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무게: 작가 노트][예술]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위하여

여백의 무게: 작가 노트 #7


 


얼마 전 이른 아침 장고항에서 철 조각들을 주우러 다니다가 쓰레기를 수거하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비록 거지 같은 몰골이었지만, 철 조각들로 작품을 만들 거란 말씀을 전하고 혹시 철물을 발견하거든 잘 보이는 곳에 놔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주로 플라스틱이나 비닐같이 눈에 잘 띄는 쓰레기를 줍던 할머니들은 나보다 빨리 해변을 훑으며 지나갔고, 지나는 길에 철물이 보이면 내가 볼 수 있도록 바위 위에 올려두고는 하셨다. 요즘은 물때가 바뀌어 늦은 아침에 철물을 수집하러 가는데, 나갈 때마다 할머니들이 잊지 않고 바위 위에 올려 두신 철물들을 발견한다. 가지런히 놓인 배려의 마음에 감동한다.


어제는 해물 채집할 때 한계선을 정해 아무 데나 들쑤시지 말라고 어촌계에서 계속 확성기로 주의를 시켰다. 근데 확성기를 든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고 저들은 조개 캐는 게 아니니 내버려두라고 한다.


저들이란 나와 딸을 말하는 거다. 



8살 된 딸이 방학을 맞아 당진에 내려와 계속 놀기만 하기에 어제는 일을 시켜 보았다. 근데 생각보다 철 조각을 잘 줍는다. 처음엔 뭐가 돌이고 쇠인지 구분하지 못해 내가 열 개 주울 때 한 개쯤 겨우 발견하더니 나중엔 익숙해져서 곧잘 줍는다. 게다가 쇠를 주울 때 가져가는 유일한 도구, 자석까지 빼앗아 가 알쏭달쏭한 조각들은 딸에게 확인받으러 가야 했다.


어느새 레지던시 기간도 절반이 지나갔다. 이제 슬슬 무언가 보여줘야 할 때가 다가온다.




Part 1.

해양 쓰레기들로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기후위기와 환경오염. 누구나 실감하는 이야기이고 흔한 주제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보여 레지던시 기간 동안 당진 바닷가에서 주은 쓰레기들로 환경에 대한 작업을 하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쇳조각 하나. 자갈 가득한 모래 해변에 마치 돌덩이인양 위장한 쇳덩이 하나가 나의 작업 방향을 바꿔놓았다. 쇠는 강하고 무겁고 오래간다는 편견이 한순간 무너졌다.


내가 처음 발견한 쇳조각은 배의 부속쯤 되어 보였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임에도 바다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쇠못으로 추측하는 그 물건에는 굴 껍데기와 따개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길쭉한 형상과 살짝 드러나는 쇠의 질감만이 이것이 철 조각임을 예상케 했다.



쇠가 맞나 싶어 양쪽을 거머쥐고 힘을 줬다. 손가락 두께의 쇳덩이가 너무 쉽게 뚝 부러져 버렸다. 부러진 단면의 질감이 나 쇠가 맞는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부러뜨린 쇳덩이를 해변에 던져두고 다른 쓰레기들을 찾다 보니 비슷한 쇳덩이가 또 보였다. 거기서 난파선이 썩어 분해라도 된 걸까 싶을 정도로 독특한 쇳덩이들을 여러 개 주웠다. 주운 쇳조각들을 해변에 늘어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쇠라는 것이 얼마나 가볍고 약하고 수명이 짧은가. 내가 주운 쇳덩이들은 아마도 만들어진 지 십수 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길어야 백 년.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돌덩이에 비하면 티끌처럼 가벼운 존재. 돌은 최소한 몇십만 몇백만 년에 걸쳐 침식과 퇴적을 거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존재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러하다. 기껏 수만 년밖에 안 된 가볍디가벼운 존재가 자신의 서식지 행성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지적능력이 뛰어나 서로 협력하고 노력하면 지구의 기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인류의 파멸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애만 강한 현생 인류는 공존의 길을 묘연하게 만든다.


바닷가에 버려진 쇠의 존재가 가볍고 약하고 짧듯이, 이대로 간다면 인간이 그러할 것이다.




Part 2.

나는 작품을 만들 때 꽤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일상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드로잉북이나 노트, 하다못해 핸드폰에라도 메모를 해두고, 나중에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구체화한다. 한 손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로 모형을 만들고 작업이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면 소품으로 구현한다. 소품으로 만든 작품이 썩 마음에 들거나 반대로 아쉬운 마음이 들면 대형 작업에 착수한다.


주로 구체적인 형상을 소조 작업으로 표현하기에 숙달된 기술과 시간 투자가 필요할 뿐, 직관이나 감각이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다. 그런데 이번 작업은 다르다. 처음부터 어떤 형상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없었다. 그럴듯한 플라스틱 쓰레기나 스티로폼 덩어리를 줍는다면 동물의 형상 따위를 만들기는 수월하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철 조각에 꽂히는 바람에 그나마 어렴풋하던 계획마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채집한 철 조각들에는 굴 껍데기나 따개비 따위가 잔뜩 붙어있고 개흙에 여러 겹으로 코팅되어 있어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 용접을 하려면 철 조각에 붙은 온갖 것들을 그라인더로 갈아서 제거해야 하는데, 정작 나는 철 조각에 붙은 그 자연물들의 형상에 끌렸다.


철 조각 하나하나를 요리조리 살피며 어떤 모습으로 조합할 것인지를 그려 보고, 최소한의 것들만 그라인더로 털어내며 전기가 흐르도록 철을 드러내어 용접을 시작한다. 그런데 바닷속에서 부식되며 물성이 바뀌었는지, 용접이 정말 더럽게 안 된다. 게다가 나는 용접을 그리 잘하지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몇몇 작업이라 불릴 만한 것들을 조합해서 만들었다. 나도 그걸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쇳조각 하나하나를 그럴듯하게 조합하며 이루어진 감각과 직관의 결과물이다. 간조에 맞추어 갯벌에 나가 쇳조각을 줍고 왜인지 모를 것들을 만들다가 하나쯤은 구체적 형상을 띈 무엇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고, 그렇게 시작한 작업이 평소에 즐겨 만들던 명상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

생각을 넘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상징.

작품의 제목은 ‘OO에 대한 생각’.


OO에 들어갈 단어는 보는 이에게 열어두자. 각각의 소품들에도 제목을 붙일 것이고, 작업이 되지 못한 철 조각 오브제들도 바닥에 늘어놓고 무언가를 만들 계획이다.


‘아직 작업이 되지 못한 것들’.


재빨리 계획을 세우며 작업을 구체화하는 것을 보면 줄곧 감각과 직관에만 의지하기엔 나는 너무 가볍고 약하고 수명이 짧은 불안한 존재인가 보다.





글 안경진

조각가. 동국대학교 미술학부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조소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현재 그림자와 여백을 통해 하나의 형태에서 여러 가지 형상이 빚어지는 조각을 만들고 있다. 2004년 첫 번째 개인전 〈여행〉 이후 아홉 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백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저서로 『여백의 무게』, 공저로 『그럴 수밖에 없는 그릴 수밖에 없는』을 펴냈다.

인스타그램 @artin_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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