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에 가면][여행] 도금시대의 뒤안길, 2022년의 나성

나성에 가면 #4



라스베이거스 닷새 출장으로 한식을 먹지 못했다. 얼큰하고 따뜻한 음식이 필요했다. 처방약 복용을 중단한 환자의 금단 증상이 이러했을까? 해외 한인 커뮤니티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코리아타운으로 가서 H마트에 들러 컵라면과 김치, 쌀과자를 샀다. 그리고 푸드코트에서 떡라면과 김밥 반 줄 세트메뉴를 시켰다. 달러로 주문하고 계산기를 잠깐 두드리자 비로소 ‘킹달러’의 현실자각이 금단증상을 비집고 나온다. 3만 3천 원. 이어 순댓국 한 그릇에 2만 3천 원. 코리아타운 식당은 그나마 각박하지 않은 수준이다. 도심 식당에서 사 먹는 한 끼는 대개 2만 원에 육박한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는 뉴잉글랜드 클램차우더와 한치 튀김, 콜라 한 잔을 먹고 7만 원을 계산했다. 서비스에 열과 성을 다하건 말건 15에서 25퍼센트까지 붙는 팁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생수 한 병, 프랜차이즈 버거 세트 메뉴도 마찬가지고, 정신없이 바구니를 가득 채워 담았던 중고 서적과 음반, 티셔츠, 아울렛 매장의 특가 제품들도 이제는 전혀 매력적인 가격이 아니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호텔 조식의 부담을 덜기 위해 한 블록을 걸어 던킨도너츠로 갔다. 국내 매장에서는 없어진 달달한 ‘던킨 오리지널’ 커피와 함께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냅킨을 펼쳐 들자 이런 슬로건이 적혀 있다.

 


“삶은 (어차피) 일어나고, 던킨은 (그런 삶을) 도와줍니다. (Life Happens. Dunkin Helps)”

 

괄호 안은 나의 주석이다. 팬데믹 3년, 자본의 유동성과 그것이 보장해 주던 꿈들이 조금씩 삶을 빗겨가는 시절이다. 1800년대 말 도금시대(Gilded Age)부터 급속하게 부풀었던 자본의 도금이 벗겨지고 있다. 꿈의 거리, 명예의 거리, 할리우드 대로, 모두가 빛바랜 도금의 뒤안길이었다.

 


45년 전에 발표된 〈나성에 가면〉이란 노래가 있다. 나성(羅城)은 로스앤젤레스의 한자 음역, 프랑스가 불란서로, 골든게이트 브릿지를 금문교로 부르던 시대의 유산이다. 나성은 낯선 이역만리의 도시이자 1978년 대한민국과는 전혀 다른 꿈의 세상이었다. 이 히트곡 가사를 전부 기억할 수 없던 사람들은 첫 소절을 부르고는 마지막 가사 앞에 친절한 주석을 넣어 불렀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써주세요, 이하 생략, 중간 생략, 안녕 내 사랑”

 

이하 생략과 중간 생략 안에는 이런 가사가 있었다.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 편지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하늘이 푸른지 마음이 밝은지
즐거운 날도 외로운 날도 생각해 주세요

 

2022년 가을 나성 하늘은 변함없이 푸르렀고, 마음의 밝기란 여전히 전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나성은 더 이상 이역만리 꿈의 도시, 아스라이 올려 보는 도시가 아니었다. 어떤 연유에서 도래한 3년의 공백이 태평양을 사이에 둔 서울과 나성의 간극, 낭만을 메마르게 메워버렸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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