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ranger : 나는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1
1.
바람이 분다. 의자 위 흰 쿠션은 세탁기에서 꺼낸 뒤 뜨거운 바람으로 오랜 시간 건조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뻣뻣하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옅은 미색의 쿠션에 앉아 감미로운 평온함을 누린다. 언제부터 내가 이리도 부드러운 사람이었는가, 싶을 만큼 평온하다. 하늘은 또 어찌나 맑고 높은지 6월 날씨가 아닌 10월의 어느 가을날 같다.
나는 지금 깎은 지 4일쯤 지난 잔디의 투박함을 바라보고 있다. 뾰족한 끝을 잘라내서일까, 이상하리만큼 끝이 뭉툭하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청보리의 새순만큼이나 새파랗다. 듬성듬성 길고 짧은 풀들도 이리 조화롭고 일관적이다.
발밑에는 유리잔 가득 커피가 담겨 있다. 이 나라에선 흔하디흔한, 휘핑크림을 잔뜩 얹었으면 이미 바닥을 드러냈을지도 모를 에스프레소 도피오. 휘핑크림 대신 부은 우유가 녹은 얼음과 섞이지도,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은 채 띠를 만들며 멈춰있다. 가끔 바람에 따라 얇아진 얼음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부딪히며 녹아내린다.
2.
시카고에 다녀왔다. 뉴올리언스에도 다녀왔다. 뉴욕에도 애틀란타에도 다녀왔다. 세인트루이스라는 작은 도시는 시도 때도 없이 나들이 가는 곳이다. 후쿠오카에도 다녀왔고 강원도 태백에도 다녀왔고 부산에도 다녀왔고 한국에도 다녀왔다. 한국에도 다녀왔다, 는 표현이 낯설지만 이제 익숙한 표현이 될 문장이다.
작년 이맘때의 난, 내가 사는 동탄에 관한 글을 쓰며 장미가 떨어지는 봄이 아쉽다고 푸념하고 있었다. 일 년이 지난 오늘의 난 여기에 앉아 지난 여행을 글로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살던 동네는 “그 동네”로 기억되는 나의 지난 과거가 되었다.
3.
기억이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한 냄새는 밤새 피어난 들꽃의 향기보다 아름답다. 요즘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만 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살아가고 있다. 숲 속 가득 피어난 들장미를 보고,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살아있음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조금 더 살아있을 걸 그랬다. 오늘도 이곳에는 비가 내린다. 그리고 나는 지난 2월 첫날의 뉴올리언스 여행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지난 12월 따로 떨어져 있던 우리는 2월 1일에 출발하는 기차표를 샀다. 1월 둘째 주에는 재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괜스레 만나고 2주쯤 지나면 어딘가 떠나고 싶을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재즈를 좋아하는, 아니, 재즈가 전부인 사람이 선택한 장소는 뉴올리언스였다. 미국에 문외한인 나는 그저 그러라고, 난 어디든 새로운 곳은 항상 만족스러우니 그곳에 가보자고 답했다.
야간열차를 타고 집에서부터 열세 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라는 말도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스페인까지 모든 열차를 종류별로 다 타며 여행한 적이 있었다. 낮에는 의자가 있던 공간이 밤에는 침대로 바뀐다는 사실이 사실, 놀랍지 않았다.
두 달은 아주 쉽게 흐른다. 잠에서 깨고 또 잠들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 서너 권을 읽고 나니 이미 두 달이 지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이탈리아에서 나트랑을 거쳐 미국에 도착했고, 잠깐 동안 숨을 고른 후 뉴올리언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야간열차는 유럽과 비슷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기차가 아주 컸다는 것뿐(으레 미국의 것은 다 그런 것 아닐까?). 새벽 두 시쯤 자리를 잡고 앉아 신나 보이는 그와 함께 와인 몇 모금을 홀짝거리다 잠들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가면 구석에 있는 딱딱하고 따뜻한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걸 좋아했는데, 일정한 패턴의 소음이 있는 기차소리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잠은 쉽게 찾아왔다.
일어나 보니 악어가 나올 것 같은 늪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해는 이미 떠 있었고 아침을 한참 넘긴 시각이라 우리는 식당 칸으로 갔다. 십 년도 더 전쯤,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마셨던 카푸치노 생각이 났다. 고상한 잔에 거품 가득, 시나몬 파우더를 넘치게 뿌려 함께 시킨 크루아상을 푹 찍어 먹었던 그 아침. 흔들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걸어 가 받아 든 아침은 뜨거운 치즈와 치킨이 들어있는 샌드위치였다. 여기선 아침의 크기도 다르다. 그래도 배가 고팠고, 먹어야만 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먹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시시피 강줄기를 따라 몇 시간을 내리 달리니 도착할 시각이 다가왔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최종 도착 공항이 세인트루이스였는데 그곳에도 흐르는 미시시피 강줄기가 뉴올리언스까지 이어지고, 나는 그 강줄기를 한참 바라보며 흘러가듯 그곳에 닿았다.
다음 편에 계속.
글/사진 별나
클래식 작곡 전공, 빌보드 코리아 기자, 예술 강사를 거쳐 이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우아한) 몽상가. 수전 손택을 닮고 싶고, 그보단 소박하게 전 세계를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미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다.
the Stranger : 나는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1
1.
바람이 분다. 의자 위 흰 쿠션은 세탁기에서 꺼낸 뒤 뜨거운 바람으로 오랜 시간 건조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뻣뻣하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옅은 미색의 쿠션에 앉아 감미로운 평온함을 누린다. 언제부터 내가 이리도 부드러운 사람이었는가, 싶을 만큼 평온하다. 하늘은 또 어찌나 맑고 높은지 6월 날씨가 아닌 10월의 어느 가을날 같다.
나는 지금 깎은 지 4일쯤 지난 잔디의 투박함을 바라보고 있다. 뾰족한 끝을 잘라내서일까, 이상하리만큼 끝이 뭉툭하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청보리의 새순만큼이나 새파랗다. 듬성듬성 길고 짧은 풀들도 이리 조화롭고 일관적이다.
발밑에는 유리잔 가득 커피가 담겨 있다. 이 나라에선 흔하디흔한, 휘핑크림을 잔뜩 얹었으면 이미 바닥을 드러냈을지도 모를 에스프레소 도피오. 휘핑크림 대신 부은 우유가 녹은 얼음과 섞이지도,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은 채 띠를 만들며 멈춰있다. 가끔 바람에 따라 얇아진 얼음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부딪히며 녹아내린다.
2.
시카고에 다녀왔다. 뉴올리언스에도 다녀왔다. 뉴욕에도 애틀란타에도 다녀왔다. 세인트루이스라는 작은 도시는 시도 때도 없이 나들이 가는 곳이다. 후쿠오카에도 다녀왔고 강원도 태백에도 다녀왔고 부산에도 다녀왔고 한국에도 다녀왔다. 한국에도 다녀왔다, 는 표현이 낯설지만 이제 익숙한 표현이 될 문장이다.
작년 이맘때의 난, 내가 사는 동탄에 관한 글을 쓰며 장미가 떨어지는 봄이 아쉽다고 푸념하고 있었다. 일 년이 지난 오늘의 난 여기에 앉아 지난 여행을 글로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살던 동네는 “그 동네”로 기억되는 나의 지난 과거가 되었다.
3.
기억이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한 냄새는 밤새 피어난 들꽃의 향기보다 아름답다. 요즘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만 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살아가고 있다. 숲 속 가득 피어난 들장미를 보고,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살아있음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조금 더 살아있을 걸 그랬다. 오늘도 이곳에는 비가 내린다. 그리고 나는 지난 2월 첫날의 뉴올리언스 여행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지난 12월 따로 떨어져 있던 우리는 2월 1일에 출발하는 기차표를 샀다. 1월 둘째 주에는 재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괜스레 만나고 2주쯤 지나면 어딘가 떠나고 싶을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재즈를 좋아하는, 아니, 재즈가 전부인 사람이 선택한 장소는 뉴올리언스였다. 미국에 문외한인 나는 그저 그러라고, 난 어디든 새로운 곳은 항상 만족스러우니 그곳에 가보자고 답했다.
야간열차를 타고 집에서부터 열세 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라는 말도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스페인까지 모든 열차를 종류별로 다 타며 여행한 적이 있었다. 낮에는 의자가 있던 공간이 밤에는 침대로 바뀐다는 사실이 사실, 놀랍지 않았다.
두 달은 아주 쉽게 흐른다. 잠에서 깨고 또 잠들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 서너 권을 읽고 나니 이미 두 달이 지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이탈리아에서 나트랑을 거쳐 미국에 도착했고, 잠깐 동안 숨을 고른 후 뉴올리언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야간열차는 유럽과 비슷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기차가 아주 컸다는 것뿐(으레 미국의 것은 다 그런 것 아닐까?). 새벽 두 시쯤 자리를 잡고 앉아 신나 보이는 그와 함께 와인 몇 모금을 홀짝거리다 잠들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가면 구석에 있는 딱딱하고 따뜻한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걸 좋아했는데, 일정한 패턴의 소음이 있는 기차소리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잠은 쉽게 찾아왔다.
일어나 보니 악어가 나올 것 같은 늪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해는 이미 떠 있었고 아침을 한참 넘긴 시각이라 우리는 식당 칸으로 갔다. 십 년도 더 전쯤,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마셨던 카푸치노 생각이 났다. 고상한 잔에 거품 가득, 시나몬 파우더를 넘치게 뿌려 함께 시킨 크루아상을 푹 찍어 먹었던 그 아침. 흔들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걸어 가 받아 든 아침은 뜨거운 치즈와 치킨이 들어있는 샌드위치였다. 여기선 아침의 크기도 다르다. 그래도 배가 고팠고, 먹어야만 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먹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시시피 강줄기를 따라 몇 시간을 내리 달리니 도착할 시각이 다가왔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최종 도착 공항이 세인트루이스였는데 그곳에도 흐르는 미시시피 강줄기가 뉴올리언스까지 이어지고, 나는 그 강줄기를 한참 바라보며 흘러가듯 그곳에 닿았다.
다음 편에 계속.
글/사진 별나
클래식 작곡 전공, 빌보드 코리아 기자, 예술 강사를 거쳐 이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우아한) 몽상가. 수전 손택을 닮고 싶고, 그보단 소박하게 전 세계를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미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