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에서 보낸 가을]올드 몬트리올까지 걷기

몬트리올에서 보낸 가을 #2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몬트리올에 머물며 거의 매일 목적지가 불분명한 산책을 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여행 안내서에 굵은 글씨로 표시된 게이 빌리지가 나오기도 했고, 단골 말고는 찾지 않을 반지하 베트남 식당 같은 곳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진이나 글로만 접하며 상상했던 풍경을 천천히 세세하게 실제와 맞춰보는 일이 산책의 즐거움이었다. 잠시 빌려온 새것 같은 일상이었다.


물론 시기가 맞지 않아 끝내 확인하지 못한 장면들도 있다. 눈 덮인 몬트리올이 그러했다. 캐나다 동부 지역이 늘 그렇듯 몬트리올도 겨울이 되면 혹한과 폭설에 시달린다. 눈으로 막혀 현관문 열기도 힘들다는(나는 창문으로 기어 나와 문 앞의 눈을 치우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막상 닥치면 죽을 것처럼 불편하겠지만, 머릿속에서는 그저 낭만적이기만 한 날씨가 몬트리올 사람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들은 지하에 제2의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언더그라운드 시티’. 30Km에 달하는 지하보도이자 아케이드, 자연에 대항한 방공호. 도시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두 배로 늘어났다. 실내에 불어넣는 엄청난 난방의 기운에 사람들은 한겨울에도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외출하기도 한다. (물론 언제든 벗어둘 수 있는 오리털 패딩을 위에 걸치고.) 아쉬운 일인지 다행스러운 일인진 모르겠으나 내가 몬트리올에 머물었던 짧은 시기는 늦가을이었고, 나는 너무 급히 왔다며 수줍어하던 약간의 눈송이만 맞아보았다. 하지만 몇몇 사진에서 본, 크리스마스 장식 옆에 반소매 차림으로 앉아 있는 몬트리올 사람들의 모습만큼은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실제로 스퀘어-빅토리아Square-Victoria 역에서 몬트리올 월드 트레이드 센터로 올라올 때, 격자 유리 천장 너머로 쏟아지는 하늘을 보았다. 실외 같으면서도 실내인, 유리벽으로 지은 쇼핑몰과는 어딘지 좀 다른, 햇볕에 적당히 달궈진 공기가 따스한 공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생활하기 좋은 온도와 투명한 겨울 하늘을 동시에 누리고 있었다. 날씨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미래의 인류를 보는 듯했다.


아케이드를 나서면 그림자로 세상을 덮을 만큼 높으면서도 수십 년은 족히 묵었을 고층 건물의 숲으로 들어선다. 가끔 건물의 높이가 달라지는 틈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그림자를 사선으로 잘라내기도 했다. 그러면 건물은 입체성을 잃고 평면의 그림처럼 보였다. 창고가 아닌가 싶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붉은 벽돌엔 항상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대로 계속 걸어가면 마천루나 지하 도시와는 정반대 분위기를 풍길 올드 몬트리올 지구가 나왔다. 그 또한 몬트리올에 가기 전부터 숱하게 상상했던 곳이었다.



몬트리올에 처음으로 유럽인, 그러니까 프랑스인이 발을 디딘 건 1535년이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퀘벡 시티에 터를 잡은 프랑스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그리 멀지 않은 몬트리올을 모피 교역소로 삼으려 노력했지만, 지금의 뉴욕 주 북쪽에 살던 원주민인 모호크족이 그걸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얼마나 용맹한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들은 사실 생존을 위해 프랑스에 맞선 건 아니었다. 문제는 비버의 가죽이었다. 북동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이 지역에 사는 비버를 사냥해 희소하고 질 좋은 모피를 수급했고, 그걸 유럽인들에게 팔았다. 이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유럽 각국과 인접한 원주민 혈족들이 연맹을 맺어 전쟁을 벌였다. 요즘도 분쟁 지역을 놓고 강대국들이 대리전을 펼치며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가지만, 당시엔 대리전이자 전면전이기도 했다. 1701년 평화 조약이 맺어지며 전쟁이 일단락 될 때까지 개척자건 원주민인건 할 것 없이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그들의 시체 위에는 모피가 아닌 누더기가 덮였다. 그동안 지금의 퀘벡 주에 ‘누벨 프랑스’, 프랑스 식민지를 견고히 했던 프랑스로서는 이제야 한숨 돌리는가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승리는 영국의 것이었다. 몬트리올은 물론이거니와 퀘벡 주 전체가 불어와 영어를 혼용해 쓰는 독특한 문화권이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모든 도시가 그렇듯, 전쟁의 역사를 잊기로 한 올드 몬트리올에도 고상한 분위기가 흐른다. 한 집 건너 나란히 문을 연 화랑을 보며 지금껏 지나온 금융가와 몇 분만에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나처럼 달뜬 표정의 관광객들은 메뉴판을 문가에 세워둔 식당으로, 맥줏집으로, 싸구려 기념품 가게와 파리에서 그대로 들어내 실어온 듯한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고층 빌딩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신 그보다도 오래된 최초 정착민의 거주지가 낭만적이지 않으냐고, 유럽 같지 않으냐고, 여행 책자에 쓰인 그대로 아니냐며 동의를 구해왔다. 실은 직전까지 걸었던 스퀘어-빅토리아 역을 위시한 금융가의 풍경이 내게는 더 이국적이었지만, 나는 예의 바르게 기대했던 대로군요, 인사치레를 했다. 어떤 용무로 찾았든 간에 그 집의 어르신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처럼.



구시가지가 이 도시를 북미의 파리라고 불리게 한 장본인이라면, 그 조화의 중심에는 노트르담 성당이 있다. 규모는 파리의 그것보다 작고 입장료까지 받지만(그래서 들어가지 않았지만), 탈세속적인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가로수와 곁들여 보면 시각적으로 만점을 줄 만하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좀 더 걸으면 뷰포트, 그러니까 옛 항구가 나온다. 거기까지 갈 힘이 없다면 맥주와 요깃거리를 찾을 겸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브루어리나 기웃거리면 족하다. 거리 사진을 찍어 누군가에게 들이대면 유럽은 언제 다녀왔어, 그런 질문을 받을 것 같다.



그러나 구시가지만으로 몬트리올을 파리나 유럽 소도시의 하위호환 정도로 여기는 건 불합리한 일처럼 보였다. 거의 바다처럼 다가오는 생 로렌스 강 쪽으로 몇 분 더 걸어가면 이 도시의 본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전차가 다니는지 궁금한 철로를 지나 육중한 화물선도 정박할 수 있을 규모의 부두를 어슬렁거리고, 관광객보다는 도시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과학 센터의 생뚱맞은 등장에 즐거움을 느꼈다. 그럴싸하지는 않았던 조악한 공룡 모형을 지나쳐 콘돔 자판기가 설치된 화장실을 공짜로 이용하면서 어쨌든 내가 갈망했던 도시가 유럽의 아류작이 아님을 확인했다. 몬트리올은 캐나다 내에서도 모피 반대 운동에 열성적인 도시 중 한 곳이다.


매일 낯선 도시를 산책하며 측정하는 감탄과 흥분의 바늘이 올드 몬트리올이라고 딱히 더 올라간 적은 없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매혹의 그래프에 오늘의 산책도 기여한 건 분명했다. 이번엔 차이나타운으로 가 볼까, 방향을 틀었다. 이런 날이 계속되는 일상이라면 참 살만할 텐데. 며칠 후에는 고대하던 눈이 오겠지만, 쌓이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글/사진 신태진

여행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의 공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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