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ranger]언제든 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1

the Stranger : 나는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3



언제든 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만 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무모한,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무례할 만큼 당당한 어조로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응, 난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1.

뉴욕, 시카고, 이탈리아, 페테르부르크, 아니면 휴스턴? 지난 여행에 관한 글을 쓰려고 고민하던 도중 삶을 여행처럼 살고 싶다고 누누이 말하던 10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 시절의 나는 삶과 여행을 연결 짓는 막연한 공식을 풀려고 애썼지만, 구체적인 답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여행사 직원이 될까? 스튜어디스는 어떨까? 무조건 유학이나 어학연수일까? 파일럿의 아내라면 여행을 자주 다니려나? 외교관의 아내라면 어떻게든 나가게 되겠지. 아니면 역시, 로또가 답일까?

그러나 나는 무엇을 시작하든 본질을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찾으려 했던 건 낯선, 날 선 나 자신이었다. 나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생각하던 것보다 더 담대하고 ‘겁 대가리’ 없는, 이를테면 무식한 선구자였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까? 이 시대에 태어난 이유와 이 시대에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여행처럼 되고 싶다는 그 ‘삶’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런 것부터 알아야겠다고 믿었다. 다들 무엇이든 시작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시작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않으면 무엇도 시작하지 않았다.



2.

나는 여행에도 삶에도 구체적인 계획보다 구체적인 철학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만나면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잘 생각해 보고 계획해 봐. 그리고 그 첫걸음부터 차근차근 만들어 가면 되는 거야”라고 이야기했고 나보다 나이 많은 -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누가 봐도 완벽해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체 어떻게 하면 내가 당신들처럼 될 수 있는 거냐고 무슨 기회를 잡아야 당신들처럼 살아갈 수 있는 거냐고 묻곤 했다. 어떤 사람은 “기회를 잡는 것보다 중요한 건 기회를 만드는 것”이라 답했고 또 어떤 사람은 “타고 나길 다르게 타고난 사람은 언젠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3.

낯선 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은 어린 시절의 내가 꽤나 동경하던 일이다. 어린 나는 어른의 나를 상상하며 현실의 낯선 삶을 잘근잘근 씹어 삼킬 수 있었다. 때로는 현실의 벽을, 다른 이들이 만들어놓은 삶의 덫 – 그 모든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 치부해 버릴 수도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사춘기 시절이 되자 지금의 나와는 극적으로 다른, 모든 것이 달라 감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아침에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이 저녁이면 할 수 없는 일들로 변해 나를 지배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나약한 존재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항복하고 싶었다. 그저 숨을 쉬고,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하고, 뻔한 대학에 가고 뻔한 남자를 만나 뻔한 아줌마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 시절에는 여행도 꿈도 미래도 불투명하여 그저 그런 봄날에 부는 먼지바람 같은 잿빛 삶을 피할 수 없으리라 여기기도 했다.


4.

한동안 나의 삶은 기대했던 만큼 달라지지 않았다. 딱, 생각한 만큼 살아갈 수 있었고, 그렇게 살고 있었다. 생각한 수준과 노력한 대가에 합당한 대학에 진학했고, 운이 좋게도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던 음악을 나의 전공으로 삼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의 전공을 신기해하며 어떻게 그런 전공을 가질 수 있었는지 묻곤 했었다. (특히나 미팅 장소에서. 유독 공대생들은 음대생들을 신기해했다.) 그런데 솔직히, 모든 건 그냥 관성처럼 이어져 온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라 음악이 익숙했다. 5살 때 피아노를 배우다 합창부에 들어가 노래를 불렀고, 중학교로 진학하자 하필 합창부가 없어 현악부에 들어가 첼로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의 ‘입시용 예술’은 흔히 악기의 가격에 따라 실력이 결정된다고 여겨진다. 비싼 악기를 살 재간이 없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며 펜과 종이만 있으면 족한 작곡으로 전공을 바꿨고, 그렇게 피아노, 화성학, 작곡, 시창, 청음 레슨을 받으며 입시 준비를 했다. 그래서 그걸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나는 나의 이력을 묻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결정된 듯 흘러온 과정을 소상히 밝혀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도도한 시절을 지냈던 나는 “뭐, 음악을 워낙 좋아했는데 작곡가들의 의도와 배경 그리고 음악의 전반적인 부분을 배우고 싶어서 작곡을, 그것도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어요.”라고 말해버리곤 했다. 아마 내가 그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나임을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어리고 지나치게 겁쟁이 같던 시절이었다.



5.

어쨌든 난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 와중에 이사도 자주 했고, 개척자 정신을 지닌 아빠,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엄마와 함께 성장했다. 두 분 밑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아이여야 했다. 그러나 현실의 난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울보였다. 무엇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걸 금방 포기해야 하는 다양한 변명거리를 미리 만들어 놓는 사람이었다.

다행스러운 건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진 않아도 모범적이고 늘 칭찬 받으며 그 칭찬에 안주하지 않고 매 순간 성장하려고 노력하던 나, 가 아니라 나의 친구가 있었기에 나 역시 그 아이를 닮아가며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만약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미흡하고 불투명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여전히 방황하는 사람으로 자랐을 것이다. 몸만 어른이고 영혼과 생각은 어린 아이만도 못한 그런 사람으로 멈춰있었을 것이다.


6.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답습하며 위아래로 고개를 흔들며 살아가는 일과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 오른쪽 왼쪽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나는 후자를 지향하며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해보려 했다.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열정적으로 덤벼들었다. 일도 사랑도 사람도 내가 원하는 만큼 만나고 알아가곤 했다. 상황으로 인해 나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으려 했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내가 싫다는 것에 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 책임 역시 내가 져야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치를 알게 되는 순간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성장통은 길었다.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글 별나

클래식 작곡 전공, 빌보드 코리아 기자, 예술 강사를 거쳐 이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우아한) 몽상가. 수전 손택을 닮고 싶고, 그보단 소박하게 전 세계를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미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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