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여행이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녀왔습니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5



오후 다섯 시가 되지 않은 시간인데 자욱하게 낀 안개 덕에 한밤중처럼 어둡다. 이제는 익숙한 거리에 내려 줄이 짧은 게이트를 찾아 걸었다. 그새 요령이 생겨 공연장에 입성하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첫날에 앉았던 좌석의 반대 방향이다. 내일은 본 무대와 가장 가까운 좌석이라 오늘은 촬영 욕심을 내려놓기로 한다. 칵테일을 손에 들고 흥얼거리는 팬과 한국어 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 부르는 팬 사이가 내 자리였다.


“모두가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환호했다.”


이 단순한 문장 말고는 쓸 수 있는 게 없다. 순간순간 훅 들어왔다 휘발되었다 다시 새겨졌다 사라졌다. 무수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던 세트 리스트. 방탄소년단 참 잘하고, 팬들 참 잘 즐긴다.



어느덧 한국으로떠나기 전 날이다. 아침 일찍 디즈니랜드에 갔다가 공연을 보러 가는 일정을 짰는데 LA에 와서 보니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정이었는지. 시내에서 멀지 않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갔다 와도 하루가 다 가는 힘든 일정인데 애너하임에 있는 디즈니랜드를 마치 공원 산책하듯 다녀올 생각을 했다니.


게다가 PCR 검사 결과를 확인한 뒤 종이로 출력을 해야 한다. 공항에는 반드시 종이로 출력된 결과지를 지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동선상, 시간상의 이유로 못했던 것들을 마저 했다. 서부 여행을 할 때 꼭 한 번은 먹어봐야 한다는 인 앤 아웃에서 더블더블 버거 세트를 먹고 그로브몰을 구경을 한 뒤 홀푸드 마켓에서 식료품을 구입했다. PCR 검사 결과가 메일로 발송됐음을 알린 메시지가 도착했고 메일 첨부파일을 열어 음성(Negative) 결과를 확인했다. 기저질환자라 부스터 샷도 일찍 맞았고, 현지에 도착해 개인 방역을 꼼꼼히 챙겼음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 졸였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 공연, 정말 마지막까지 즐겨 보자.



공연장까지 시내버스를 타기로 했다. 호텔에서 공연장까지 가는 주황색 버스 노선은 코로나로 무료 운영 중이었다. 서민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이니 코로나 시대에 가계에 보탬이 되라고 무료로 운영하는 줄 알았더니 대면으로 돈을 받기 거부한 버스 기사들의 시위가 이유였다고 한다. 늦은 시각이 아니고 호텔에서 공연장까지 다섯 정거장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그마저도 대부분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캐나다에서 공연을 보러 왔다는 한국 분들과 공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소파이 스타디움. 우버를 탔다면 10불은 넘었을 텐데 무료로 편하게 왔다. 공연장 입장 역시 요령이 생겨 오늘도 착석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는 것들이 늘어났다는 건 곧 떠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아마 인생 끝 무렵도 그렇겠지? 이제 좀 알 만하니 끝난다고.



내가 LA를 온 모든 이유. 〈Permission to dance on stage〉의 4회 공연 중 4회 차. 마지막 공연 내 좌석은 본 무대 바로 옆 1층 구역이었다. 그것도 5열. 처음 이 자리를 티케팅하고 나서 애매한 그라운드 좌석보다 훨씬 더 좋을 거야 하며 위안했는데 실제로 앉아보니 기대한 것보다도 시야가 훨씬 더 좋았다. 돌출 무대에서 많은 곡을 소화했던 이전 투어에 비해 이번 공연에선 본 무대 활용도가 꽤 많은 편이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내 옆자리 새크라멘토에서 왔다는 아미가 한국에 있으면 멤버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은지 물었다. 내가 여기까지 날아온 걸 보면 모르겠냐고, 여기선 쉬는 날에 멤버들이 자유롭게 외출도 하지만 한국에선 오히려 더 조심하는 것 같다 했더니 맑게 웃었다. 멤버 모두를 다 좋아하지만 특히 석진이를 좀 더 좋아한다며, 그의 형이 하는 잠실 식당에 꼭 가보고 싶단다. 조금 비싼 편이긴 하지만 맛있는 식당이니 한국에 꼭 놀러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워밍업을 위해 틀어 준 뮤직비디오가 끝나고 조명이 꺼졌다. 오늘은 전 세계 팬들을 위해 콘서트 생중계가 이루어지는 날. 추후에 영상을 다시 볼 수 있을 테고 아주 가까운 시야인 만큼 내 눈으로 보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모니터에 멤버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ON〉의 전주가 흘렀다. 이 시야로 〈ON〉을 보다니. 대형 마칭 밴드 뒤에서 동선을 다양하게 움직이며 안무를 추는 멤버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열심히 좇았다. 2년 동안 그렇게 팬들에게 보이고 싶어 했던 무대다. 


그동안 먼발치의 뒷모습만 봤던 〈Blue & Grey〉도, 팬들과 호흡하며 부르는 〈작은 것들을 위한 시〉도, 첫 전주가 흐르는 순간부터 전율이 흐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Airplane pt.2〉도 본 무대 가까운 좌석에 앉아 있어 더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제일 높은 좌석에선 이 공연장 전체를 버드 아이뷰로 조망할 수 있을 테고, 돌출 무대 근처 그라운드에선 다양한 피켓들을 든 관객들 사이에서 가깝게 호흡할 수 있을 테다. 일단 공연을 볼 수 있다면 좌석 위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 마지막 공연 첫 앵콜곡은 무려 〈HOME〉이었다. 그곳이 어디건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집(Home)이라는 가사 그대로, 2년이란 시간을 지나 우리의 홈에서 만났다. 그간 힘은 2배로 들면서 덜 보람찬 무대 영상 녹화를 해오며 그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잊고 있었다던 그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궁극의 인사.


콜드 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이 깜짝 등장해 〈My universe〉를 함께 부르고, 〈Permission to dance〉를 끝으로 공연이 마무리됐다. 옆자리 아미님께 조심히 돌아가라고 인사를 하고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길, 트위터 알람이 떴다. See you in Seoul, MARCH 2022. 내년 3월, 서울에서 콘서트가 열릴 거라는 간략한 공지였다. 어쩐지 오늘 이 끝남이 마냥 아쉽지만은 않더라니. 다음이 기약된 인사는 오늘을 더 잘 살고 싶게 한다. 그러니 3월 서울 콘서트에 꼭 내 자리 하나가 있었으면.



호텔 매점에서 사 온 샹동 하프 보틀에 바게트를 세팅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정을 나름 조심히,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의식. 유리잔에 샴페인을 따르고 차가운 바게트를 한 입 물었다. 돌아가면 일단 집까지 긴 운전을 해야 했고, 자가 격리라 쓰고 재택 근무라 읽는 열흘을 보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치할 수 있는 멋진 일정을 보냈다.


이 사랑의 행렬에 동참한 모든 이들을 위해 치얼스.


*   *   *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마친 뒤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톰 브래들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공항 규모가 작다 보니 사람들이 북적여 마치 코로나 이전 시대의 공항인 것만 같았다. 72시간 내 PCR 음성 확인서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뒤 캐리어를 부치고 출국 수속을 마쳤다. 인천 공항을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방탄소년단의 팬임을 옷이나 소품 등으로 표출하고 있는 여럿 사람들 속에 섞여 탑승을 마쳤다. 


옅은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세상 가장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도착한 인천 공항. 입국 수속 전 방역 심사를 한 번 더 거쳐야 하기에 기다리는 대기줄이 무척 길었다. 차례에 맞춰 줄을 선 뒤 입국에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 들었다. 이 정도면 한 시간은 넘게 기다리려나 했는데 30분도 되지 않아 내 차례가 되었다. LA 공항 호텔에서 체크인하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는데, 이 속도, 한국에 도착한 실감이 났다.



여권에 PCR 제출자와 국내 예방접종 완료자 스티커를 붙이고 자가 격리 통지서를 한 번 더 작성한 뒤 짐을 찾아 공항을 빠져나왔다. 셔틀버스를 타고 장기 주차장에 내려 차에 짐을 실으니 이제 장거리 운전이 남았다. 


PCR 검사지를 비롯한 서류와 마스크 손 소독제, 소독 스프레이가 포함된 방역 물품 준비, 온전히 공연 관람만을 위한 숙소 선택 및 동선, 하루를 마감하는 와인을 대신한 숙면. 이 시기니까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들의 집합. 이것은 여행이 아니었다. 사랑의 행렬이었다.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녀왔습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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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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