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에서 보낸 가을]내가 훔쳐야 했던 가을

몬트리올에서 보낸 가을 #9



이미 다섯 개의 달, 두 번의 계절을 몬트리올에서 보낸 M은 매일 우리가 다녀야 할 시내 곳곳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안내하는 장소에는 어느 정도 그녀의 취향이 배어있었고, 그보다 더 자주 그녀가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취향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수첩은 내가 몬트리올에 왔을 때 가야 할 곳으로 빼곡했다. 그중 절반은 그녀가 이미 갔던 곳이었고, 나머지는 꼭 가보고 싶었으나 나와 함께 가기 위해 남겨둔 곳이었다.


가끔은 함께 길을 걷다가 충동적으로 들어간 카페나 식당, 서점도 있었다. 그런 경우도 즐거웠지만, 나는 대체로 그녀의 선택에 나를 맡겼다. 몬트리올은 온전히 그녀에게 달려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M의 안목이 뛰어난 것일 수도 있고 그저 M이 선택했기에 나도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가 안내한 곳들은 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앙큼해진 나는 이번엔 내가 그녀에게 소개할 곳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집에서 한 번도 택하지 않은 방향으로 자전거 핸들을 돌렸다.



플라토 지역Le Plateau-Mont-Royal은 생활자가 아니고서야 그 경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범위가 넓었다. 나와 M이 며칠에 걸쳐 돌아다닌 길들이, 서로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음에도, 이 지역 안에 포함되었음을 깨닫고 놀라웠다. 오래된 건물 벽엔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그 때문인지 아닌지 예술가의 거리라는 별명도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삭막한 구조물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곳을 예술가의 거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 훗날 포틀랜드에서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거리라는 별명이 붙은) 앨버타 스트리트를 걸을 때도 어리둥절했다. 하긴 예술가가 한 명도 없는 동네에서 누가 앞장서서 그 큰 벽화를 그리겠느냐마는.



제법 부티가 나는 석조가옥들은 현관에 매달린 반 층짜리 계단도 나무가 아니라 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차들은 규정 속도 이하로 달렸다. 신호등은 초록과 빨강 사이를 굼뜨게 오갔다. 햇살을 받은 이파리도 초록과 빨강 사이 어디쯤에선가 빛났다. 신호가 바뀌고 바람이 불면 쌀알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위를 쓰다듬는 나뭇잎은 꼭 색깔이 있는 그림자 같았다. 때때로 신호등을 흉내 내며 제 색깔을 바꾸는 이파리도 보였다. 그게 다 햇빛의 장난이었으나 나는 몇 번이고 속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골목 몇 번 꺾자마자 전혀 다른 분위기의 주택가에 접어들기도 했다. 머지않아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질 것 같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쥐와 비바람이 뜯어 먹어 흠집이 난 널빤지와 기둥 따위가 질긴 넝쿨에 파묻혀 있었다. 몸이 불편한 여인이 지팡이 끝으로 낙엽을 쿡쿡 찌르다 갈림길에 접어들었다. 어떤 식당은 불을 다 꺼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고, 어떤 공예품 가게는 불을 다 켜놓았지만 주인이 자리에 없었다. 한쪽에선 하수도관을 교체하는 공사장에서 울리는 탕탕탕, 아스팔트 깨는 소리가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멀어지는 퍼레이드의 북소리처럼 아련한 소음이었다.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닮은 오후랄까. 앞 장에서 벌어진 소동이 일단락되며 복을 받을 사람은 복을 받고 평온해져야 할 사람은 평온해진 결말의, 공들인 삽화 같았다. 얼마간 쓸쓸한 잉크를 적신 붓질도 되어 있었다. 이제 행인들은 아이들 놀이처럼 햇볕을 골라 걸어 다니다가 그늘로 들어가면 이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좁은 골목, 작은 상점, 크고 작은 집들이 사람들을 삼켰다. 절대로 잔혹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이야기처럼 그들은 엇, 하고 사라졌다가 짜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나타날 예정이었다.


마음의 빈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눈으로 보아도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장면. 환상인가 싶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시 보아도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장면. 하지만 이미지로든 헛된 글 몇 줄로든 절대 있는 그대로 남길 수는 없는, 마치 비밀과도 같은 그런 장면.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런 장면을 마음에 남기라고 말한다. 나 또한 그렇다고 믿을 때가 있었다. 이제는 그 말이 ‘최선을 다하면 성공한다’는 말 만큼이나 따라가기 힘든 주장임을 안다. 내 마음은 너무도 작아서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나를 둘러싼 세상을 담아낼 여력이 없다. 남는 것은 인상뿐. 소파에 찍힌, 막 자리를 뜬 누군가의 체온 같은 희미한 흔적뿐이다.



M에게 그녀가 모르는 몬트리올을 선보이려던 나는, 결국 이 장면을 전달해 줄 능력이 없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노트에 방금 받은 인상을 끼적여도 진실은 탕탕탕, 아스팔트를 부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로 도망가 버렸다.


“나는 처음으로 가을을 소개받은 기분이다.”


거기까지가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는 결국 스시집 하나를 찾아내 수업이 끝나면 이쪽으로 와 함께 저녁을 먹자고 M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살짝 솟았던 땀은 이미 다 식었고 나는 조용한 자리 안쪽으로 지친 몸을 밀어넣었다. 창밖으로 내가 훔쳐야 했던 가을이 흐르고 있었다.





글/사진 신태진

여행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의 공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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