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공립도서관의 사서][역사] 뉴욕도서관에 앉아 미국 독립 250년을 읽다

2026-07-13


뉴욕 공립도서관의 사서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 9 #1


뜨거운 7월, 뉴욕 맨해튼 42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 뉴욕공립도서관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이 이어진다.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타임스스퀘어가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있고, 뉴요커들이 가장 사랑하는 브라이언트 파크가 바로 뒤편에 자리한 이곳은 평소에도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비는 명소다. 그러나 올해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 앞에 발길을 멈춘다. 할아버지는 손주의 손을 꼭 잡고, 백 팩을 멘 젊은 부모는 아이를 안고, 가족들이 서로를 챙기며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묵묵히 차례를 기다린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뉴욕공립도서관에서 열리는 미국 독립기념 특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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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기념 250주년을 맞아 도서관에서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선언서 원본을 일주일간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
 이 특별 전시를 보기 위해 도서관 안팎에 수많은 방문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유희권


2026년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는 다양한 전시와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뉴욕 공립도서관도 그 중심에 서 있다. 도서관은 개관 이래 최대 규모의 특별전인 <Declaring America: 1776 and Beyond(미국의 탄생을 선언하다: 1776년과 그 이후)>를 개최하며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스티븐 A. 슈워츠먼 빌딩 곳곳의 전시 공간에서 열리는 이번 특별전은 1776년 독립선언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국 혁명이 남긴 역사적 유산과 의미를 조명한다. 건국의 역사를 직접 만나려는 시민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건, 뉴욕공립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보관하고 읽는 공간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겨 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미국 독립의 정신적 뿌리가 청교도 전통에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미국이 기독교적 가치와 청교도 정신 위에 세워진 나라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도서관의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추구한 핵심 가치가 종교적 신념에만 있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강조한 자유와 평등,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참여라는 이상은 오히려 인간의 이성과 보편적 권리를 강조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영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18세기 중엽 북미 식민지는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식민지 지도자들은 유럽 전역의 새로운 사상을 활발하게 접했다. 당시 계몽주의는 특정 국가의 사상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휩쓴 지적 운동이었다.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등 대도시에서 출판된 책들이 대서양을 건너 식민지인 미국 대학과 도서관으로 들어왔고, 변호사, 목사, 상인들은 이를 읽으며 새로운 정치철학을 토론했다.


계몽주의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자유와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천부인권의 개념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은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제시한 자연권 이론에서 출발했지만,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이 이를 더욱 발전시키며 개인의 자유와 평등, 국민의 권리를 정치의 핵심 원리로 확립했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영향은 건국의 아버지들을 통해 미국의 독립선언서에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특히 이러한 사상을 북미 식민지 사회에 확산시키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는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과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지식인들과 교류했고, 토머스 제퍼슨 역시 프랑스 주재 미국 공사를 지내며 계몽주의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이들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미국에 소개하기도 했고, 계몽주의 사상을 미국 현실에 맞추어 새로운 국가의 사상적 토대로 삼았다.


미국 독립은 1776년 7월 4일의 선언만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영국과 북미 식민지 사이에서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된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존재했다. 미국 독립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독립선언 이전인 1760년대부터 전개된 갈등의 과정과 그 핵심 흐름을 먼저 살펴본 후, 독립선언 이후 외교적 활동과 권리장전을 통해 미국 독립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이제 뉴욕공립도서관이 소장한 귀중한 자료들을 통해, 미국 독립선언서가 탄생하기까지의 역사와 건국의 아버지들이 남긴 발자취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겠다.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1763년.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이었던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3)에서 승리한 영국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막대한 전쟁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전쟁 비용을 부담시키려 했고, 1765년 신문, 계약서, 각종 인쇄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인지세법(Stamp Act)을 제정했다.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 의회에 자신들을 대표할 의원이 없는데도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대표(대표권) 없이는 과세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런던에 머물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식민지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했고, 결국 인지세법은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으며, 훗날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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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리틀턴(1709–1773), <미국 인지세법 폐지 법안에 대한 반대(Protest against the Bill to Repeal the American Stamp Act)> - 벤저민 프랭클린의 주석본. 
파리: J. W. 인쇄소(허위 발행지; 실제는 런던), 1766년. ©The New York Public Library.


그 후 불과 4년 후인 1767년, 영국은 타운젠드 법(Townshend Acts)을 제정해 유리, 종이, 차 등 여러 수입품에 새로운 관세를 부과했다. 이에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 상품 불매운동으로 대응했으며, 갈등은 더 이상 세금의 많고 적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누가 식민지를 통치할 권리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정치 자치권 문제로 확대되었다. 긴장이 고조되던 가운데 1770년 보스턴에서는 영국군과 시민들이 충돌해 군인들의 발포로 다섯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훗날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식민지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고, 신문과 전단을 통해 영국의 억압적 통치를 상징하는 사례로 널리 알려지면서 독립 여론을 더욱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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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식민지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The New York Public Library.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갈등은 1773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계기로 더욱 격화되었다. 영국 정부가 동인도회사를 통해 차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려 하자, 식민지 주민들은 보스턴 항구에 정박한 선박에 올라 차 상자들을 바다에 내던지며 항의했다. 이에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매사추세츠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으며, 식민지 주민들은 이를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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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 보스턴 차 사건, 주 의사당 벽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The New York Public Library.


그러나 영국의 압박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이해관계가 달랐던 13개 식민지가 공동의 위협으로 여겨 결집했고, 1774년 제1차 대륙회의를 열어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결국 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충돌하며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 조지 워싱턴이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되며 독립운동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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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2월 25일 밤, 조지 워싱턴이 대륙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 헤센 용병 부대를 기습한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그림. 
이 작전은 트렌턴 전투로 이어져 미국 독립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The New York Public Library.


독립선언서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식민지 지도자들은 더 이상 타협이 어렵다고 판단해, 1776년 토머스 제퍼슨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선언서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와 권리를 갖는다는 사상과 국민 주권의 원칙을 담고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고 선언하면서, 그 대표적인 권리로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을 제시하였다. 이는 국가가 국민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권리를 지니고 있으며 정부의 존재 이유는 이를 보호하는 데 있다는 계몽주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1776년 7월 4일, 식민지들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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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7월 4일, 의회에서. 연합하여 소집된 총회의 미합중국 대표들에 의한 선언.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전환점은 1777년 새러토가 전투(Battles of Saratoga)였다. 미국군이 이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자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판단하게 되었고, 이후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본격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개입은 전쟁의 균형을 크게 변화시키며 미국 측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 주었다. 이어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과 프랑스 연합군이 영국군을 포위했고, 결국 영국군이 항복하면서 독립전쟁은 사실상의 승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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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onse Bigot (ca. 1828–1872 or 1873), <Washington’s Grand Entry into New York(워싱턴의 뉴욕 입성)>(Nov. 25th, 1783. Chromolithograph, 1860) 
독립전쟁이 사실상 종결된 직후인 1783년 11월 25일, 조지 워싱턴 장군이 대륙군과 함께 영국군이 철수한 뉴욕시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묘사한 작품. 
이 날은 오늘날까지 ‘철수의 날(Evacuation Day)’이라 불리며, 영국군이 마지막으로 미국 영토를 떠난 날로 기념된다. ©The New York Public Library.




글 | 유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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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책과 희귀 자료를 연구하고, 그 자료와 연관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먼저 간 이들의 ‘한탄’을 듣고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의 삶을 좇고자 애쓰는 소박한 연구자. 두 권의 학술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특히 2008년 공동 저술한 『Visual Resources from Russia and Eastern Europe i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 Checklist』는 2009년 ARLIS(미국예술도서관학회)에서 Worldwide Books Award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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