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에 가면 #5
“내 혈관을 자른다면 나는 다저스의 푸른 피를 흘릴 겁니다. 난 죽고 나면 하늘에 있는 큰 다저스로 갈 거예요.”
다년간 LA 다저스의 감독을 역임했던 다저스의 레전드이자 상징 토미 라소다(Tommy Larsoda)가 했던 말이다. 국내 야구팬들에겐 코리아 특급 박찬호 선수의 다저스 시절 은사이자 양아버지 같은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쇼맨십과 입심이 좋아 주옥같은 명언을 많이 남겼다.
‘다저스의 푸른색(Dodger Blue)’.
이 두 단어의 조합은 메이저리그 구단 다저스를 넘어 로스앨젤레스에 대한 그럴듯하고도 영리한 네이밍이라 생각했다.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이자 여가의 상징을 거의 일 년 내내 볼 수 있는 쨍하고 푸른 하늘에 덧입히다니, 꽤 실존적 작명 아닌가. 다저스의 팬들은 ‘다저 블루’에 팬톤 색상표 294번이라는 구체적인 푸른색을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다저 블루
지난해에 이어 올가을 역시 회사 출장 후 LA에 3박 4일 머물게 됐다. 작년의 테마는 이를테면 본격적인 ‘LA 필수코스 둘러보기’였는데, 올해는 지난해보다 짧은 기간을 효율적으로 즐기는 것이 관건이었다.
나의 LA 버킷리스트에서 지난해 미처 달성하지 못한 아이템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다저스의 홈구장 다저스타디움(Dodger Stadium)에서 경기를 보는 것. ‘다저스 스타디움’이 아니다. 팀명이 단수형으로 붙어 ’다저스타디움‘이다.
지난해 건립 60주년을 맞이했던 메이저리그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구장이자, 타자가 친 플라이 볼 타구가 무거운 공기를 뚫고 뻗어나가기가 힘들어 웬만큼 세게 친 공도 펜스 앞에서 잡히기 때문에 이른바 ‘투수 친화적’인 구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Welcome to Doger Stadium!
다저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선 구단 홈페이지나 전문 예매 사이트를 통해서 미리 티켓을 확보해 놓아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좋은 자리를 얻고 싶지만,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아 감당할 수 있는 좌석은 경기장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다저스의 홈팀 더그아웃은 3루 쪽에 있는데 그로부터 대략 세 구역 정도 내야 상단에 있는 통로 자리를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예매한 좌석 명칭은 그럴싸하게도 ’Infield Loge Box VIP'였다. 이 조촐한 내야 상단의 애매한 ‘귀빈석’ 자릿값은 171달러(약 23만 원). TV 중계를 보면 자주 볼 수 있는 다저스의 더그아웃 바로 위에 있는 구역에서 경기를 보고 싶었건만, 최소 50만 원 이상의 티켓값이 필요했다.
9월 초, 다저스는 이미 정규시즌 100승 이상을 거두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가을 야구를 확정 지어 놓은 상황이었다. 나의 휴가는 9월 하순에 맞물렸고, 다소 김빠지게도 이즈음부터 그들은 승리에 그리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다저스의 감독 데이브 로버츠보다 더 굳건하게 기둥같이 다저스를 지켜줬던 클레이튼 커쇼의 투구를, 무키 베츠의 날렵한 플레이와 프레디 프리먼의 우직한 배팅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게다가 상대는 내셔널리그 서부 지역의 라이벌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자이언츠 또한 개인적으로 다저스 못지않게 좋아하는 팀이었으니 어느 정도 흥미진진함을 기대하며 야간 경기가 펼쳐질 다저스타디움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다저스타디움으로 향하는 길.
“나는 야구가 지루해.”
숙소에서 다저스타디움까지는 10km도 되지 않는 거리. 따릉이 같은 공유 자전거를 타고 가면 딱 좋으련만 라라랜드는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는 아니다. 우버를 불렀다. 목적지까지 대략 2km 정도의 거리를 남겨놓고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그래, 금요일 저녁이니까. 이란인 드라이버가 말을 건넨다.
“나는 야구가 지루한 경기 같아.”
그의 느닷없는 이 말 뒤엔 “도무지 다들 왜 이런 정성으로 야구를 보러 가는지 이해가 안 돼”가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금요일 밤과 주말이면 어김없이 막히는 이 도로를 운전하면서 그는 이 불만 어린 선언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딱히 뭐라 답하기도 귀찮고 어쨌든 빠르게 경기장에 가고 싶은 마음에 “그래, 역시 스포츠는 축구가 재미있지. 지난 월드컵에서 이란팀 나름대로 잘했는데, 좀 아쉽게 됐어.”라고 반응했다. 그가 다음 말을 뱉은 후론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난 야구도, 축구도 관심 없어. 체스만이 내 관심사거든.”


다저스타디움
다저스타디움에 들어서자 감회가 새롭다. ‘여기가 박찬호와 최희섭, 류현진이 활약했던 곳이로구나.’ 메이저리그 팬들에겐 아마도 그 소회가 ‘여기가 재키 로빈슨, 샌디 쿠팩스, 클레이튼 커쇼의 구장이구먼’이지 않을까?
메이저리그 인기 팀들 구장은 흔히 ‘볼파크(ball park)'라고 불린다. 경기를 보러오는 이들에게 구장은 일종의 ‘공원’이어서 경기의 전후로 즐길만한 거리와 이벤트가 다양하게 마련된다. 이날은 ‘히스패닉 헤리티지(Hispanic Heritage)’ 기간을 기념하며 LA 다수를 차지하는 라틴계 커뮤니티를 겨냥한 문화 행사가 진행됐다. 선착순 기념품으로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인 조 켈리가 마리아치 복장을 한 버블헤드 인형을 나눠주어 운 좋게 득템할 수 있었다.

조 켈리의 버블헤드 인형
경기 관람만큼 중요한 게 먹을거리였다. 다저스타디움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다저 도그(Dodger Dog)와 짭짤하게 볶은 껍질 땅콩, 그리고 소다 음료로 구성된 세트. 별다를 게 없는 핫도그였지만, 머스타드 소스와 케첩, 다진 양파 소스를 야무지게 채워 넣은 후 한 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자리로 향했다.
역사적인 입장
예매한 ‘내야의 VIP 박스’ 좌석은 내야 구역을 나눈 여러 층의 상단 구조 때문에 위쪽 시야가 막혀있는 구조였다. 어딜 봐서 VIP적인 부분이 있을까 의아했는데, ‘통로에 위치해 이동의 자유가 있으니 당신의 좌석은 그나마 괜찮은 자리요’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다저스의 선수들 라인업을 소개하는 구장 내 소개는 꽤 흥겹고도 거창했다. 소개되는 선수 한 명 한 명 대단한 플레이를 기대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반대로 원정팀인 자이언츠 선수들 소개엔 홈 관중들 대부분이 야유로 단합했다. “우~~!!!”
다저스타디움에서 먹는다는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다저 도그
3회 정도가 되니 “야구는 지루한 경기야”라고 했던 우버 기사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결과적으로 그날 경기는 우버 기사의 ‘신탁’ 때문이었는지 지루할 수밖에 없는 경기로 전개됐다. 다저스는 승리에 대한 갈증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서 김하성과 동료였던 션 머나야가 자이언츠 선발 투수로 나와 이적 후 한동안의 부진을 씻는 인생 투구를 던지며 다저스의 타선을 잠재우기도 했다.
팬들의 응원이 무색했던 경기
가장 큰 기대를 품었던 베츠, 프리먼, 키케 에르난데스 등의 야무진 방망이는 볼 수 없게 됐다. 선발로 나온 캐일럽 퍼거슨도 컨디션 난조로 2회부터 빠졌다. 자이언츠의 타자들은 급하게 구성된 다저스 계투진들을 대상으로 홈런을 몇 방 때리면서 분위기를 끌고 갔다.

무키 베츠의 타석
다저스의 무득점 행진은 7회까지 이어졌다. 이 정도에서 미리 나가줘야 다소 한적한 구장 머천다이즈 숍에 들러 틈새 쇼핑을 할 수 있고, 혼잡하지 않은 귀갓길을 밟을 수 있었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북적였던 머천다이즈 숍에서 커쇼의 흰색 다저스 저지와 다저스 모자를 샀다. 호텔로 돌아와 커쇼의 저지를 입어 보니 경기보다 더 큰 만족감이 들었다. 그날의 최종 스코어는 5대 1로 다저스의 패배. 내가 떠난 후 8회에 1점을 추가했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다저스 팬들에게는 진로 소주 광고가 잘 어울렸던 경기
하지만 이틀 후, 떠나는 날 공항에서 찾아본 그 다음 날 경기 소식에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커쇼가 선발로 나와 5이닝 무실점 호투를 했고, 이어 버블헤드 인형의 주인공 조 켈리가 이어 던졌던 경기에서 다저스는 자이언츠를 두들겨 7대 0의 깔끔한 승리를 거두었던 것. 하지만 올해 정규시즌에서 최강이었던 다저스는 가을 야구의 첫 문턱에서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졌다. 포스트 시즌에서만 유독 약해지는 커쇼도 첫 경기 선발로 나가 1회부터 지독하게 두들겨 맞고 실점한 후 일찍 시즌을 마감했다.
그날 산 다저스 볼캡과 유니폼 뒤판에 새겨진 커쇼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팬톤 249번의 블루.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커쇼가 다저스의 무대에서 물러나도 이 명문 팀은 어김없이 푸른 LA의 하늘 아래 어찌 됐든 대체로 푸르고 창창한 전통을 이어갈 것이라고. 핫도그와 땅콩, 맥주를 찾아 열 몇 시간 먼 나라에서도 오는 나 같은 뜨내기 관광객들과 팬이 있는데 아무렴.

그래도 커쇼의 유니폼은 남았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나성에 가면 #5
“내 혈관을 자른다면 나는 다저스의 푸른 피를 흘릴 겁니다. 난 죽고 나면 하늘에 있는 큰 다저스로 갈 거예요.”
다년간 LA 다저스의 감독을 역임했던 다저스의 레전드이자 상징 토미 라소다(Tommy Larsoda)가 했던 말이다. 국내 야구팬들에겐 코리아 특급 박찬호 선수의 다저스 시절 은사이자 양아버지 같은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쇼맨십과 입심이 좋아 주옥같은 명언을 많이 남겼다.
‘다저스의 푸른색(Dodger Blue)’.
이 두 단어의 조합은 메이저리그 구단 다저스를 넘어 로스앨젤레스에 대한 그럴듯하고도 영리한 네이밍이라 생각했다.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이자 여가의 상징을 거의 일 년 내내 볼 수 있는 쨍하고 푸른 하늘에 덧입히다니, 꽤 실존적 작명 아닌가. 다저스의 팬들은 ‘다저 블루’에 팬톤 색상표 294번이라는 구체적인 푸른색을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에 이어 올가을 역시 회사 출장 후 LA에 3박 4일 머물게 됐다. 작년의 테마는 이를테면 본격적인 ‘LA 필수코스 둘러보기’였는데, 올해는 지난해보다 짧은 기간을 효율적으로 즐기는 것이 관건이었다.
나의 LA 버킷리스트에서 지난해 미처 달성하지 못한 아이템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다저스의 홈구장 다저스타디움(Dodger Stadium)에서 경기를 보는 것. ‘다저스 스타디움’이 아니다. 팀명이 단수형으로 붙어 ’다저스타디움‘이다.
지난해 건립 60주년을 맞이했던 메이저리그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구장이자, 타자가 친 플라이 볼 타구가 무거운 공기를 뚫고 뻗어나가기가 힘들어 웬만큼 세게 친 공도 펜스 앞에서 잡히기 때문에 이른바 ‘투수 친화적’인 구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저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선 구단 홈페이지나 전문 예매 사이트를 통해서 미리 티켓을 확보해 놓아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좋은 자리를 얻고 싶지만,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아 감당할 수 있는 좌석은 경기장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다저스의 홈팀 더그아웃은 3루 쪽에 있는데 그로부터 대략 세 구역 정도 내야 상단에 있는 통로 자리를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예매한 좌석 명칭은 그럴싸하게도 ’Infield Loge Box VIP'였다. 이 조촐한 내야 상단의 애매한 ‘귀빈석’ 자릿값은 171달러(약 23만 원). TV 중계를 보면 자주 볼 수 있는 다저스의 더그아웃 바로 위에 있는 구역에서 경기를 보고 싶었건만, 최소 50만 원 이상의 티켓값이 필요했다.
9월 초, 다저스는 이미 정규시즌 100승 이상을 거두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가을 야구를 확정 지어 놓은 상황이었다. 나의 휴가는 9월 하순에 맞물렸고, 다소 김빠지게도 이즈음부터 그들은 승리에 그리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다저스의 감독 데이브 로버츠보다 더 굳건하게 기둥같이 다저스를 지켜줬던 클레이튼 커쇼의 투구를, 무키 베츠의 날렵한 플레이와 프레디 프리먼의 우직한 배팅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게다가 상대는 내셔널리그 서부 지역의 라이벌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자이언츠 또한 개인적으로 다저스 못지않게 좋아하는 팀이었으니 어느 정도 흥미진진함을 기대하며 야간 경기가 펼쳐질 다저스타디움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나는 야구가 지루해.”
숙소에서 다저스타디움까지는 10km도 되지 않는 거리. 따릉이 같은 공유 자전거를 타고 가면 딱 좋으련만 라라랜드는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는 아니다. 우버를 불렀다. 목적지까지 대략 2km 정도의 거리를 남겨놓고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그래, 금요일 저녁이니까. 이란인 드라이버가 말을 건넨다.
“나는 야구가 지루한 경기 같아.”
그의 느닷없는 이 말 뒤엔 “도무지 다들 왜 이런 정성으로 야구를 보러 가는지 이해가 안 돼”가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금요일 밤과 주말이면 어김없이 막히는 이 도로를 운전하면서 그는 이 불만 어린 선언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딱히 뭐라 답하기도 귀찮고 어쨌든 빠르게 경기장에 가고 싶은 마음에 “그래, 역시 스포츠는 축구가 재미있지. 지난 월드컵에서 이란팀 나름대로 잘했는데, 좀 아쉽게 됐어.”라고 반응했다. 그가 다음 말을 뱉은 후론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난 야구도, 축구도 관심 없어. 체스만이 내 관심사거든.”
다저스타디움
다저스타디움에 들어서자 감회가 새롭다. ‘여기가 박찬호와 최희섭, 류현진이 활약했던 곳이로구나.’ 메이저리그 팬들에겐 아마도 그 소회가 ‘여기가 재키 로빈슨, 샌디 쿠팩스, 클레이튼 커쇼의 구장이구먼’이지 않을까?
메이저리그 인기 팀들 구장은 흔히 ‘볼파크(ball park)'라고 불린다. 경기를 보러오는 이들에게 구장은 일종의 ‘공원’이어서 경기의 전후로 즐길만한 거리와 이벤트가 다양하게 마련된다. 이날은 ‘히스패닉 헤리티지(Hispanic Heritage)’ 기간을 기념하며 LA 다수를 차지하는 라틴계 커뮤니티를 겨냥한 문화 행사가 진행됐다. 선착순 기념품으로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인 조 켈리가 마리아치 복장을 한 버블헤드 인형을 나눠주어 운 좋게 득템할 수 있었다.
경기 관람만큼 중요한 게 먹을거리였다. 다저스타디움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다저 도그(Dodger Dog)와 짭짤하게 볶은 껍질 땅콩, 그리고 소다 음료로 구성된 세트. 별다를 게 없는 핫도그였지만, 머스타드 소스와 케첩, 다진 양파 소스를 야무지게 채워 넣은 후 한 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자리로 향했다.
예매한 ‘내야의 VIP 박스’ 좌석은 내야 구역을 나눈 여러 층의 상단 구조 때문에 위쪽 시야가 막혀있는 구조였다. 어딜 봐서 VIP적인 부분이 있을까 의아했는데, ‘통로에 위치해 이동의 자유가 있으니 당신의 좌석은 그나마 괜찮은 자리요’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다저스의 선수들 라인업을 소개하는 구장 내 소개는 꽤 흥겹고도 거창했다. 소개되는 선수 한 명 한 명 대단한 플레이를 기대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반대로 원정팀인 자이언츠 선수들 소개엔 홈 관중들 대부분이 야유로 단합했다. “우~~!!!”
3회 정도가 되니 “야구는 지루한 경기야”라고 했던 우버 기사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결과적으로 그날 경기는 우버 기사의 ‘신탁’ 때문이었는지 지루할 수밖에 없는 경기로 전개됐다. 다저스는 승리에 대한 갈증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서 김하성과 동료였던 션 머나야가 자이언츠 선발 투수로 나와 이적 후 한동안의 부진을 씻는 인생 투구를 던지며 다저스의 타선을 잠재우기도 했다.
가장 큰 기대를 품었던 베츠, 프리먼, 키케 에르난데스 등의 야무진 방망이는 볼 수 없게 됐다. 선발로 나온 캐일럽 퍼거슨도 컨디션 난조로 2회부터 빠졌다. 자이언츠의 타자들은 급하게 구성된 다저스 계투진들을 대상으로 홈런을 몇 방 때리면서 분위기를 끌고 갔다.
다저스의 무득점 행진은 7회까지 이어졌다. 이 정도에서 미리 나가줘야 다소 한적한 구장 머천다이즈 숍에 들러 틈새 쇼핑을 할 수 있고, 혼잡하지 않은 귀갓길을 밟을 수 있었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북적였던 머천다이즈 숍에서 커쇼의 흰색 다저스 저지와 다저스 모자를 샀다. 호텔로 돌아와 커쇼의 저지를 입어 보니 경기보다 더 큰 만족감이 들었다. 그날의 최종 스코어는 5대 1로 다저스의 패배. 내가 떠난 후 8회에 1점을 추가했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이틀 후, 떠나는 날 공항에서 찾아본 그 다음 날 경기 소식에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커쇼가 선발로 나와 5이닝 무실점 호투를 했고, 이어 버블헤드 인형의 주인공 조 켈리가 이어 던졌던 경기에서 다저스는 자이언츠를 두들겨 7대 0의 깔끔한 승리를 거두었던 것. 하지만 올해 정규시즌에서 최강이었던 다저스는 가을 야구의 첫 문턱에서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졌다. 포스트 시즌에서만 유독 약해지는 커쇼도 첫 경기 선발로 나가 1회부터 지독하게 두들겨 맞고 실점한 후 일찍 시즌을 마감했다.
그날 산 다저스 볼캡과 유니폼 뒤판에 새겨진 커쇼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팬톤 249번의 블루.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커쇼가 다저스의 무대에서 물러나도 이 명문 팀은 어김없이 푸른 LA의 하늘 아래 어찌 됐든 대체로 푸르고 창창한 전통을 이어갈 것이라고. 핫도그와 땅콩, 맥주를 찾아 열 몇 시간 먼 나라에서도 오는 나 같은 뜨내기 관광객들과 팬이 있는데 아무렴.
그래도 커쇼의 유니폼은 남았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