토이의 딸’이라는 이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견디며, 아버지가 이름으로만 남긴 평화주의를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가장 아름답고 실천적인 형태로 '부활'시켰다.
톨스토이 재단안에 있는 알렉산드라 톨스토이의 무덤.
그녀는 1979년 95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글 | 유희권
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