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고 싶은데요 #4



프랑스 영화를 즐겨 보는 나는 프랑스 영화처럼 살고 싶을 때, 앞머리를 문구 가위로 자르거나 미용실에 가서 쌤들을 당황시킨다. 아침잠이 덜 깨서일까?


“진짜 이렇게 해드려요?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다 떨리네요.”


한 시간 뒤 나의 머리는 미궁 속으로 빠질 것이다.


여러분의 새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새롭게 각성하고자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택했다. 가끔, 꽤 자주,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한다. 꽂히면 무조건 해 봐야 한다. 그렇게 난 잊을 수 없는 손님이 되어 왔고, 오늘도 잊을 수 없는 손님이 되었다.



머리는 며칠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인 듯 흠칫 놀랐다. 〈달려라 하니〉, 〈남자 셋 여자 셋〉, 아빠가 언급한 내 머리의 레퍼런스는 〈웰컴 투 동막골〉. 머리를 쥐어뜯는 내게 엄마는 손질하면 괜찮을 거라고 애써 위로해 주었다.


머리를 쥐어뜯어서인지 내 마음이 솟구치는 것인지 내 모습은 번개 맞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진짜 번개를 맞지 않고서야 이런 머리를 제 손으로 할 수는 없지.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길을 나섰던 어느 계절,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나는 사무실 주소만 덜렁 들고 내가 들어가고 싶어 하던 극단 사무실로 가고 있었다. 듣기로는 신입단원이 되면 여자든 남자든 삭발을 해야 한다는 곳이었다. 구태를 떨쳐버리자는 의미에서다. 더불어 신입단원은 자기 소개서와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 10권을 모두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고도 들었다. 극단 대표님께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기도 했지만, 그 대하 소설 안에 한국 역사가 함축되어 있으니 연극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라는 이유였다. 나는 단원만 된다면 삭발도 불사하고 모든 과제도 다 해내겠다는 패기로 차 있었다.


유자차 한 박스를 들고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유럽 어딘가, 아는 사람만 가는 골동품 가게 같은 사무실이었다. 연출님은 계시질 않았고 무대에서 뵈었던 배우 한 분이 계셨다. 아쉽게도 신입단원을 모집하고 있지 않으나 연출님께 말씀드려보고 연락을 준다고 하셨다. 내 인적 사항을 알려드리고 반쯤 빈 유자차를 도로 가방에 주섬주섬 담아 길을 되돌아왔다.



아쉽게도 극단에서 연락이 오진 않았다. 다시 찾아가볼까도 했지만 이미 움츠러든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때,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면 어땠을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작품에 대한 즐거운 고뇌를 하고 있었으려나? 어쨌든 지금의 머리와 참 잘 어울리는 날들을 보냈을 것 같다.


살다 보면 이렇게 아쉬운 순간들이 남겨진다. 조금만 더 했다면 달라졌을지 모르는 것, 혹은 선택하지 않은 것. 그런 것들에 붙들려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고는 했다. 현재를 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불현듯 깨어나는 정신이 그때의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나에게 말을 건다. 그동안 잘 견뎌왔다고.


갑자기 뭐야? 왜 이래?


타인에게만 전하던 안부와 격려를 나에게 하려고 하니 뭔가 오글거린다. 하지만 내게 안부를 물으며 나를 응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시금 말해 본다. 밖으로 흩어졌던 것들이 내 안으로 살며시 돌아오는 듯하다. 잘 살피고 잘 담아서 주위에 잘 나눠야겠다.



미용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목표는 이뤘다. 각성 효과 좋다. 이래서 삭발을 하나? 어딘가 가벼워진 것은 확실하다. 아니다, 오히려 단단해졌달까. 새해라서, 새해이기 때문에 만드는 새로운 마음 같은 것은 아니고, 그냥 때가 된 것 같다. 나 자신을 알아봐 줄 때.


어? 이것도 약간 오글거리는데?


어쨌든 내면을 잘 살피고 바탕을 잘 다지고 싶다는 거다. 또 도망가고 싶다며 투정을 부릴 테고, 달팽이집으로 숨어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걸어가 보겠습니다. 아름다운 순간을 향하여.



PS. 새해이니 새해 인사는 드려야겠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담으시고, 아름다운 순간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글/사진 황소윤

춤. 사진. 글. 로 대화하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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