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3
내가 직접 공연하기라도 한 것 같다. 무거운 몸으로 호텔에 도착해 씻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가 오전 6시 반에 일어났다. 커튼을 여니 오늘도 파아란 하늘 아래 가지런히 정렬된 비행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공연이 없는 이틀은 좀 더 시내로 이동하고 싶어 다른 호텔을 예약해 놓았다. 이틀 뒤 다시 이 호텔로 돌아올 테니 활주로 뷰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한다.
짐을 펼쳐두는 편이 아니라 다시 짐을 싸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체크아웃 후 우버를 타고 할리우드대로 근처 킴튼 에벌리 호텔로 갔다. LA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인 할리우드 사인(Hollywood sign)을 방 안에서 볼 수 있는 호텔이다. 시내라고는 해도 비벌리 힐스나 페어팍스, 멜로즈 거리랑 한참 떨어져 있어 역시 긴 이동을 해야 하는 곳이지만, 호텔을 알아볼 때 이 뷰에 마음이 쏙 뺏겨 다른 호텔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른 시간이라 짐만 맡겨 놓은 뒤 가벼운 차림으로 할리우드 대로로 향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가 걸어서 금방이었다. 바닥엔 유명한 배우, 가수 이름이 가득했으나 내가 아는 이름이라고는 냇 킹 콜이 전부. 그마저도 재즈를 좋아하는 태형(V)이 덕에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만큼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지만 이름을 밟고 지나간다는 것은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진다.
할리우드에서 제일 오래된 레스토랑인 무소&프랭크 그릴(Musso & Frank Grill)을 지나쳐 조금 더 걸으니 LA 여행 프로그램마다 등장해 눈에 익은 거리가 나타났다. 〈기생충〉과 〈미나리〉가 좋은 결과를 냈던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코닥 돌비 극장이 있는 메인 거리. 월요일 아침이었기 때문일까, 할리우드 배우나 캐릭터 차림을 하고 관광객을 상대하는 호객꾼 대신 허름한 차림의 홈리스가 쪽잠을 자고 있었다. 화려한 명성은 찾을 데 없고 황량하기만 했다. 투어 버스를 홍보하는 부스를 지나자 건너편으로 긴 줄이 보였다. 라인 프렌즈 매장의 오픈을 기다리는 줄이었다. BT21 캐릭터가 포함된 물건들을 이 일정에, 직접 와서 사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사랑의 행렬이다.
* * *
오늘은 LA에 공연 관람 겸 여행을 떠나 온 또 다른 지인과 하루를 같이 하기로 했다. 월요일에 오픈하는 게티 빌라 관람을 미리 예약해 놓았던 터라 할리우드대로는 여기까지만 보고 우버를 탔다. 베니스 비치에서 말리부 쪽으로 올라가다가 좁은 도로로 꺾어 들어가니 금세 게티 빌라에 다다랐다.

J. 폴 게티가 자기 집에 미술관을 세우고 개인 소유 미술품을 전시한 것이 게티 미술관의 시초였다. 게티 빌라는 LA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만큼 차에서 내리자마자 향긋한 장미향이 먼저 반겼다. 가방 검사와 백신 접종 확인을 마친 뒤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 아래의 고풍스러운 건물로 입장했다.
먼저 도착해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 지인과 만나 루벤스 전시가 진행 중인 미술관을 관람한 뒤 정원 중앙을 가르는 수영장 같은 분수와 허브 화단이 꾸며진 소담한 정원을 거닐었다. 메인 건물을 둘러싼 키 큰 나무 사이로 저 멀리 바다가 보여 난간에 기대 한참을 바라봤고, 인적이 없을 때 잠깐 마스크를 내린 채 담벼락에 고개를 내민 분홍 장미에 코를 대어 크게 숨을 들이마시기도 했다. 시간만 맞으면 언제든 무료로 방문할 수 있는 이 넓은 문화적 인프라가 LA의, 미국의 힘이겠지.


베니스 사인이 대각선으로 보이는 그레이트 화이트(Great White)의 야외 좌석에서 점심을 먹고 베니스 비치 스케이트 파크에 왔다. 보호 장비 없는 맨 몸을 스케이트보드에 내맡긴 청춘들이 부단히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묘기를 성공하고 난 뒤 그걸 찍은 영상을 에어드롭으로 받아가는 모습도, 서로를 향해 리스펙 하고 손뼉 치는 모습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일주일에 이틀, 하루 단 2회, 회당 열 명만 투어가 가능한 임스 파운데이션(Eames Foundation)에 도착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자작하게 깔린 마당에 놓인 열 개의 의자를 보고, ‘이게 진짜 임스 체어네’ 했다. 요즘 SNS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테리어 스타일이 미드 센츄리라 나도 독립하면서 철제 다리 가구들로 분위기를 통일시켰다. 1900년대 초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즈음에 활발히 활동한 임스 부부가 고안한 디자인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다.
투어는 총 2시간이었다. 우리 투어엔 2명이 불참해 8명이 참가했는데 남준의 취향에 딱 맞는 곳이기에 지인과 “원래 남준(RM)이가 오려고 예약한 건데 바빠서 못 온 걸 거야” 하는 진담이었으면 좋았을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해가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커튼대신 여닫이문으로 가릴 수 있게 한 것이나, 창문을 가로로 길게 만들어 액자화한 것도 몬드리안 작품을 보는 듯한 기하학적이었다. 하지만 내부 마감은 반대로 나무의 결을 살려 따뜻한 느낌이 났다. 만약 남준이 여길 다녀가지 않았다면 그 어느 곳보다 그의 취향일 테니 언젠가 여길 꼭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임스 파운데이션에서 산타모니카 비치까지 걸었다. 막 해가 져 가는 시간이라 어딜 봐도 그림이었다. 서서히 보라색으로, 그렇게 짙은 색으로 물드는 하늘, 해가 바다 끝에 걸려 있었다.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짧은 사이 해가 바다 아래로 사라졌다. 그 짧은 찰나, 허탈하게 웃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야 겹겹의 색감 층을 가진 산타모니카 비치 야경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산타모니카 비치의 밤이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3
내가 직접 공연하기라도 한 것 같다. 무거운 몸으로 호텔에 도착해 씻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가 오전 6시 반에 일어났다. 커튼을 여니 오늘도 파아란 하늘 아래 가지런히 정렬된 비행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공연이 없는 이틀은 좀 더 시내로 이동하고 싶어 다른 호텔을 예약해 놓았다. 이틀 뒤 다시 이 호텔로 돌아올 테니 활주로 뷰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한다.
짐을 펼쳐두는 편이 아니라 다시 짐을 싸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체크아웃 후 우버를 타고 할리우드대로 근처 킴튼 에벌리 호텔로 갔다. LA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인 할리우드 사인(Hollywood sign)을 방 안에서 볼 수 있는 호텔이다. 시내라고는 해도 비벌리 힐스나 페어팍스, 멜로즈 거리랑 한참 떨어져 있어 역시 긴 이동을 해야 하는 곳이지만, 호텔을 알아볼 때 이 뷰에 마음이 쏙 뺏겨 다른 호텔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른 시간이라 짐만 맡겨 놓은 뒤 가벼운 차림으로 할리우드 대로로 향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가 걸어서 금방이었다. 바닥엔 유명한 배우, 가수 이름이 가득했으나 내가 아는 이름이라고는 냇 킹 콜이 전부. 그마저도 재즈를 좋아하는 태형(V)이 덕에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만큼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지만 이름을 밟고 지나간다는 것은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진다.
할리우드에서 제일 오래된 레스토랑인 무소&프랭크 그릴(Musso & Frank Grill)을 지나쳐 조금 더 걸으니 LA 여행 프로그램마다 등장해 눈에 익은 거리가 나타났다. 〈기생충〉과 〈미나리〉가 좋은 결과를 냈던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코닥 돌비 극장이 있는 메인 거리. 월요일 아침이었기 때문일까, 할리우드 배우나 캐릭터 차림을 하고 관광객을 상대하는 호객꾼 대신 허름한 차림의 홈리스가 쪽잠을 자고 있었다. 화려한 명성은 찾을 데 없고 황량하기만 했다. 투어 버스를 홍보하는 부스를 지나자 건너편으로 긴 줄이 보였다. 라인 프렌즈 매장의 오픈을 기다리는 줄이었다. BT21 캐릭터가 포함된 물건들을 이 일정에, 직접 와서 사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사랑의 행렬이다.
* * *
오늘은 LA에 공연 관람 겸 여행을 떠나 온 또 다른 지인과 하루를 같이 하기로 했다. 월요일에 오픈하는 게티 빌라 관람을 미리 예약해 놓았던 터라 할리우드대로는 여기까지만 보고 우버를 탔다. 베니스 비치에서 말리부 쪽으로 올라가다가 좁은 도로로 꺾어 들어가니 금세 게티 빌라에 다다랐다.
J. 폴 게티가 자기 집에 미술관을 세우고 개인 소유 미술품을 전시한 것이 게티 미술관의 시초였다. 게티 빌라는 LA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만큼 차에서 내리자마자 향긋한 장미향이 먼저 반겼다. 가방 검사와 백신 접종 확인을 마친 뒤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 아래의 고풍스러운 건물로 입장했다.
먼저 도착해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 지인과 만나 루벤스 전시가 진행 중인 미술관을 관람한 뒤 정원 중앙을 가르는 수영장 같은 분수와 허브 화단이 꾸며진 소담한 정원을 거닐었다. 메인 건물을 둘러싼 키 큰 나무 사이로 저 멀리 바다가 보여 난간에 기대 한참을 바라봤고, 인적이 없을 때 잠깐 마스크를 내린 채 담벼락에 고개를 내민 분홍 장미에 코를 대어 크게 숨을 들이마시기도 했다. 시간만 맞으면 언제든 무료로 방문할 수 있는 이 넓은 문화적 인프라가 LA의, 미국의 힘이겠지.
베니스 사인이 대각선으로 보이는 그레이트 화이트(Great White)의 야외 좌석에서 점심을 먹고 베니스 비치 스케이트 파크에 왔다. 보호 장비 없는 맨 몸을 스케이트보드에 내맡긴 청춘들이 부단히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묘기를 성공하고 난 뒤 그걸 찍은 영상을 에어드롭으로 받아가는 모습도, 서로를 향해 리스펙 하고 손뼉 치는 모습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일주일에 이틀, 하루 단 2회, 회당 열 명만 투어가 가능한 임스 파운데이션(Eames Foundation)에 도착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자작하게 깔린 마당에 놓인 열 개의 의자를 보고, ‘이게 진짜 임스 체어네’ 했다. 요즘 SNS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테리어 스타일이 미드 센츄리라 나도 독립하면서 철제 다리 가구들로 분위기를 통일시켰다. 1900년대 초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즈음에 활발히 활동한 임스 부부가 고안한 디자인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다.
투어는 총 2시간이었다. 우리 투어엔 2명이 불참해 8명이 참가했는데 남준의 취향에 딱 맞는 곳이기에 지인과 “원래 남준(RM)이가 오려고 예약한 건데 바빠서 못 온 걸 거야” 하는 진담이었으면 좋았을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해가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커튼대신 여닫이문으로 가릴 수 있게 한 것이나, 창문을 가로로 길게 만들어 액자화한 것도 몬드리안 작품을 보는 듯한 기하학적이었다. 하지만 내부 마감은 반대로 나무의 결을 살려 따뜻한 느낌이 났다. 만약 남준이 여길 다녀가지 않았다면 그 어느 곳보다 그의 취향일 테니 언젠가 여길 꼭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임스 파운데이션에서 산타모니카 비치까지 걸었다. 막 해가 져 가는 시간이라 어딜 봐도 그림이었다. 서서히 보라색으로, 그렇게 짙은 색으로 물드는 하늘, 해가 바다 끝에 걸려 있었다.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짧은 사이 해가 바다 아래로 사라졌다. 그 짧은 찰나, 허탈하게 웃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야 겹겹의 색감 층을 가진 산타모니카 비치 야경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산타모니카 비치의 밤이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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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