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공립도서관의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10
나보코프
나보코프(1899–1977)는 20세기 세계문학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 『로리타』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문학 세계는 한 편의 문제작으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다층적이다. 러시아어를 비롯해 여러 유럽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창작 활동을 펼쳤으며, 번역가이자 문학 연구자, 나아가 나비 연구에 몰두한 자연학자로서도 독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 문학의 거장 알렉산드르 푸시킨 연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나 역시 대학원 시절, 푸시킨의 대표작 『예브게니 오네긴』 강의를 들으며 나보코프의 방대한 주석과 해설을 참고했던 기억이 있다. 원문의 한 문장, 심지어 한 단어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치밀한 분석은 단순한 비평의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러시아와 유럽, 미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 문학 거장의 주요 유산 상당수는 놀랍게도 뉴욕공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육필 원고와 편지, 사진, 메모, 연구 자료들은 어떤 여정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이곳 뉴욕공립도서관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러시아 제국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혁명 발발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망명 작가 나보코프는 여러 나라, 대륙을 거치며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렸고, 어떻게 세계 문학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는지, 뉴욕공립도서관에 남겨진 자료들을 단서 삼아, 나보코프라는 작가의 삶과 기억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1959. 스위스로 떠나기 2년전의 나보코프. ©The New York Public Library.
러시아어로 소설을 쓰던 시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1899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완벽하고 국제적인(perfect and cosmopolitan)’ 시기라고 회상할 만큼 풍요롭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나보코프의 가정에서는 러시아어와 영어, 프랑스어가 함께 사용되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이 세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3개국어 화자로 자랐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된 삶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함께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2월 혁명과 이어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귀족 계층의 상당수는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일부는 체포되거나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살아남은 많은 귀족들은 러시아를 떠나 파리와 베를린 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 망명길에 올랐다.
나보코프 일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가족은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뒤 크림반도로 피신해 지인의 사유지에서 약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후 1919년, 러시아를 완전히 떠나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인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훗날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세계적 작가 나보코프의 긴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해 슬라브어학을 전공했다. 1922년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뒤 베를린으로 이주한 그는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활동하며 점차 명성을 쌓아갔다. 당시 베를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한 수십만 명의 러시아인이 모여 살던 대표적인 망명 도시였으며, 나보코프는 이곳에서 러시아 망명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 훗날 세계적인 문학적 명성을 확립하게 될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과 문학 세계에 깊은 상처를 남긴 비극적인 사건도 같은 해에 일어났다. 바로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에비치 나보코프의 암살이었다. 1922년 3월 베를린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러시아 망명 정치인들의 집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자유주의 지도자 파벨 밀류코프을 암살하려는 극우 성향의 정치적 극단주의자가 총격을 가했다. 나보코프의 아버지는 밀류코프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져 범인을 제압하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스물두 살로, 막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 사건은 이후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흐르는 상실감과 기억, 죽음의 주제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아버지의 암살은 나보코프가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서기 직전에 일어났다. 이 비극을 겪은 뒤 그는 베를린에 정착하여 ‘시린(Sirin)’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시와 소설을 발표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내면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대표작 『창백한 불』(Pale Fire, 1962)에서 시인 존 셰이드가 암살자의 총에 맞아 죽는 장면 역시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사례로 해석하기도 한다.
베를린 시기는 나보코프가 영어 작가로 전향하기 이전, 러시아어 작가이자 시인으로서 가장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펼친 시기였다. 그는 1926년부터 1938년까지 아홉 편의 장편소설을 러시아어로 집필하며 러시아 망명 문단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따라서 그의 베를린 시기는 단순한 문학적 성장기를 넘어, 개인적 상실과 비극을 예술적 창작으로 승화시킨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보코프. 미국 이민전인 1923년 베를린에서 곧 부인이 될 베라와 함께.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언어의 마술사: 모국어를 버리고 영어로 거장 반열에 오르다
1940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아내 베라와 아들 드미트리를 데리고 전쟁의 위협을 피해 미국 뉴욕에 도착했다. 러시아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이미 유럽에서 작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뉴욕에 도착한 직후 그는 뉴욕공립도서관의 슬라빅 부서에 취업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현재까지 관련 근무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실제 채용 절차나 인터뷰가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신 그는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 나비 연구를 수행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이후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과 하버드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과 유럽 문학을 강의하며 학자로서도 명성을 쌓아갔다.
그러나 미국 시절의 나보코프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망명 생활이 아니었다. 그는 대부분의 작가가 평생 사용하는 모국어를 사실상 버리고, 40대 이후 영어로 새로운 문학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세계 문학사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외국어로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보코프는 영어를 단순한 ‘제2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창작 언어로 완전히 체화했다. 그 결과 『세바스찬 나이트의 진짜 삶』(1941), 『벤드 시니스터』(1947), 『프닌』(1957), 『창백한 불』(1962), 『에이다 또는 열정』(1969)과 같은 걸작들이 탄생했다. 미국 시기는 단순한 망명의 시기가 아니라, 러시아어 작가였던 나보코프가 영어권 문학의 거장으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문학평론가이자 강연자로서의 나보코프 또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훗날 『문학 강의』(Lectures on Literature)로 출간된 그의 강의 원고에는 여러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미확인 필체의 주석과 편집 지시가 남아 있어, 강의가 책으로 출간되는 과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나보코프는 문학을 정치적 이념이나 도덕 교육의 수단으로 여기는 데 반대했다. 그는 “좋은 독자는 상상력과 기억력, 사전, 그리고 예술적 감각을 지닌 독자”라고 말하며, 작품의 교훈이나 메시지보다 문체와 구조, 그리고 세부 묘사의 정교함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강의와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원칙이었다.
망명자, 나비 연구자, 교수, 그리고 소설가. 미국 시절의 나보코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은 역시 ‘언어의 마술사’일 것이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그의 문학은 베를린과 파리를 거쳐 미국에서 새로운 꽃을 피웠고, 그는 모국어의 경계를 넘어 세계문학의 중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자료 일기. 1918–1987. ©The New York Public Library
곤충학자로서의 나보코프: 미국 자연사 박물관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AMNH)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의 시기는 나보코프의 학문적 삶에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1941년부터 그는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에서 연구원이자 나비류 큐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는 정규 급여가 충분히 보장되는 안정된 직책이라기보다는 연구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제한적인 지원 성격이 강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 환경을 통해 학문적 탐구와 창작을 병행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

나보코프에게 특별히 제공된 미국 자연사 박물관 패스. ©The New York Public Library
나보코프에게 나비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평생을 관통한 열정이었다. 그는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에서 “일곱 살 때부터 내 삶은 하나의 열정에 지배되었다”고 회상했는데, 그 열정이 바로 나비였다. 당시 유럽 상류층 사회에서 나비 채집은 비교적 흔한 취미였으며, 그의 부모 역시 어린 나보코프가 관련 서적을 읽고 표본 제작법을 익히도록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단순한 수집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종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는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며 관찰과 분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심은 곧 학문적 탐구로 발전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독일어 사전을 옆에 두고 곤충학 서적을 읽었고, 러시아어와 영어로 된 전문 학술지까지 탐독했다. 스스로 연구 성과를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실제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시절이던 스물한 살 무렵 첫 곤충학 논문을 발표하며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망명 생활 속에서도 나비에 대한 나보코프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1930년대 베를린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동안에도 그는 나비가 많은 지역을 찾아다니며 채집 활동을 이어갔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과 하버드대학교 산하 하버드 비교동물학 박물관에서 연구를 수행하며, 특히 작은푸른부전나비류(Lycaenidae)를 중심으로 한 분류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표본을 정리하고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직접 그린 해부도와 세밀한 관찰 노트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나보코프의 곤충학 연구는 직업적 의무라기보다 순수한 호기심과 미적 즐거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국에서 보낸 20여 년 동안 그는 거의 매년 여름을 나비 채집 여행에 바쳤고, 소설 집필과 강의 활동 사이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나비는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자연 속 아름다움을 응축한 존재였으며, 세상을 가장 정교하게 바라보는 방식을 가르쳐 준 매개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의 결실 가운데 하나로, New York Public Library 컬렉션에 소장된 그의 자료 중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 꼽히는, 나비 관련 논문들을 한데 묶어 아내에게 헌정한 한 권의 책이 있다.

뉴욕공립도서관에 보관된 나보코프의 나비 날개에 관한 자필 메모.
나보코프가 나비 날개 무늬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만든 약어 도식으로, 문학가이면서 나비 분류학 연구자였던 그의 학문적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런 형식의 나비 해부, 날개 패턴 메모는 1940년대 초–중반에 많이 등장한다. ©유희권
1955년 『롤리타』(Lolita, 1955)
이제 드디어 『롤리타』를 이야기할 때가 왔다. 1955년 발표된 『롤리타』(Lolita)는 나보코프의 문학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그 이전인 1948년 그는 미국 자연사박물관과 웰슬리 대학을 떠나 코넬 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며 학문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 시기 그는 강의에서도 뛰어난 명성을 얻었고, 『롤리타』를 출간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도약하게 된다. 작품의 성공은 그에게 경제적 안정까지 가져다주었으며, 결과적으로 학계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롤리타』는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12세 소녀에 대한 집착이라는 문제적 서사는 출간 직후 미국과 유럽 사회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일부 서점에서는 판매가 제한되거나 거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과는 별개로, 정교한 문체, 내적 시점의 치밀한 구성, 언어 실험의 독창성은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확립했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서 있는 사 피트 십 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서술은 그 언어적 밀도와 리듬만으로도 작품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1960년대 이후 영화와 연극으로도 각색되며 『롤리타』의 영향력은 더욱 확장되었다. 다만 이 작품은 단순한 서사나 자극적 전개를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결코 쉽게 다가오는 텍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독자의 인내와 해석을 요구하며 기대를 의도적으로 교란한다. 나보코프가 “독자는 점점 더 음탕해지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낀다”고 말한 대목은, 이러한 독서 경험의 긴장과 역설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낸 언급으로 읽힌다. 『롤리타』는 뉴욕공립도서관 아카이브에 두 가지 형태로 수록되어 있다. 나보코프가 직접 러시아어로 번역한 원고와, 그의 완전한 시나리오 (스탠리 큐브릭이 1962년 영화에 사용하지 않은 버전)가 그것이다.

나보코프의 <롤리타> 각본. 그가 1962년 영화 제작을 위해 스탠리 큐브릭에게 제출했던 텍스트의 일부. © 유희권
나보코프가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지 유명한 소설 한 권을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러시아어와 영어라는 두 개의 언어권에서 모두 최고 수준의 작품을 남긴 거의 유일한 작가이다. 그의 문장은 정교한 시계장치처럼 치밀하면서도 나비의 날갯짓처럼 섬세하다. 미국의 평론가 라이오넬 트릴링은 『롤리타』를 두고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고 평가했으며, 현대 비평가들 역시 나보코프를 조이스, 프루스트, 보르헤스와 나란히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꼽는다.
글 | 유희권

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
뉴욕 공립도서관의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10
나보코프
나보코프(1899–1977)는 20세기 세계문학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 『로리타』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문학 세계는 한 편의 문제작으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다층적이다. 러시아어를 비롯해 여러 유럽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창작 활동을 펼쳤으며, 번역가이자 문학 연구자, 나아가 나비 연구에 몰두한 자연학자로서도 독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 문학의 거장 알렉산드르 푸시킨 연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나 역시 대학원 시절, 푸시킨의 대표작 『예브게니 오네긴』 강의를 들으며 나보코프의 방대한 주석과 해설을 참고했던 기억이 있다. 원문의 한 문장, 심지어 한 단어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치밀한 분석은 단순한 비평의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러시아와 유럽, 미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 문학 거장의 주요 유산 상당수는 놀랍게도 뉴욕공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육필 원고와 편지, 사진, 메모, 연구 자료들은 어떤 여정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이곳 뉴욕공립도서관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러시아 제국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혁명 발발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망명 작가 나보코프는 여러 나라, 대륙을 거치며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렸고, 어떻게 세계 문학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는지, 뉴욕공립도서관에 남겨진 자료들을 단서 삼아, 나보코프라는 작가의 삶과 기억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1959. 스위스로 떠나기 2년전의 나보코프. ©The New York Public Library.
러시아어로 소설을 쓰던 시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1899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완벽하고 국제적인(perfect and cosmopolitan)’ 시기라고 회상할 만큼 풍요롭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나보코프의 가정에서는 러시아어와 영어, 프랑스어가 함께 사용되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이 세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3개국어 화자로 자랐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된 삶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함께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2월 혁명과 이어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귀족 계층의 상당수는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일부는 체포되거나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살아남은 많은 귀족들은 러시아를 떠나 파리와 베를린 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 망명길에 올랐다.
나보코프 일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가족은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뒤 크림반도로 피신해 지인의 사유지에서 약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후 1919년, 러시아를 완전히 떠나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인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훗날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세계적 작가 나보코프의 긴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해 슬라브어학을 전공했다. 1922년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뒤 베를린으로 이주한 그는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활동하며 점차 명성을 쌓아갔다. 당시 베를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한 수십만 명의 러시아인이 모여 살던 대표적인 망명 도시였으며, 나보코프는 이곳에서 러시아 망명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 훗날 세계적인 문학적 명성을 확립하게 될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과 문학 세계에 깊은 상처를 남긴 비극적인 사건도 같은 해에 일어났다. 바로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에비치 나보코프의 암살이었다. 1922년 3월 베를린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러시아 망명 정치인들의 집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자유주의 지도자 파벨 밀류코프을 암살하려는 극우 성향의 정치적 극단주의자가 총격을 가했다. 나보코프의 아버지는 밀류코프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져 범인을 제압하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스물두 살로, 막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 사건은 이후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흐르는 상실감과 기억, 죽음의 주제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아버지의 암살은 나보코프가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서기 직전에 일어났다. 이 비극을 겪은 뒤 그는 베를린에 정착하여 ‘시린(Sirin)’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시와 소설을 발표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내면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대표작 『창백한 불』(Pale Fire, 1962)에서 시인 존 셰이드가 암살자의 총에 맞아 죽는 장면 역시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사례로 해석하기도 한다.
베를린 시기는 나보코프가 영어 작가로 전향하기 이전, 러시아어 작가이자 시인으로서 가장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펼친 시기였다. 그는 1926년부터 1938년까지 아홉 편의 장편소설을 러시아어로 집필하며 러시아 망명 문단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따라서 그의 베를린 시기는 단순한 문학적 성장기를 넘어, 개인적 상실과 비극을 예술적 창작으로 승화시킨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보코프. 미국 이민전인 1923년 베를린에서 곧 부인이 될 베라와 함께.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언어의 마술사: 모국어를 버리고 영어로 거장 반열에 오르다
1940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아내 베라와 아들 드미트리를 데리고 전쟁의 위협을 피해 미국 뉴욕에 도착했다. 러시아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이미 유럽에서 작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뉴욕에 도착한 직후 그는 뉴욕공립도서관의 슬라빅 부서에 취업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현재까지 관련 근무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실제 채용 절차나 인터뷰가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신 그는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 나비 연구를 수행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이후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과 하버드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과 유럽 문학을 강의하며 학자로서도 명성을 쌓아갔다.
그러나 미국 시절의 나보코프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망명 생활이 아니었다. 그는 대부분의 작가가 평생 사용하는 모국어를 사실상 버리고, 40대 이후 영어로 새로운 문학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세계 문학사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외국어로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보코프는 영어를 단순한 ‘제2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창작 언어로 완전히 체화했다. 그 결과 『세바스찬 나이트의 진짜 삶』(1941), 『벤드 시니스터』(1947), 『프닌』(1957), 『창백한 불』(1962), 『에이다 또는 열정』(1969)과 같은 걸작들이 탄생했다. 미국 시기는 단순한 망명의 시기가 아니라, 러시아어 작가였던 나보코프가 영어권 문학의 거장으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문학평론가이자 강연자로서의 나보코프 또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훗날 『문학 강의』(Lectures on Literature)로 출간된 그의 강의 원고에는 여러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미확인 필체의 주석과 편집 지시가 남아 있어, 강의가 책으로 출간되는 과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나보코프는 문학을 정치적 이념이나 도덕 교육의 수단으로 여기는 데 반대했다. 그는 “좋은 독자는 상상력과 기억력, 사전, 그리고 예술적 감각을 지닌 독자”라고 말하며, 작품의 교훈이나 메시지보다 문체와 구조, 그리고 세부 묘사의 정교함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강의와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원칙이었다.
망명자, 나비 연구자, 교수, 그리고 소설가. 미국 시절의 나보코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은 역시 ‘언어의 마술사’일 것이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그의 문학은 베를린과 파리를 거쳐 미국에서 새로운 꽃을 피웠고, 그는 모국어의 경계를 넘어 세계문학의 중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자료 일기. 1918–1987. ©The New York Public Library
곤충학자로서의 나보코프: 미국 자연사 박물관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AMNH)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의 시기는 나보코프의 학문적 삶에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1941년부터 그는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에서 연구원이자 나비류 큐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는 정규 급여가 충분히 보장되는 안정된 직책이라기보다는 연구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제한적인 지원 성격이 강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 환경을 통해 학문적 탐구와 창작을 병행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
나보코프에게 특별히 제공된 미국 자연사 박물관 패스. ©The New York Public Library
나보코프에게 나비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평생을 관통한 열정이었다. 그는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에서 “일곱 살 때부터 내 삶은 하나의 열정에 지배되었다”고 회상했는데, 그 열정이 바로 나비였다. 당시 유럽 상류층 사회에서 나비 채집은 비교적 흔한 취미였으며, 그의 부모 역시 어린 나보코프가 관련 서적을 읽고 표본 제작법을 익히도록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단순한 수집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종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는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며 관찰과 분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심은 곧 학문적 탐구로 발전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독일어 사전을 옆에 두고 곤충학 서적을 읽었고, 러시아어와 영어로 된 전문 학술지까지 탐독했다. 스스로 연구 성과를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실제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시절이던 스물한 살 무렵 첫 곤충학 논문을 발표하며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망명 생활 속에서도 나비에 대한 나보코프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1930년대 베를린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동안에도 그는 나비가 많은 지역을 찾아다니며 채집 활동을 이어갔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과 하버드대학교 산하 하버드 비교동물학 박물관에서 연구를 수행하며, 특히 작은푸른부전나비류(Lycaenidae)를 중심으로 한 분류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표본을 정리하고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직접 그린 해부도와 세밀한 관찰 노트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나보코프의 곤충학 연구는 직업적 의무라기보다 순수한 호기심과 미적 즐거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국에서 보낸 20여 년 동안 그는 거의 매년 여름을 나비 채집 여행에 바쳤고, 소설 집필과 강의 활동 사이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나비는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자연 속 아름다움을 응축한 존재였으며, 세상을 가장 정교하게 바라보는 방식을 가르쳐 준 매개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의 결실 가운데 하나로, New York Public Library 컬렉션에 소장된 그의 자료 중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 꼽히는, 나비 관련 논문들을 한데 묶어 아내에게 헌정한 한 권의 책이 있다.
뉴욕공립도서관에 보관된 나보코프의 나비 날개에 관한 자필 메모.
나보코프가 나비 날개 무늬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만든 약어 도식으로, 문학가이면서 나비 분류학 연구자였던 그의 학문적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런 형식의 나비 해부, 날개 패턴 메모는 1940년대 초–중반에 많이 등장한다. ©유희권
1955년 『롤리타』(Lolita, 1955)
이제 드디어 『롤리타』를 이야기할 때가 왔다. 1955년 발표된 『롤리타』(Lolita)는 나보코프의 문학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그 이전인 1948년 그는 미국 자연사박물관과 웰슬리 대학을 떠나 코넬 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며 학문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 시기 그는 강의에서도 뛰어난 명성을 얻었고, 『롤리타』를 출간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도약하게 된다. 작품의 성공은 그에게 경제적 안정까지 가져다주었으며, 결과적으로 학계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롤리타』는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12세 소녀에 대한 집착이라는 문제적 서사는 출간 직후 미국과 유럽 사회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일부 서점에서는 판매가 제한되거나 거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과는 별개로, 정교한 문체, 내적 시점의 치밀한 구성, 언어 실험의 독창성은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확립했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서 있는 사 피트 십 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서술은 그 언어적 밀도와 리듬만으로도 작품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1960년대 이후 영화와 연극으로도 각색되며 『롤리타』의 영향력은 더욱 확장되었다. 다만 이 작품은 단순한 서사나 자극적 전개를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결코 쉽게 다가오는 텍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독자의 인내와 해석을 요구하며 기대를 의도적으로 교란한다. 나보코프가 “독자는 점점 더 음탕해지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낀다”고 말한 대목은, 이러한 독서 경험의 긴장과 역설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낸 언급으로 읽힌다. 『롤리타』는 뉴욕공립도서관 아카이브에 두 가지 형태로 수록되어 있다. 나보코프가 직접 러시아어로 번역한 원고와, 그의 완전한 시나리오 (스탠리 큐브릭이 1962년 영화에 사용하지 않은 버전)가 그것이다.
나보코프의 <롤리타> 각본. 그가 1962년 영화 제작을 위해 스탠리 큐브릭에게 제출했던 텍스트의 일부. © 유희권
나보코프가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지 유명한 소설 한 권을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러시아어와 영어라는 두 개의 언어권에서 모두 최고 수준의 작품을 남긴 거의 유일한 작가이다. 그의 문장은 정교한 시계장치처럼 치밀하면서도 나비의 날갯짓처럼 섬세하다. 미국의 평론가 라이오넬 트릴링은 『롤리타』를 두고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고 평가했으며, 현대 비평가들 역시 나보코프를 조이스, 프루스트, 보르헤스와 나란히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꼽는다.
글 | 유희권
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