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고 싶은데요 #5



책상에 비친 햇살에 커피를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햇살은 쨍쨍한데 마음 어딘가 찝찝함이 느껴진다. 오늘은 아아를 먹을까 뜨아를 먹을까? 커피도 준비됐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의자에 앉아본다. 커피향이 솔솔 공간을 채우더니 자꾸만 고막을 자극해 결국 쳇 베이커를 만나본다. 반주 하나 없이 그저 공간을 채우는 쳇 베이커의 목소리, 〈Blue Room〉. 눈을 감고, 혹은 눈이 감기며, 이런 향에는 역시 쳇 베이커라고 점점 그 안으로 빠져든다. 내 방이 블루룸이었으면. 쳇 베이커 노래만 1시간 넘게 들었다. 잠든 건 아니다. 내 눈앞에는 분명 하얀 것이 있었다. 허기가 진다. 밥을 챙겨 먹긴 귀찮고 과자 한 봉지를 뜯는다. 공간이 빈 것 같아 다른 플레이리스트를 열어본다. 더 좋은 음질로 들으면 좋겠다며 괜스레 스피커를 검색한다. 노래도 따라 부른다. 입은 참 잘도 움직여지는데 나의 손은 갈피를 못 잡는다. 나의 손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시작도 쉽고 한 번 쓰기 시작하면 금방 써 내려갔는데 지금은 너무 어렵게만 느껴진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간다. 글은 종이에 써야 제 맛인가, 시스템 종료 사이를 서성인다. 하얗게 펼쳐진 도화지 앞에서도 나의 손은 계속 방황한다.


글 쓰는 이들에게 새삼 존경심을 느낀다. 왜 나는 이렇게 쓰기가 어려워진 것일까? 몇 편이라 할 것도 없고 만족할 만한 그 무엇을 쓰지도 않았는데 무언가를 쓰는 데 강박이 느껴진다. '그래, 내가 전문 작가는 아니잖아? 너무 힘줄 필요 없어. 쓰고 싶은 걸 쓰면 돼. 너무 애쓰지 마!'라고 했다가, '전문 작가는 그럼 무언데? 내가 쓰고 싶은 게 뭔데? 나 혼자만 보는 일기는 아니잖아? 그래도 누군가가 보잖아!' 살짝 절망에 빠졌다가 다시금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다.


‘나, 너무 성취 중심적인 삶을 산 것 같아.’
‘뭔가 대단한 결과물이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아.’
그렇다, 나는 잘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이든 잘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선뜻 쓸 수가 없는 거다. 모든 일이 그렇다. 처음엔 잘 하다가도 문득 들어차는 이 잘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을 어렵게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도 그랬다. 더더더 잘하고 싶어지고, 책임감을 느끼고.



글을 쓸 때 항상 이런 전제가 존재한다. 인간 황소윤 말고 배우 황소윤으로서 쓸 수 있는 것. 그것이 무어냐 말이다. 이 연재의 시작은 어찌 됐든 배우가 중심에 있는 것인데 사담이나 나누기엔 뭔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배우로 있는 시간보다 인간으로 있는 시간이 더 많은걸.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지금만 그렇고 싶다. (근데 그걸 꼭 나눠서 생각해야 되는 건가.) 갑자기 스멀스멀 씁쓸함이 올라오지만, 나는 너무나 인간이다. 그러면 인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의 나를. 곧바로 인정할 수 없다. 이 또한 너무나 인간적이다.


내가 글쓰기의 어려움을 느낀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 일기 쓰기였다. 4학년 5반, 나의 담임선생님은 매일 일기를 검사했고 일기마저 수우미양가로 평가했다. 그것도 빨간색 색연필로. 하루는 일기를 쓰려는데 선생님은 왜 매일 수우미양가로 내 일기를 평가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에 일기 쓰기가 겁이 나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의 감정을 그대로 적었다. 한 다섯 줄 정도, 제목은 ‘오늘은 짜증나는 날’. H.O.T의 〈오늘도 짜증나는 날이네〉를 들어서 그런 건 아니다. 제목을 그렇게 쓰고 보니 감정이 글씨까지 짜증체로 만들었다. 나는 ‘양’을 받았고, 방과 후에 글씨 쓰기 연습을 했다. 솔직한 내 감정을 적은 대가는 혹독했다. 이제 글씨 잘 쓴다.



없는 걸 억지로 쓰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글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내 안에 무언가가 없는데 억지로 쓰이지는 않는다. 물론 점 하나, 쉼표 하나, 조사하나까지도 완벽하려고 예민하게 구는 성격 탓에 쓰다가 다시 보고 쓰다가 곱씹어 보고, 그러다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에너지가 소진돼 버리기도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대체 뭘까. 직면하는 것이다. 나의 내적 싸움을 눈 뜨고 바로 보는 것이다. 나를 직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글쓰기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게 좋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나와 직면하는 일이 사실 두렵지 않나. 두려워서 어렵지 않나. 글을 쓰려면 나를 뒤집어도 봤다가 이렇게 저렇게 헤쳐보기도 해야 한다. 마주하기 싫은 아빠의 잔소리 같기도 하다.



이런 두려움과 어려움이 있지만 분명 쓴다는 것은 수십 번씩 보고 수정하면서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엉망진창 쌓여있던 것들이 조금씩 가다듬어지는 과정이다. 그러면서 비워지기도 하고 반성을 하기도 하고 덕분에 힘이 나기도 한다. 이렇게 앉아있을 거면 공무원 준비 해 보는 거 어때, 하는 생각도 했다가 공무원 아무나 되는 줄 아니? 했다가, 딴 길로 빠지지 말고 얼른 끝내자는 생각이 겨우 앞장선다.


글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많은 것들이 변화할 것 같은 기대감에 갑자기 마음이 하늘로 솟구친다. 붕 뜬 마음은 아무래도 백신 때문인 것 같지만. 쓰다 보면 쉽게 쓰여지는 날이 있지 않을까, 나의 양손이 제대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시도해 보고 반복해 보고 절망도 해 보고 쓰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연기를 계속 해나갈 것이다. 언젠가 방황하지 않게 될 그날을 그리며, 찬바람에 튼 손등을 바라본다.





글/사진 황소윤

춤. 사진. 글. 로 대화하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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