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나라 코스타리카]푸라 비다, 행복의 단어

행복의 나라 코스타리카 #1



한국을 떠난 지 28시간. 미국을 두 번이나 경유하고서야 도착한 코스타리카 산호세 국제공항은 막 비가 갠 한적하고 차분한 공기에 싸여 있었다. 어디선가 고소하고 시큼한 커피 향이 나는 듯도 했다.


입국장을 통과하면 대기실도 없이 바로 도로변이다. 조금 당황했지만 크게 쓰인 내 이름을 들고 있는 낯선 함박웃음을 보니 마치 오래 알았던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내가 살게 될 집주인인 알폰소와 짐을 나눠 들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액션 영화에나 나올법한 거대한 바퀴를 장착한 미쓰비시 사륜구동에 시동을 거는 알폰소를 보며, 이 남자의 직업이 뭘까 궁금해졌지만, 도로에 나서자마자 험한 화산 지형의 코스타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공항의 사방을 커피 농장이 에워싸고 있었다.


코스타리카에서 내가 공부한 것은 사회 속에서의 행복이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커피가 유명하고, 이름 그대로(Costa Rica, 스페인어로 아름다운 해변) 해변이 아름다운 관광지. 이게 공항을 나설 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코스타리카의 전부였다. 나중에 알게 된 약간의 기본적인 정보를 보태자면, 1948년에 군 제도를 철폐한 이후 지금까지 군대 없는 나라를 유지하고 있으며 중앙아메리카의 평화 중재 노력으로 1987년 오스카르 아리아스 산체스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했다. 커피 생산지로 유명하고 영화 <쥬라기 공원>이 촬영되었을 만큼 풍부한 원시림과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자랑한다. 또 다양한 동식물의 보고이며 특히 거북이가 해변에 낳은 알을 새가 쪼아 먹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특이한 직업이 있다.


코스타리카의 가장 인상적인 면은 행복지수이다. 자연이 아름답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었으며 생활 수준도 꽤 높은 편이지만 행복지수 상위권 국가들이 대개 복지 수준이 높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나 호주 등 물질적으로 풍요한 국가들임을 감안할 때 남미에 속한 코스타리카의 행복지수는 의아한 면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쳐놓은 정도 크기에 우리나라 GDP의 반도 안 되는 이 조그마한 나라가 국민 행복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 걸까?


한 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산호세의 서쪽에 위치한 시우닷 꼴론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내가 일 년 동안 공부하게 될 대학이 있는 곳이다. 시우닷Ciudad은 스페인어로 도시라는 뜻이지만, 이름과 달리 아주 작은 산골 마을이다. 교회를 제외하면 대부분 단층 주택들이다. 레스토랑 테이블 위를 총총히 뛰어다니며 빵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이름 모를 새 두 마리, 이곳이 열대 지방임을 상기시켜주는 넓고 긴 이파리와 총천연색의 화려한 꽃들,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 그 수없는 날갯짓, 옆 테이블과 주방에서 새어나오는 빠르고도 늘어지는 특이한 템포의 스페인어 대화.



푸라 비다는 마법의 단어다. 좋은 아침, 좋은 하루, 고마워, 괜찮아, 문제없어, 잘 가, 행운을 빌어. 문자 그대로는 순수한 삶pure life이라는 뜻이지만 코스타리카에서는 너무나도 다양하게 쓰인다. 스페인어 권 나라를 다니다 누군가 이 단어를 쓴다면 분명 코스타리카 사람이다. 아침의 순수한 삶, 고맙다는 순수한 삶, 행운을 빌어주는 순수한 삶.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점이 이 말에 압축되어 있는 듯하다. 행복의 작은 단서다.


아침 메뉴는 코스타리카인이 즐겨 먹는 가요 핀토Gallo Pinto였는데 밥과 콩을 중심으로 하고 기호에 따라 샐러드, 오믈렛,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구운 치즈 등을 곁들여 먹는다. 간은 소금과 후추로만 했는지 보기와 달리 너무나 심심하다. 코스타리카에 도착한 지 두 시간 만에 나는 한국에서 볶음 고추장을 사 오지 않은 것을 사무치게 후회했다.


시우닷 꼴론 가까이에 있는 포아스 화산은 2,500미터의 활화산으로 마지막 폭발은 1995년에 있었다. 맑은 날 정상에 서면 태평양과 카리브 해를 모두 볼 수 있으며 화산의 칼데라는 늘 증기로 뒤덮여 있다. 계란 썩은 냄새와 유사한 유황 냄새가 나고 엄청난 크기의 분화구와 에메랄드빛의 칼데라가 눈앞에 펼쳐진다. 거대한 터키석이 누워있는 듯 선명한 푸른빛의 보기 드문 장관이다. 화산을 내려가는 길 주변에는 온통 커피나무가 재배되고 있다. 절벽의 골짜기 반대편도 온 산이 커피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저 많은 커피 열매는 누가 다 수확할까? 코스타리카도 인건비가 많이 올라 고된 작업을 기피하는 까닭에 최근에는 이웃한 니카라과 노동자들이 한철 커피 수확을 위해 국경을 넘는다고 한다. 남미 국가들의 경제 상황은 낯설지만 커피 수확만으로 코스타리카가 니카라과보다 잘 사는 나라라는 건 분명해진다. 하지만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더 잘 사는 나라? 경제적으로, 질적으로?”  


그들은 이웃 나라와의 비교에 이렇게 되묻는다. 왜 나는 잘사는 것의 지표로 물질적인 풍요밖에 생각 못 하고 살아온 걸까? 똑같은 경제 수준에서도 보건 수준이 낮아 국민의 개인 진료비가 높은 나라는 GDP가 더 높다. 지나친 개발로 환경이 오염되어 복원 사업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도 GDP는 높아진다. GDP는 한 국가의 경제 규모를 측정하는 지표이지 삶의 질적인 측면을 반영하지 않는다. 잘사는 것은 반드시 경제적 풍요를 뜻하지 않는다.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인간적인 삶을 보장받으며 서로 존중하는 공동체 안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며 살 때, 우리는 일억천금이 없이도 잘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푸라 비다의 삶, 코스타리카. 그 행복한 미소 뒤의 또 어떤 다른 모습이 더 궁금해졌다.




글/사진(1,4) 강수진

코스타리카의 유엔평화대학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전공했다. 지구별의 모든 사람이 환경친화적이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책 입안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홍콩에 거주 중이며,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의 공동 저자이다.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