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시간, 브라질][여행] 이방인의 시간, 브라질

이방인의 시간, 브라질 #1

 


“Eu tenho setenta e cinco anos. (저는 일흔다섯이에요.)”


춤추는 노부부


살랑이는 음악 따라 물 흐르듯 춤추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진정 음악과 춤을 즐기고 있다는 걸. 이들만의 박자대로 이들만의 리듬을 만들어 간다. 사람들의 시선도 할머니, 할아버지 쪽으로 향해 있다. 뜨거운 시선을 느끼셨는지 우리 쪽을 힐끗 보며 미소 짓는 할아버지. 수많은 사람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실까? 음악이 끝나고 갈채가 터졌다.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진 상태로 할머니께 다가가 말씀드렸다.


“너무 아름다우셔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고 해맑은 미소로 대답하시는 할머니. “저는 일흔다섯이에요.”


할머니의 들뜬 목소리와 표정에서 진한 행복이 우러나왔다.


브라질 전통 축제 페스타주니나


6월의 브라질은 전통 축제인 ‘페스타주니나’로 바쁘다. 알록달록한 장식들, 구황작물과 곡물로 만든 다양한 음식들, 붉은 체크무늬 셔츠와 꽃무늬 드레스, 주근깨에 양 갈래 머리, 밀짚모자 등 시골 복장을 묘사한 촌스러운 복장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음악과 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뽐낸다.


어떤 사람은 먹거리가 있는 곳에서, 어떤 사람은 음악이 있는 곳에서, 어떤 사람은 그저 나처럼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축제를 즐긴다. 브라질, 아니,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과를로스는 남녀노소 어우러져 제대로 축제를 즐기는 곳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린 손자와 손녀, 걸음마도 못 뗀 갓난아기, 그리고 중장년의 부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라이브로 연주되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이런 인생을 살면 어떨까. 늘 음악이 흐르는 것처럼 삶의 리듬에 맞춰 춤추는 삶. 갑작스러운 변주가 훅 들어와도 또 자연스럽게 그 리듬에 맞춰 즐기는 삶. 이들처럼 사랑스럽게, 그렇게 춤추듯 살고 싶다.



“조심해”, “많이 위험하다던데”, “왜 브라질이야?”


브라질을 간다고 했을 때 위험하지 않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별걱정 없었다. 브라질서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과 함께 살 예정이기에 든든했다. 물론 브라질로 오는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 공항을 거쳐 약 38시간 동안 공항과 비행기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는 내내 온몸이 뻐근했다. 잠은 실컷 잔 덕분에 시차 적응은 빨리할 수 있었지만.


공항에 내려 길고 긴 출입 통로를 지나 드디어 문이 열리는 순간, 나를 데리러 온 그와 그의 부모님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을 안고 남자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길. 드문드문 스치는 난생처음 보는 특이한 나무에 내가 정말 외국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드디어 브라질에 착륙하는 비행기. 안도감과 설렘이 동시에 드는 순간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22살 즈음부터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그냥 낯선 곳에 내던져 보고 싶었다. 왠지 그 낯선 곳에 내 길이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고 할까. 그렇게 한국인들이 워킹홀리데이로 제일 많이 찾는 캐나다, 호주를 가겠거니 확신하고 있었는데… 브라질이라니! 포르투갈어도 못하는 내게 그만큼 낯선 곳이 절실했겠지.


집 근처 공원에서


그렇게 이곳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째다. 남반구에서 가장 넓은, 한국의 약 84배 면적인 브라질, 그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상파울루에 속한 과를로스에 살고 있다. 여행자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6개월 간 주민처럼 지낼 이방인 신분으로. 덕분에 좀 더 밀접하게 이곳의 삶을 볼 수 있다. 한 달간 지내며 그 유명한 이구아수 폭포로 굵직한 여행도 다녀왔다. 뿐만 아니라 시청도 다녀오고 병원도 다녀오고, 이곳 시스템에 단시간에 적응한 듯하다. 


그래서 불편한 점은 없냐고? 솔직하게 말하면 일 처리 속도며 각종 시스템이며 편리함으로 따지면 한국을 이길 순 없다. 그런데 편리함이 항상 편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편리함에 너무 익숙해지면 아주 조금의 불편함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처음에는 여기 와서 불편한 점이 몇 개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게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길거리에서 핸드폰이나 지갑 꺼내지 않기, 어두워지면 걸어 다니지 않기 등 조심해야 할 점도 몇 가지 있지만, 이것마저도 적응해버려서 내가 조심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습관이 되었다. 오히려 핸드폰을 보는 횟수가 줄어 의미 있는 시간들을 많이 보내게 된다.


참고로 내가 있는 곳과 한국의 시차는 12시간이다. 한국이 밤이면 브라질은 아침, 한국이 아침이면 브라질은 밤. 한국보다 12시간 느린 덕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할 때면 내 시간이 더 여유로워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숲속 같은 집 근처 공원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영어를 몰라서 저절로 포르투갈어 공부도 하고 있다. 들리는 단어가 점점 많아져서 재밌다. 마트에 가면 가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스몰토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처음엔 누군가 내게 말을 걸까 봐 딴 곳을 보며 피하기도 했다. 이제는 자신감이 조금 붙었는지 누군가 말을 걸 것 같으면 긴장 반 기대 반 두근거린다.


어느 날은 남자친구와 함께 카페에 가서 내가 주문을 했다. 중간에 머리가 하얘져서 머뭇거리자 종업원이 단어를 알려주며 연습을 시켰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잘했다며 칭찬도 해줬다. 아직 발음도 서툴고 가끔 엉뚱한 단어를 말하기도 하지만 외국인이니 다 이해해주고 오히려 환영해준다. 요즘은 주문하고 계산하는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습득했는데 가끔 “봉지 드릴까요?” 나 “어떤 맛 하실래요?”처럼 갑작스러운 질문이 들어오면 못 알아듣고 당황한다. 그럴 땐 남자친구가 항상 뒤에서 도와준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스몰토킹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계속 연습하려고 한다.


카페에서 포르투갈어로 주문한 메뉴들


이곳 사람들은 마주치면 꼭 인사를 한다. 처음 보는 사람끼리 인사를 나누다 보니 단시간에 친근감이 생긴다. 대부분 해맑은 표정으로 인사하고, 그렇게 인사를 하고나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먼저 하려고 한다.


아침, 오후, 저녁마다 인사말도 다르다. 아침엔 ‘Bom dia(봉 지아)’, 오후엔 ‘Boa tarde(보아 따르지)’, 저녁엔 ‘Boa noite(보아 노이치)’.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누군가와 마주치면 지금이 아침인지 오후인지 저녁인지 계산하느라 인사가 2초 늦다. 먼저 눈인사를 하며 시간을 끈 후 제대로 된 인사말을 떠올리는 게 요령이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엔 아시아인이 거의 없어 가끔 아이들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땐 “Ola! (안녕!)”라고 하면 수줍게 웃거나 해맑게 인사해준다. 그 똘망똘망한 눈으로 인사를 해줄 때면 순식간에 마음이 녹는다. 인사라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구나.


아파트에서 나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나무.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이곳에도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브라질 사람이라고 다 흥 많고 에너지 넘치는 것도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단지 무엇을 즐기고, 어떻게 즐기고, 어떻게 축하하고, 어떤 것들을 중요시하는 지가 조금씩 다를 뿐.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모여 이곳만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남은 5개월 동안 스치는 바람마저도 제대로 느끼며 이곳의 매력을 만끽할 예정이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보다는 천천히 걷듯이 여유롭게, 내 일과와 쉼의 밸런스를 맞춰가며 무엇이든 최대로 만끽할 거다. 일흔다섯에 자유롭게 춤추던 할머니처럼 내 삶의 리듬 따라 나만의 춤을 추며. 언젠가 내 삶을 되돌아봤을 때 이곳에서의 시간이 또 하나의 징검다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싶다.




글/사진 여지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되고 싶은 열정 많은 모험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에서 영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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