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4
이래서 커튼을 활짝 열어두고 잤다. 눈 뜨자마자 저 언덕 너머의 흰 할리우드 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홀린 듯 일어나 창문 가까이에 다가서 비슷비슷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투어를 할 예정이고, 내일이면 다시 공항 근처 호텔로 옮기겠지만, 이 장면을 보기 위해 굳이 여길 왔다. 영화에서만 보던 풍경이 실제 내 눈앞에 있다. 말해 뭐해, 이게 다 방탄 덕이지.

ⓒ Kimpton Everly Hotel
호텔 1층 카페에 내려가 아이스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시간 맞춰 픽업 온 투어 차량에 탑승했다. 오늘 함께하는 투어 인원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 두 명은 결혼 10년 차 부부였고, 한 명은 출장이자 방탄소년단 공연을 보기 위해, 또 다른 한 명은 오롯이 방탄소년단 공연만을 위해 LA를 방문한 사람들이었다. 차량을 운전하는 가이드께서 이전 투어는 완벽히 ‘아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며, 한인타운 마켓에서 일하는 분의 말을 빌리자면 지난주부터 미국 전 주의 신분증과 세계 각국의 여권을 다 보고 있는 중이란다. 도시 하나를 팬들로 가득 메우는 거, 방탄소년단에게는 일도 아니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 도착하기 전 리버사이드에 먼저 도착했다. 상해 임시 정부에 독립자금을 대기 위해 이곳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했던 독립투사들. 이중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있었다. 의복을 잘 차려입어야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고 정장 차림을 하고 일했던 꼿꼿한 남성의 기념 동상이 리버사이드 중심가에 있다. 투어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도산 안창호 동상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을 거다. 한국어로 적힌 그의 업적을 더욱 꼼꼼하게 읽었다.

닉슨 대통령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미션 인Mission Inn 호텔과 크리스마스 상품으로 가득한 빈티지 마켓을 잠시 구경하고 다시 먼 길을 나섰다. 태연이 〈Why〉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풍력 발전 단지에 차를 세웠다가, 조슈아 트리 카페에서 콜드 브루 커피를 마셨다.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호텔에서 출발한 시간이 9시경이었는데 국립공원 주차장에 내리니 오후 1시가 넘었다.

가이드님이 직접 준비해 오신 재료들로 바비큐를 해 먹고, 사진 찍기 좋고 풍경 보기 좋은 스폿들을 차례로 찾아다녔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닮았다는 조슈아(여호수아) 트리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황량한 모래와, 생김새도 낯선 돌무더기와 색다른 지형들까지. 노을이 지는 키스 뷰keys view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어스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세찬 바람 덕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었지만, 까맣게 어두워지기 전 〈134340〉을 찾아 들었다. 꼭 지금이어야 했다. 몇몇 투어 팀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는데, 방탄소년단 투어 MD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차량 불빛이 아니면 인공 빛이 하나도 없는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차에서 나오며 자연스레 고개가 뒤로 꺾였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촘촘히 박힌 별이 하늘에 펼쳐졌다. 이게 별이구나. 내가 그동안 봐 온 것들은 별이 아닌, 그저 희미한 깜빡임이었구나. 꼭 강처럼 흐르는 은하수는 이맘때에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오리온자리, 별똥별, 그 사이를 반짝이며 지나는 비행기. 방탄 TV의 《본 보야지Bon voyage》로 여행을 간 뉴질랜드에서 어느 밤, 별이 쏟아질 것 같다고 말하던 지민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 *
오늘도 이 할리우드 사인을 보며 눈 뜰 수 있다니. 일어나자마자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날씨도 참 좋고, 할리우드 사인은 참 하얗고, 찬란한 별밤의 여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확인했냐, 괜찮냐로 대변되는 메시지들이 연이어 울렸다. 뭐지? 메시지 속 뉴스 링크를 클릭했다.
[속보] 오미크론 쇼크... 모든 입국자 접종했어도 10일간 격리
12월 3일부터 16일까지 국내에 들어오는 내·외국인은 예방접종 여부와 관계없이 10일간 격리를 해야 한다는 뉴스였다. 한국행 비행기를 이곳 날짜로 3일에 탈 예정이고 한국에 도착하면 4일이니 꼼짝없이 격리다. 한국은 자정이 막 넘은 시간이지만 팀장님께 얼른 메시지를 보내 놓고, 올해 남은 휴가와 내년 휴가를 당기면 자가 격리가 처리되려나, 머리로 상황을 셈하면서 몸은 착실하게 짐을 쌌다. 우버 안에서 자세한 기사를 찾아보니 내국인들은 별도의 시설이 아닌 자택에서 격리를 하면 된단다. 평소에도 집에서 잘 나가지 않는 편인데 집에 열흘 머무르기만 하면 되는 거라니, 못 할 것도 없겠다.
사실 [속보]란 두 글자에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내겐 아직 2회 공연이 남았고, 남은 2회 공연을 즐겨야 했고, 격리를 피하기 위해 공연을 포기하고 일찍 입국할 이유가 없었고(실제로 회사 일 등의 이유로 출국을 앞당긴 분들이 꽤 많았다), 자가 격리 ‘하면 하지’ 싶었다.
공항 근처에 다다르니 안개가 빼곡하다. 아까까지 눈부시게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하필 지금부터 흐리다니. 의미 부여라지만 날씨가 꼭 알 수 없는 상황이 된 지금 같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고자 이어폰을 꽂고 공연 셋 리스트를 정리해 놓은 재생 목록을 틀었다. 그때 〈Save me〉가 랜덤으로 흘러나왔다. 꼬깃하던 날 개 줘서. 답답하던 날 깨줘서. 꿈속에만 살던 날 깨워줘서. 널 생각하면 날 개어서. 그렇게 이어진 다음 곡이 〈So What〉. 차창 너머 하늘을 보니 진짜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조금씩 보인다. 일부러라도 이렇게는 못 듣겠다. 그래 이 가사들 같다. 날은 개고, So What.
안달 내봐야 1분이 1시간으로 흐르지 않는 것. 팀장님이 보내 올 메시지는 한국 시간에 맞춰 올 테니 그때로 미뤄놓고 일단 방문 예약을 해 놓았던 게티 센터를 향했다. 트램을 타고 천천히 언덕을 오르니 하얀 외관의 뮤지엄에 금세 도달했다. 꼭 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다. 저 멀리 비쭉 솟은 다운타운의 마천루 가운데로 하얀 구름이 가로로 길게 걸쳐 있어 여기서 LA의 경관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작품을 감상하지 않더라도 야외 좌석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기에도 충분한 공간이겠다.

게티 센터 하이라이트관은 고흐 옆에 세잔, 세잔 옆에 르누아르, 르누아르 옆에 고갱, 고갱 옆에 드가, 드가 옆에 모네가 있는 인상주의관이었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 체득했다. 어떤 대단한 카메라도 인간의 눈이 가진 화소 앞에 무용지물이라고. 그렇다면 회화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배와 사람의 형태를 역광에 비친 실루엣으로만 표현한 모네의 작품을 보며 이게 회화가 가진 장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게티 센터의 소장품 중 가장 대표적인 고흐의 ‘아이리스’는 집에다 그대로 걸어두고 싶어 포스터로 구입했다.


점심을 예약한 식당이 있는 페어팍스에 가기 전, LACMA 근처에 있는 ‘어반 라이트Urban Light’와 제임스 코든쇼의 《크로스워크 콘서트Crosswalk concert》를 찍은 CBS를 둘러보기 위해 우버를 탔다.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게티 센터가 전부 오픈한 거냐고 묻는 우버 기사님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게티 빌라도 게티 센터만큼 좋으니 추천한다는 말에 먼저 다녀왔다고 하니 나보고 아티스트냐 묻는다. 그냥 보는 것만 좋아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아는 의사는 뮤지컬도 한다고 우리 모두가 아티스트 아니겠냐고 한다. 반 고흐 전시를 홍보하고 있는 광고판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시간이 되면 해머 뮤지엄을 방문해 보라는 팁도 받았다. 모두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크리에이터다.

LA 빕 그루망에 선정된 이탈리안 음식점인 존앤비니스Jon & Vinny's는 일찌감치 예약을 해 놓았던 식당이다. LA에 도착한 태형이 업로드한 흑백사진 속 거리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었는데 바로 이 존앤비니스가 있는 페어팍스 거리였다. 비슷비슷한 곳들을 다니는데도 실제로 마주치진 못한다는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 탄다)의 진리만 다시금 깨달으며 예약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갔다. 테이블 당 기본으로 제공되는 판콘토마테에 모짜렐라 치즈 스틱, 매콤한 토마토 푸실리 파스타까지. 기분 좋은 식사였다.

입국과 마찬가지로 출국 역시 72시간 내 PCR 음성 결과서가 있어야 한다. 월그린이나 CVS 같은 곳에서 무료 PCR 검사를 받을 수 있지만 검사 결과 시간이 보장되지 않기에 결과지를 수령하는 시간이 확실한 유료 검사를 알아봤고 그중 하나투어에서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방문 PCR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상품이 있었다. 호텔 정문에 도착해 한국인 간호사를 만나 여권 사본 제출 후 PCR 검사를 순식간에 마쳤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연락. 회사에서 자가 격리 기간을 재택근무로 인정해 주겠다고 결정했다. 회사에서 노트북을 비롯한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휴가 소진 없이 자가 격리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 회사의 결정과 이런 결정을 내리게끔 애써준 팀장님께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4
이래서 커튼을 활짝 열어두고 잤다. 눈 뜨자마자 저 언덕 너머의 흰 할리우드 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홀린 듯 일어나 창문 가까이에 다가서 비슷비슷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투어를 할 예정이고, 내일이면 다시 공항 근처 호텔로 옮기겠지만, 이 장면을 보기 위해 굳이 여길 왔다. 영화에서만 보던 풍경이 실제 내 눈앞에 있다. 말해 뭐해, 이게 다 방탄 덕이지.
ⓒ Kimpton Everly Hotel
호텔 1층 카페에 내려가 아이스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시간 맞춰 픽업 온 투어 차량에 탑승했다. 오늘 함께하는 투어 인원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 두 명은 결혼 10년 차 부부였고, 한 명은 출장이자 방탄소년단 공연을 보기 위해, 또 다른 한 명은 오롯이 방탄소년단 공연만을 위해 LA를 방문한 사람들이었다. 차량을 운전하는 가이드께서 이전 투어는 완벽히 ‘아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며, 한인타운 마켓에서 일하는 분의 말을 빌리자면 지난주부터 미국 전 주의 신분증과 세계 각국의 여권을 다 보고 있는 중이란다. 도시 하나를 팬들로 가득 메우는 거, 방탄소년단에게는 일도 아니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 도착하기 전 리버사이드에 먼저 도착했다. 상해 임시 정부에 독립자금을 대기 위해 이곳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했던 독립투사들. 이중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있었다. 의복을 잘 차려입어야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고 정장 차림을 하고 일했던 꼿꼿한 남성의 기념 동상이 리버사이드 중심가에 있다. 투어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도산 안창호 동상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을 거다. 한국어로 적힌 그의 업적을 더욱 꼼꼼하게 읽었다.
닉슨 대통령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미션 인Mission Inn 호텔과 크리스마스 상품으로 가득한 빈티지 마켓을 잠시 구경하고 다시 먼 길을 나섰다. 태연이 〈Why〉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풍력 발전 단지에 차를 세웠다가, 조슈아 트리 카페에서 콜드 브루 커피를 마셨다.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호텔에서 출발한 시간이 9시경이었는데 국립공원 주차장에 내리니 오후 1시가 넘었다.
가이드님이 직접 준비해 오신 재료들로 바비큐를 해 먹고, 사진 찍기 좋고 풍경 보기 좋은 스폿들을 차례로 찾아다녔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닮았다는 조슈아(여호수아) 트리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황량한 모래와, 생김새도 낯선 돌무더기와 색다른 지형들까지. 노을이 지는 키스 뷰keys view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어스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세찬 바람 덕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었지만, 까맣게 어두워지기 전 〈134340〉을 찾아 들었다. 꼭 지금이어야 했다. 몇몇 투어 팀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는데, 방탄소년단 투어 MD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차량 불빛이 아니면 인공 빛이 하나도 없는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차에서 나오며 자연스레 고개가 뒤로 꺾였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촘촘히 박힌 별이 하늘에 펼쳐졌다. 이게 별이구나. 내가 그동안 봐 온 것들은 별이 아닌, 그저 희미한 깜빡임이었구나. 꼭 강처럼 흐르는 은하수는 이맘때에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오리온자리, 별똥별, 그 사이를 반짝이며 지나는 비행기. 방탄 TV의 《본 보야지Bon voyage》로 여행을 간 뉴질랜드에서 어느 밤, 별이 쏟아질 것 같다고 말하던 지민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 *
오늘도 이 할리우드 사인을 보며 눈 뜰 수 있다니. 일어나자마자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날씨도 참 좋고, 할리우드 사인은 참 하얗고, 찬란한 별밤의 여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확인했냐, 괜찮냐로 대변되는 메시지들이 연이어 울렸다. 뭐지? 메시지 속 뉴스 링크를 클릭했다.
[속보] 오미크론 쇼크... 모든 입국자 접종했어도 10일간 격리
12월 3일부터 16일까지 국내에 들어오는 내·외국인은 예방접종 여부와 관계없이 10일간 격리를 해야 한다는 뉴스였다. 한국행 비행기를 이곳 날짜로 3일에 탈 예정이고 한국에 도착하면 4일이니 꼼짝없이 격리다. 한국은 자정이 막 넘은 시간이지만 팀장님께 얼른 메시지를 보내 놓고, 올해 남은 휴가와 내년 휴가를 당기면 자가 격리가 처리되려나, 머리로 상황을 셈하면서 몸은 착실하게 짐을 쌌다. 우버 안에서 자세한 기사를 찾아보니 내국인들은 별도의 시설이 아닌 자택에서 격리를 하면 된단다. 평소에도 집에서 잘 나가지 않는 편인데 집에 열흘 머무르기만 하면 되는 거라니, 못 할 것도 없겠다.
사실 [속보]란 두 글자에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내겐 아직 2회 공연이 남았고, 남은 2회 공연을 즐겨야 했고, 격리를 피하기 위해 공연을 포기하고 일찍 입국할 이유가 없었고(실제로 회사 일 등의 이유로 출국을 앞당긴 분들이 꽤 많았다), 자가 격리 ‘하면 하지’ 싶었다.
공항 근처에 다다르니 안개가 빼곡하다. 아까까지 눈부시게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하필 지금부터 흐리다니. 의미 부여라지만 날씨가 꼭 알 수 없는 상황이 된 지금 같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고자 이어폰을 꽂고 공연 셋 리스트를 정리해 놓은 재생 목록을 틀었다. 그때 〈Save me〉가 랜덤으로 흘러나왔다. 꼬깃하던 날 개 줘서. 답답하던 날 깨줘서. 꿈속에만 살던 날 깨워줘서. 널 생각하면 날 개어서. 그렇게 이어진 다음 곡이 〈So What〉. 차창 너머 하늘을 보니 진짜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조금씩 보인다. 일부러라도 이렇게는 못 듣겠다. 그래 이 가사들 같다. 날은 개고, So What.
안달 내봐야 1분이 1시간으로 흐르지 않는 것. 팀장님이 보내 올 메시지는 한국 시간에 맞춰 올 테니 그때로 미뤄놓고 일단 방문 예약을 해 놓았던 게티 센터를 향했다. 트램을 타고 천천히 언덕을 오르니 하얀 외관의 뮤지엄에 금세 도달했다. 꼭 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다. 저 멀리 비쭉 솟은 다운타운의 마천루 가운데로 하얀 구름이 가로로 길게 걸쳐 있어 여기서 LA의 경관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작품을 감상하지 않더라도 야외 좌석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기에도 충분한 공간이겠다.
게티 센터 하이라이트관은 고흐 옆에 세잔, 세잔 옆에 르누아르, 르누아르 옆에 고갱, 고갱 옆에 드가, 드가 옆에 모네가 있는 인상주의관이었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 체득했다. 어떤 대단한 카메라도 인간의 눈이 가진 화소 앞에 무용지물이라고. 그렇다면 회화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배와 사람의 형태를 역광에 비친 실루엣으로만 표현한 모네의 작품을 보며 이게 회화가 가진 장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게티 센터의 소장품 중 가장 대표적인 고흐의 ‘아이리스’는 집에다 그대로 걸어두고 싶어 포스터로 구입했다.
점심을 예약한 식당이 있는 페어팍스에 가기 전, LACMA 근처에 있는 ‘어반 라이트Urban Light’와 제임스 코든쇼의 《크로스워크 콘서트Crosswalk concert》를 찍은 CBS를 둘러보기 위해 우버를 탔다.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게티 센터가 전부 오픈한 거냐고 묻는 우버 기사님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게티 빌라도 게티 센터만큼 좋으니 추천한다는 말에 먼저 다녀왔다고 하니 나보고 아티스트냐 묻는다. 그냥 보는 것만 좋아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아는 의사는 뮤지컬도 한다고 우리 모두가 아티스트 아니겠냐고 한다. 반 고흐 전시를 홍보하고 있는 광고판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시간이 되면 해머 뮤지엄을 방문해 보라는 팁도 받았다. 모두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크리에이터다.
LA 빕 그루망에 선정된 이탈리안 음식점인 존앤비니스Jon & Vinny's는 일찌감치 예약을 해 놓았던 식당이다. LA에 도착한 태형이 업로드한 흑백사진 속 거리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었는데 바로 이 존앤비니스가 있는 페어팍스 거리였다. 비슷비슷한 곳들을 다니는데도 실제로 마주치진 못한다는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 탄다)의 진리만 다시금 깨달으며 예약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갔다. 테이블 당 기본으로 제공되는 판콘토마테에 모짜렐라 치즈 스틱, 매콤한 토마토 푸실리 파스타까지. 기분 좋은 식사였다.
입국과 마찬가지로 출국 역시 72시간 내 PCR 음성 결과서가 있어야 한다. 월그린이나 CVS 같은 곳에서 무료 PCR 검사를 받을 수 있지만 검사 결과 시간이 보장되지 않기에 결과지를 수령하는 시간이 확실한 유료 검사를 알아봤고 그중 하나투어에서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방문 PCR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상품이 있었다. 호텔 정문에 도착해 한국인 간호사를 만나 여권 사본 제출 후 PCR 검사를 순식간에 마쳤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연락. 회사에서 자가 격리 기간을 재택근무로 인정해 주겠다고 결정했다. 회사에서 노트북을 비롯한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휴가 소진 없이 자가 격리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 회사의 결정과 이런 결정을 내리게끔 애써준 팀장님께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