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에 가면 #3
지금까지 미국을 여행하며 미술관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다. 유럽이라면 미술관을 돌아보며 일주일, 한 달을 보내도 부족하겠지만, 하다못해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예술 유산을 감상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멜팅 팟(Melting Pot)이 빚어내는 예술적인 에스프리에 유난히도 관심이 없었다.
이 게으른 무지와 편견은 L.A라는 도시의 규모와 다양성에 걸맞게 저마다 캐릭터가 분명한 미술관들 앞에서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반성 끝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더 브로드(The Broad) 미술관, 게티 미술관(Getty Museum) 세 곳을 추려 이틀 반을 투자하기로 했다.
1.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은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바로 옆에 있었다. 길 건너는 라 브레아 타르 연못. 오리지널 파머스 마켓과 그로브 몰이 이어지는 미식과 쇼핑 코스도 15분 거리였다.
더 오리지널 파머스 마켓과 근접한 길모어 스테이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은 미서부 최대의 소장품 규모를 자랑한다. 티치아노와 램브란트, 세잔, 피카소 같은 유럽 거장들에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15~16세기 제국주의 스페인 시대 라틴 아메리카 공예품, 이슬람 중동 지역의 현대미술품과 벚꽃을 주제로 한 일본 미술, 조선 시대 양반 사대부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그 혼종의 스펙트럼이 인상적이었다. ‘멜팅 팟’다운 소장품이 미서부 미술관들의 미학일지도 모르겠다.
에드 루샤의 〈Actual size〉
LACMA의 'Jane and Marc Nathanson' 관
바바라 크루거의 〈Untitled (You Substantiate Our Horror)〉
올 가을 특별전으로 한국 근대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 세계 최초 공개’라고 쓰여 있으나 사실 2년 전 덕수궁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이었다. 한 편에는 고종과 최승희의 고화질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그들을 둘러싼 근대사 굴곡이야 어찌 됐든, 멋쟁이들이었다. 극작가 차범석은 열세 살에 최승희의 공연을 관람한 기억을 이렇게 구술했다.

“최승희는 그 눈이 그렇게 아름다워. 일본 사람들의 소설을 보면 여자의 아름다운 눈을 가리켜 ‘흑요석 같은’ 그러거든. 요석이란 게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흑요석. 반짝반짝반짝.”


고종과 최승희의 사진
2. 더 브로드(The Broad)
더 브로드는 다운타운에 있는 신생 현대미술관이다. 자선 사업가이자 예술 컬렉터인 일라이와 에디스 브로드 부부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벌집 모양(Honeycomb)을 형상화했다는데, 바로 옆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못지않게 빼어난 건축물이다.
더 브로드
파리 퐁피두 센터와 런던 테이트 모던처럼 진행형인 컨템포러리 미술관답게 다양한 특별전과 기획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미국 현대미술 거장들을 앞세운 컬렉션이 풍성했다. 장 뒤뷔페건 마크 로스코건 앤디 워홀이건,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나 장 미셸 바스키아건, 내게는 오직 말쑥한 때깔, 노골적인 결백, 제프 쿤스뿐!
카라 워커의 〈The Palmetto Libretto〉

제프 쿤스의 작품들
더 브로드를 나와 중고 서점 더 라스트 북스토어로 갔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 어두운 실내, 어수선한 큐레이션에 다소 실망했다. 후딱 발길을 돌려 수많은 영화의 단골 배경이었던 세상 짧은 케이블카 앤젤스 플라이트를 지나 로스앤젤레스의 캐주얼한 미식 멜팅 팟 그랜드 센트럴 마켓에서 에너지를 채우고 다운타운 거리를 다시 걸었다.

L.A.의 명소 더 라스트 북스토어와 엔젤스 플라이트
보도와 벤치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노숙자, 불특정 다수에게 화를 내며 배회하는 노숙자, 쓰레기통에서 방금 버린 행인의 음료를 꺼내 마시는 노숙자가 노숙자 아닌 사람보다 흔한 거리. 그 흐느적거리는 반대편에선 지정 주차 시간을 넘긴 차들을 가차 없이 견인해 가는 주차 단속원이 빠르고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늦은 오후 시내 풍경은 대체로 그러했다.

3. 게티 센터(Getty Center)
마지막 미술관은 게티 센터였다. 오전 반나절이면 될 듯했고,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점심을 먹고 베니스 해변에서 일몰을 볼 계획이었다. 게티 센터에서 한나절을 다 보내기 전까지는. 게티 드라이브의 초입에서 트램을 타고 몇 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데, 넓은 창문 밖으로 태평양과 맞닿은 도시 외곽의 광활한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땅의 끝(Land's end)'이라는 말이 주는 아스라한 낭만이 여기 게티 센터에 있었다. 계단 한가운데 놓인 찰스 레이의 조각 작품 〈개구리를 든 소년〉을 지나 동서남북으로 뻗은 건축물과 정원으로 접어들었다.

찰스 레이의 〈개구리를 든 소년〉
미국 재벌 가문이 세운 이곳에는 1600년대부터 1800년대에 이르는 유럽 회화와 조각들이 나름의 계통으로 전시되어 있다. 볼수록 어지러운 중세 유럽의 종교화들이 가득 걸려 있는 방들을 지나면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고흐의 〈아이리스〉, 터너와 마네, 제리코, 자코메티가 전시되어 있다. 현대 사진 작품들이 전시된 갤러리도 따로 있는데, J. 폴 게티의 집념 어린 예술 취향에 감탄하게 된다. 컬렉션 뒤에서 컬렉터의 강한 욕망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마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올 더 머니 (2017)〉에서 폴 게티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열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납치당한 손자와도 바꿀 수 없던 예술품. 예술품이란 게 대개 권력자나 자본가의 후원 아래 나왔으니, 그러한 관계 역학과 맥락 없이 아름다움만 볼 수는 없다. 미술품 소장과 공유를 위한 투자로부터 나오는 꾸준한 관람 수익 보장, 박애와 공헌이라는 갈수록 섬세해져 가는 자본 전략적인 문화 취향, 부동산과 주식의 대체재.

그럼에도 로버트 어윈의 작품이자 조경 시설인 센트럴 가든을 산책하는 각별한 즐거움을 누린 다음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마른 패스트리를 뜯었다. 커피는 한국이 더 맛있다. 하지만 쾌적한 ‘땅끝’ 미술관의 낭만을 이곳 아니면 어디서 즐길 수 있을까.

2022년에 25주년을 맞은 게티 센터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나성에 가면 #3
지금까지 미국을 여행하며 미술관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다. 유럽이라면 미술관을 돌아보며 일주일, 한 달을 보내도 부족하겠지만, 하다못해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예술 유산을 감상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멜팅 팟(Melting Pot)이 빚어내는 예술적인 에스프리에 유난히도 관심이 없었다.
이 게으른 무지와 편견은 L.A라는 도시의 규모와 다양성에 걸맞게 저마다 캐릭터가 분명한 미술관들 앞에서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반성 끝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더 브로드(The Broad) 미술관, 게티 미술관(Getty Museum) 세 곳을 추려 이틀 반을 투자하기로 했다.
1.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은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바로 옆에 있었다. 길 건너는 라 브레아 타르 연못. 오리지널 파머스 마켓과 그로브 몰이 이어지는 미식과 쇼핑 코스도 15분 거리였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은 미서부 최대의 소장품 규모를 자랑한다. 티치아노와 램브란트, 세잔, 피카소 같은 유럽 거장들에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15~16세기 제국주의 스페인 시대 라틴 아메리카 공예품, 이슬람 중동 지역의 현대미술품과 벚꽃을 주제로 한 일본 미술, 조선 시대 양반 사대부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그 혼종의 스펙트럼이 인상적이었다. ‘멜팅 팟’다운 소장품이 미서부 미술관들의 미학일지도 모르겠다.
올 가을 특별전으로 한국 근대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 세계 최초 공개’라고 쓰여 있으나 사실 2년 전 덕수궁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이었다. 한 편에는 고종과 최승희의 고화질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그들을 둘러싼 근대사 굴곡이야 어찌 됐든, 멋쟁이들이었다. 극작가 차범석은 열세 살에 최승희의 공연을 관람한 기억을 이렇게 구술했다.
“최승희는 그 눈이 그렇게 아름다워. 일본 사람들의 소설을 보면 여자의 아름다운 눈을 가리켜 ‘흑요석 같은’ 그러거든. 요석이란 게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흑요석. 반짝반짝반짝.”
고종과 최승희의 사진
2. 더 브로드(The Broad)
더 브로드는 다운타운에 있는 신생 현대미술관이다. 자선 사업가이자 예술 컬렉터인 일라이와 에디스 브로드 부부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벌집 모양(Honeycomb)을 형상화했다는데, 바로 옆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못지않게 빼어난 건축물이다.
파리 퐁피두 센터와 런던 테이트 모던처럼 진행형인 컨템포러리 미술관답게 다양한 특별전과 기획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미국 현대미술 거장들을 앞세운 컬렉션이 풍성했다. 장 뒤뷔페건 마크 로스코건 앤디 워홀이건,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나 장 미셸 바스키아건, 내게는 오직 말쑥한 때깔, 노골적인 결백, 제프 쿤스뿐!
더 브로드를 나와 중고 서점 더 라스트 북스토어로 갔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 어두운 실내, 어수선한 큐레이션에 다소 실망했다. 후딱 발길을 돌려 수많은 영화의 단골 배경이었던 세상 짧은 케이블카 앤젤스 플라이트를 지나 로스앤젤레스의 캐주얼한 미식 멜팅 팟 그랜드 센트럴 마켓에서 에너지를 채우고 다운타운 거리를 다시 걸었다.
보도와 벤치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노숙자, 불특정 다수에게 화를 내며 배회하는 노숙자, 쓰레기통에서 방금 버린 행인의 음료를 꺼내 마시는 노숙자가 노숙자 아닌 사람보다 흔한 거리. 그 흐느적거리는 반대편에선 지정 주차 시간을 넘긴 차들을 가차 없이 견인해 가는 주차 단속원이 빠르고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늦은 오후 시내 풍경은 대체로 그러했다.
3. 게티 센터(Getty Center)
마지막 미술관은 게티 센터였다. 오전 반나절이면 될 듯했고,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점심을 먹고 베니스 해변에서 일몰을 볼 계획이었다. 게티 센터에서 한나절을 다 보내기 전까지는. 게티 드라이브의 초입에서 트램을 타고 몇 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데, 넓은 창문 밖으로 태평양과 맞닿은 도시 외곽의 광활한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땅의 끝(Land's end)'이라는 말이 주는 아스라한 낭만이 여기 게티 센터에 있었다. 계단 한가운데 놓인 찰스 레이의 조각 작품 〈개구리를 든 소년〉을 지나 동서남북으로 뻗은 건축물과 정원으로 접어들었다.
미국 재벌 가문이 세운 이곳에는 1600년대부터 1800년대에 이르는 유럽 회화와 조각들이 나름의 계통으로 전시되어 있다. 볼수록 어지러운 중세 유럽의 종교화들이 가득 걸려 있는 방들을 지나면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고흐의 〈아이리스〉, 터너와 마네, 제리코, 자코메티가 전시되어 있다. 현대 사진 작품들이 전시된 갤러리도 따로 있는데, J. 폴 게티의 집념 어린 예술 취향에 감탄하게 된다. 컬렉션 뒤에서 컬렉터의 강한 욕망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마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올 더 머니 (2017)〉에서 폴 게티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열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납치당한 손자와도 바꿀 수 없던 예술품. 예술품이란 게 대개 권력자나 자본가의 후원 아래 나왔으니, 그러한 관계 역학과 맥락 없이 아름다움만 볼 수는 없다. 미술품 소장과 공유를 위한 투자로부터 나오는 꾸준한 관람 수익 보장, 박애와 공헌이라는 갈수록 섬세해져 가는 자본 전략적인 문화 취향, 부동산과 주식의 대체재.
그럼에도 로버트 어윈의 작품이자 조경 시설인 센트럴 가든을 산책하는 각별한 즐거움을 누린 다음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마른 패스트리를 뜯었다. 커피는 한국이 더 맛있다. 하지만 쾌적한 ‘땅끝’ 미술관의 낭만을 이곳 아니면 어디서 즐길 수 있을까.
2022년에 25주년을 맞은 게티 센터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