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에 가면][여행] 라라랜드의 우버 드라이버

나성에 가면 #1



3년 이후

그렇잖아도 팬데믹 후의 미국 풍경이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와는 규모 자체가 다르게 폭증했던 초기 감염자 수 일별 통계의 충격부터 곧잘 뉴스로 전해진 백신 반대주의자들의 시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와 폭행 사건들. TV 뉴스와 유튜브를 통해 전달되었던 뉴욕의 텅 빈 맨해튼 거리나 L.A. 등 대도시 다운타운에서 인적이 거의 끊긴 횅한 도심 풍경은 당분간의 개점휴업이라기보다는 마치 영화 「나는 전설이다」 에서 그려진 이른바 종말 이후(post apocalyptic) 느낌의 살풍경이었다. 


세상이 정말 이렇게 서서히 끝나가는 거 아닌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업무 일정으로 닷새를 보낸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다시 닷새의 휴가를. 팬데믹 고민 같은 거 없이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를 호기롭게 걸어볼 수 있을까? 자신들의 Cool 때문에 마뜩잖던 마스크를 벗어낸 일상, 그러나 팬데믹 이후 물가 상승은 도처에 노숙자 텐트촌, 마리화나, 소변 악취라는 인장을 남기고 있었다. ‘킹달러’의 환율은 여행을 떠나 온 나에게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2022년 가을 미국의 대도시를 다녀왔던 사람들은 대개 그런 추억으로 여행을 기억하지 않을까?




L.A.의 우버 드라이버들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콜래트럴」만큼 로스앤젤레스의 밤 풍경을 잘 담아낸 작품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처음 오면서 나름의 확신에 찼던 것은 역시 영화로 배웠어요, 식의 어이없는 고백이겠지만, 내심 이 도시의 마른 밤 정경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목적지로 이동하고 싶었다. 어딘가 미더운 구석이 있는 택시 운전자와 간간이 말을 섞으면서. 하지만 공항에 도착한 첫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나의 이동을 도와줬던 이들은, 각인각색의 사연과 캐릭터로 잠깐의 말벗이 되어 주었던 우버 드라이버들이었다. 


도착 터미널에서 대략 20여 분 남짓을 걸어 나와 우버, 리프트(Lyft) 지정 탑승장에 닿자 기아차가 다가온다. 플랫폼 택시의 탑승은 기사와 손님 사이에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영훈? 델라라? 반가워. 할리우드까지는 45분. 기사 델라라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인권운동가인 조안 바에즈를 닮았다. 누가 먼저 운을 띄웠는지 모르겠지만, 대화는 지독해져 가는 로스앤젤레스의 교통 정체와 요금 할증, 여행자가 피해야 할 우버 이용 시간대, 폭증한 물가, 다가올 중간선거, 한숨 나오는 정치 이야기로 이어졌다.



다음 날 할리우드에서 다운타운까지 이동을 도와준 우버 드라이버는 멕시코인 호르헤. 내리쬐는 로스앤젤레스의 맑고 여과 없는 태양 햇빛에 어리둥절해진 나를 위해 업비트 음악을 틀어준다. 이번에도 기아차다. 나의 국적을 단박에 알아챈 그가 기아 전기차 예찬으로 대화를 연다. 오전 11시. 라라랜드의 정체엔 특정 시간대가 없다. 나는 되도록 많은 종류의 음악을 들으려 해, 하고 그가 말하는 순간 운전대를 잡는 팔 움직임이 특이하다는 걸 알아챘다. 그는 왼팔이 없었다. 어려서 팔을 잃었다고, 그래도 운전할 힘은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이야기를 밝고 힘차게 전환하려 월드컵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는 축구는 모르겠고 체스를 가장 좋아한다고.


어색한 공기를 뚫고 다음 노래가 흘렀다. 데프 레파드의 〈Love Bites〉. 이 장면에 이 노래라니. 데프 레파드의 드러머 릭 앨런은 사고로 왼쪽 팔을 잃었지만, 오른팔과 두 다리로 계속해서 밴드의 리듬을 책임지고 있다. 〈Love Bites〉가 수록된 이들의 최고 히트앨범 《히스테리아(Hysteria)》는 그가 오른팔과 두 다리로 얼마나 탄탄한 연주를 보여줄 수 있는지 넘치게 입증했던 결과물이었다. 우버를 몰며 손님들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 얘기를 하는 것이 자신의 즐거움이라 말하는 호르헤처럼.



다음 날. 코리아타운에서 숙소로 오는 길, 우버 안에선 재즈 선율이 10분 넘게 이어졌다. 젊은 흑인 드라이버는 과묵했고, 나는 햇살에 나가떨어졌다. 어둑해진 멜로즈 대로(Melrose Avenue)를 지나며 90년대 드라마 《멜로즈 플레이스》의 헤더 로클리어도 이제 많이 늙었겠지 하고 생각할 때 커트 로젠윈클의 연주가 흘렀다. 재즈 전문 라디오 채널인 줄 알았어. 고마워, 이 시간 즈음에 재즈는 늘 옳지. 그리고 테렌스 블랜차드, 마일즈 데이비스, 듀크 엘링턴, 니나 시몬. 그의 이름은 이드리스(Idris). 배우 지망생이고, 주말이면 커뮤니티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 서울 어느 극장에서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며 멜로즈 대로의 재즈를 추억할 날은 언제쯤일까.


호텔에 인접한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에는 수많은 스타의 손바닥이 새겨진 동판들이 깔려 있지만, 바로 옆길로 빠지면 낡은 텐트들이 줄지어 깔려 있다. 대낮부터 마리화나나 값싼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숙자들이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코리아타운으로 가는 우버에서는 앨리스 인 체인스와 크랜베리스, 블라인드 멜론, 펄 잼 등을 틀어주던 베트남계 티모시를 만났다. 90년대 모던 록이야말로 음악의 중심이지. 또 이런 시대가 올 수 있을 것 같아? 글쎄, 나는 그저 미국까지 와서 순댓국을 먹으러 코리아타운으로 가는 길이라.


한국을 꼭 가보고 싶어서 일본인 아내의 영주권 문제가 해결될 때만 기다린다는 이란인 페레이둔과는 마침내 월드컵 이야기를 했다. 우버 탑승 마지막 날이었다.


닷새 동안 만났던 이 도시의 플랫폼 운수 노동자들. 미국 IT 기업에서 일하는 나와 그들 모두 기술 경제 플랫폼 위에서 살아간다는 게 공통점이지만 그들은 대개 더 열심이고 더 열정적이었다. 음악에 대해서도, 삶의 의지 같은 것에서도.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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