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공립도서관의 사서][문화사] 서양 최초의 금속 활자 인쇄본인 구텐베르크 성경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2

2026-07-02


뉴욕공립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8 #2


:: 구텐베르크 성경과 루터의 종교개혁 1편 먼저 읽기


인쇄술의 요람, 인큐나블 Incunable

15세기 중엽, 독일 마인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가 금속 활자를 이용한 인쇄 기술을 발전시키자 유럽의 지식 세계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책은 수도원이나 필경사가 손으로 베껴 쓰는 필사본의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한 권의 성경을 만드는 데 몇 달, 때로는 몇 년이 걸렸고 가격도 매우 비쌌다. 하지만 인쇄술은 같은 내용을 빠르고 반복적으로 찍어낼 수 있게 만들었다. 인큐나블은 바로 이 거대한 전환기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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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인쇄 발명: 성경의 최초 초안. ©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인큐나블(incunable)이라는 영어 단어는 라틴어 incunabula에서 왔다. 원래는 ‘요람’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후에는 어떤 문명이나 기술의 초기 단계를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그래서 인큐나블은 단순히 오래된 책이 아니라, 인쇄 혁명이 막 태어나던 순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이들을 피프티너(fifteener)라고도 불렀는데, 말 그대로 15세기 판본이라는 뜻이다.


인큐나블은 유럽 인쇄술의 요람기에 제작된 책들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활판 인쇄가 막 퍼져 나가던 시기인 1500년 이전에 인쇄된 책, 소책자, 브로드사이드(한 장짜리 인쇄물)를 뜻한다. 왜 하필 1500년일까? 사실 이 연도 자체는 절대적인 기준이라기보다 후대 학자들이 편의상 정한 경계선에 가깝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인쇄 기술은 폭발적으로 확산되었고, 책의 생산량도 급증했다. 따라서 15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인쇄물은, 인쇄기가 아직 유럽 전역에 퍼지기 전의 초기의 실험과 도전을 보여주는 특별한 유산으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 인쇄본들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책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사실이다. 많은 인큐나블은 여전히 필사본의 전통을 흉내 냈다. 여백에 손으로 장식을 덧그리거나, 붉은 잉크로 제목을 적어 넣었으며, 활자체 또한 중세 수도원의 필체를 본떠 제작되었다. 다시 말해, 인큐나블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라 손으로 쓰던 시대와 기계로 찍어내는 시대가 겹쳐진 과도기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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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olicon》의 첫 페이지.
“[I]ncipit summa que uocat[ur] catholicon, edita a fratro iohanne de ianua, ordinis frat[rum] predicato[rum]”라는 제목으로 시작된다.
이는 “도미니코회의 요한네스 데 야누아 수사가 편찬한 《카톨리콘》이라 불리는 대작이 여기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 존 라이랜즈 도서관 소장


오늘날 알려진 인큐나블 판본은 약 3만 종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로 남아 있는 개별 사본의 수는 훨씬 많다. 독일에만 약 12만 5천 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전 세계적으로는 약 55만 권의 인큐나블이 보존되어 있다. 


뉴욕공립도서관의에는 무려 800점에 가까운 인큐나블이 보존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책 가운데 하나는 1460년에 인쇄된 《Catholicon》이다. 이는 라틴어 문법과 사전을 결합한 중세의 중요한 학습서로, 활판 인쇄술이 막 세상에 등장하던 시기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1482년 인쇄된 《Cosmographia》는 고대 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와 지리에 관한 지식을 담아낸 책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지구와 하늘의 구조를 이해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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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 Cosmographia에 수록된 삽화로, 15세기 지도 제작자 니콜라우스 게르마누스가 제작하였다.
1482년 독일 울름(Ulm)에서 인쇄업자 리엔하르트 홀레에 의해 출판된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인들이 상상하고 이해했던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다. ©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이 컬렉션의 또 다른 매력은 단순히 오래된 책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누가 이 책들을 만들고 퍼뜨렸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초기 인쇄업자들이 만든 인쇄망을 통해 성경과 고전, 신학과 과학 지식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 구텐베르크 이후 발달한 인쇄술은 면죄부와 같은 교회 문서의 대량 생산과 유통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교회의 상업화와 세속화를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결국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부패와 신앙의 본질을 비판하게 되는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구텐베르크 성경이 등장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 종교개혁가 루터는 성경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해 대중에게 보급함으로써 종교개혁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밑바탕에는 구텐베르크가 발전시킨 금속활자 인쇄술이 있었다. 활자로 대량 인쇄된 책은 지식과 신앙을 소수의 특권층에서 일반 대중에게까지 퍼뜨렸고, 이는 유럽 사회와 사상의 흐름을 뒤바꾸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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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1534년 성경책. 루터가 구약과 신약을 모두 포함한 독일어 성경 완전판을 처음으로 출판. © Lutherhaus Wittenberg


1510~1511년 사이, 마르틴 루터는 교회 업무를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당시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교황청을 중심으로 예술과 종교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약 800마일에 이르는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바티칸 시국에 도착했다. 그 시기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1508–1512)를 작업 중이었으며, 이는 훗날 ‘아담의 창조’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루터가 미켈란젤로를 직접 만나거나 해당 작품을 언급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그는 아직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였고,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맡은 최정상의 예술가로 서로의 활동 영역은 거의 교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로마에서 루터가 마주한 화려한 예술 세계와 교회의 현실은 그의 내면에 깊은 충격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는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을 비롯한 거대한 건축과 예술 사업으로 찬란함을 자랑했지만, 그 이면에는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루터는 로마에서 일부 성직자들이 미사를 형식적으로 집전하거나, 신앙보다 권력과 돈을 좇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특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Indulgence)가 대대적으로 판매되는 현실은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당시 교회는 일정한 헌금을 내면 죄의 형벌을 줄일 수 있다고 가르쳤고, 일부 설교자들은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는 식의 과장된 표현까지 사용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루터의 저술 속에 로마 교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성직자의 세속적 행태와 교회의 물질주의가 본래의 기독교 정신에서 멀어졌다고 보았으며, 결국 비텐베르크로 돌아간 뒤 1517년 《95개 조항》을 발표하게 된다. 특히 면죄부 판매를 정면으로 비판한 그의 주장은 단순한 신학 논쟁을 넘어 유럽 사회 전체를 뒤흔든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1521년 보름스(Worms) 회의에서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삶과 종교개혁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1500-1558) 앞에서 자신의 저작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양심에 따라 이를 거부했고, 그 결과 제국의 법적 보호 밖으로 선언되었다. 즉, 누구나 그를 체포하거나 처벌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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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1500-1558)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강변하는 루터. © National Library of Scotland.


귀환 도중 마르틴 루터는 사실상 납치에 가까운 보호 조치를 받으며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현명공)가 마련한 비밀 보호 작전이었고, 루터는 이곳에서 ‘융커 요르크(Junker Jörg)’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숨긴 채 생활했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루터는 신약성경을 그리스어 원본에서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이후 작업이 이어져 1534년에는 구약까지 포함한 독일어 성경이 출판된다. 이 번역은 일반 대중이 직접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독일어를 정리하고 통일하는 작업이었다. 그 결과 현대 표준 독일어 형성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그 영향은 언어와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보름스 이후의 위기는 루터를 침묵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바르트부르크에서의 번역 작업을 통해 종교개혁은 더욱 강력하게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인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성경책을 소유하게 되었을까?

313년 콘스탄틴 대제(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개인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5세기 초 불가타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성경은 여전히 라틴어를 이해하는 성직자와 소수의 귀족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값이 매우 비쌌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일반인은 라틴어 자체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성경 인쇄를 통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더 이상 손으로 베껴 쓰는 희귀한 물건이 아니라 대량으로 복제될 수 있는 책이 되었지만, 여전히 가격은 높아 일반 대중에게 완전히 열려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이었다. 그는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번역해, 독일어를 읽을 수 있는 일반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성경은 급속히 확산되었고, 그동안 교회가 독점해 온 성경 해석과 권위에 대한 문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촉발점이 되었다.


결국 종교개혁은 한 개인의 신학적 외침만으로 성립된 사건이 아니라, 인쇄술의 발전과 성경 번역을 통해 지식이 대중에게 확산되면서 가능해진 거대한 정보 혁명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종교개혁 역시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과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이 맞물려 만들어낸 역사적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구텐베르크 성경이 도서관의 상설 전시 공간에 자리하며 매일 수많은 방문객을 맞이하는 것은, 단순한 전시를 넘어 그 역사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지도 모른다.




글 | 유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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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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