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고 싶은데요]친구들아, 봄이다!

도망가고 싶은데요 #6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을 열심히 따라 부르다 그것이 나의 꿈이 되어버린,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진 우연한 사건. 기똥차게도 무대의 맛을 일찍 알아채 버린 나란 어린이, 멋있어.


이 멋진 어린이는 꾸준히 사람들 앞에 나선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그 따스한 온도에 취해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음을 직감한다.



‘이 뜨거움 뭐지?’


“불타오르네!”, 이것보단 “핫 뜨거뜨거 핫 뜨거뜨거 핫!” 이게 더 어울리려나? 확 달궈진 나를 위해 친구는 강판에 오이를 갈았다.


“오오 오이 마사지~ 아프리카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아 아 좋아 아 좋아.”


그 친구 마음씨가 참 좋았다. 그 고사리 손으로 오이를 갈아 내 얼굴에 올려주고는 잊지 못할 손맛 부침개를 준비했다. 아련하게 스치는 오이향과 이제 막 끓기 시작한 기름내. 누워서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도 참 좋았다. 오이의 수분이 다 날아갈 때쯤 고소한 부침개가 완성되고, 우리가 사랑한 S.E.S. 언니들의 노래를 아주 흥겹게 따라 불렀다. 하마터면 젓가락으로 장단도 맞출 뻔.


라디오 디제이와 게스트가 되기도 했다. 라면, 카세트테이프, 녹음 버튼, 딸깍. 국물 한 수저 가득 떠 시원하게 삼키고는 마무리는 언제나 김현주 언니의 “국물이 끝내 줘요!” 친구네서만 맛볼 수 있던 그 시원 달콤한 포도즙도 카세트에 녹음되었을까?


이제 할 일은 다했다 싶어 노곤노곤해진 나는 그대로 대자로 누워 잠을 청하고, 해가 자취를 감출 때쯤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갔다.



'네가 나와야지!'
‘탤런트 될 사람 여기 있다!’


노래, 춤, 연기. 내가 있는 이곳저곳이 무대가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한 일상의 나날이 솜사탕처럼 부푸는 동안 꿈은 늘 나와 함께였다. 어린 날의 패기로 제2의 보아가 되겠다며 SM에 오디션을 보았고, 기적을 바라며 박진영 아저씨 앞에서 ‘마법의 성’을 불러보기도 했다. 어쩌면 원더걸스가 되진 않았을까 싶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그날의 사이사이를 스쳐지나갔다.


“Dreams come true” 나를 지켜줄 것 같았던 꿈. 무대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거 같다던 나의 직감은 잠시 사그라들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나도 내 나이에 맞는 물결에 휩쓸렸다. 대학생이 되고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새로운 미래를 꿈꿨지만, 친구의 노트에 메시지를 남기고는 그곳을 떠났다.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은 꽤 더운 날이었다.



몇 해의 계절이 지났을까? 지나간 계절만큼 내 인생의 희로애락도 수북이 쌓였다. 그 무게에 조금 더 조금 더 깊어지고 있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세요?’


그날 생각이 난다. 그때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 세상에 있지 않을 때 그 누군가라도 ‘아, 이런 배우가 있었지’라고 떠올리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가슴에 남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고.


‘오? 꽤 진지했는데?’



그날의 나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다른 날의 나, 다른 날의 나로. 내가 딛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많은 날들의 나를 가슴에 품은 채 봄을 만끽하러 나선다.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의 설렘도.


잘 살아가고 있을 친구들에게.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어.
나의 마음이 닿기를.
보고 싶은 친구들아, 봄이다!





글/사진 황소윤

춤. 사진. 글. 로 대화하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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