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그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처서(處暑)’. 이날이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차차 누그러져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데 올해 여름은 폭염과 장마의 행진으로 정신을 차릴 틈이 없다.
여름 장마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눅눅하게 하고, 찌는 듯한 더위는 상쾌한 기분을 금세 앗아간다. 하지만 쏟아지는 햇살 속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우리는 살며시 미소 짓게 되고 귤빛으로 물든 저녁 하늘에 어느덧 아이처럼 좋아하지 않는가.
(허은실 시인이 제주 사람들로부터 ‘귤빛 환대’를 받았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날부터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빛은 ‘귤빛’이 되어버렸다.)
여름의 매력은 그런 것 같다. 힘이 빠지다가 차오르는 ‘자그마한 기적’을 자주 마주하는 것. 몸 안의 열기와 숨길 수 없는 생기로 살아있음을 매 순간 느끼게 하는 것.

이 계절의 끝자락에 소개하고 싶은 책과 음료는 따스하게 손 내미는 백수린 작가의 소설 『눈부신 안부』와 사소한 일상을 돌아볼 수 있는 김소연 시인의 산문 『시옷의 세계』, 정혜윤 작가의 에세이 『아무튼 메모』, 그리고 ‘피치 우롱 선티’와 ‘복숭아 아이스티’이다.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는 유년에 상실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 성인이 되어 과거의 어린 나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대학동창 우재와 재회하는 소설의 도입부는 겨울을 닮은 주인공 해미를 서서히 녹여준다.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
이모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우재를 통해 과거를 반추하며 이모의 첫사랑 찾기를 시작하고, 지난한 과정에서 모두가 서투를 수밖에 없던 것을 이해하고 비로소 자신도 인정하게 된다. 여기서 어리고 상처받은 해미를 환대하는 선자 이모와 독일에서 만난 파병 간호사들, 그리고 친구들, 모든 등장인물이 약하고 보호받고 싶었던 어린 소녀를 품어주고 반겨주는 다정한 존재들이다.

파란 표지가 여름과 어울리는 이 책을 읽으며, 해 질 무렵 바라본 강가의 금귤빛 윤슬이 떠올랐다. 따뜻하면서 아련하고, 일렁이면서도 잔잔한 물결에 비친 늦은 오후의 여름빛이 한결 유연해 보였다. 함께 곁들인 음료는 피치 우롱 선티(Sun tea)인데 오랜 시간 추출한 차에 과일과 허브를 넣어 상큼하고 향긋한 맛을 느낄 수 있다.


* * *
언제부터였을까. 김소연 시인이 내가 운영하는 작은 책방에 산책하다 우연히 들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아마도 작가의 한 산문집에서 서점이 위치한 성산동을 산책하는 이야기를 보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문을 닫는 시점까지 현실이 되진 못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작가를 자주 생각하니 내적 친밀감이 쌓여 더욱 특별해진 기분이었다. 유난히 이 작가의 책을 주변에 많이 추천했으니 말이다.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는 머리말 「사귐」에서 시작해 「사라짐」, 「사소한 신비」, 「산책」 등을 거쳐 「씩씩하게」까지, 35개의 낱말을 국어사전에 실린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시인의 언어로 표현된 산문집을 읽다 보면 우리가 놓친 시선과 삶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음 깊이 넣어둔 그리움이 어느새 비집고 나와 연필을 들고 싶게 만들고.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와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
그럴 땐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를 읽으며 일상 속 사소한 일부터 적어보는 건 어떨까? ‘사소한 일’이란 말을 언젠가는 ‘자그마한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것이다.
'자그마한 기적'은 매일 우리의 식탁에서도 마주할 수 있다. 길었던 장마에도 기적처럼 열매들이 열렸으니 말이다. 달콤한 복숭아에 홍차를 냉침해서 만든 ‘복숭아 아이스티’는 여름의 맛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끝으로, 『눈부신 안부』의 책 속 문장으로 인사를 하려 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 찬란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227쪽)”
다정한 안부가 여러분에 가 닿아 눈부시게 반짝이기를. 올해의 여름도 부디 안녕하기를.


책 소개 이유리

성산동에서 책방 '그렇게 책이 된다'를 운영했습니다.
http://instagram.com/becoming_books
음료 레시피/사진 반테이블
https://bantable.co.kr/
더위가 그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처서(處暑)’. 이날이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차차 누그러져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데 올해 여름은 폭염과 장마의 행진으로 정신을 차릴 틈이 없다.
여름 장마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눅눅하게 하고, 찌는 듯한 더위는 상쾌한 기분을 금세 앗아간다. 하지만 쏟아지는 햇살 속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우리는 살며시 미소 짓게 되고 귤빛으로 물든 저녁 하늘에 어느덧 아이처럼 좋아하지 않는가.
(허은실 시인이 제주 사람들로부터 ‘귤빛 환대’를 받았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날부터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빛은 ‘귤빛’이 되어버렸다.)
여름의 매력은 그런 것 같다. 힘이 빠지다가 차오르는 ‘자그마한 기적’을 자주 마주하는 것. 몸 안의 열기와 숨길 수 없는 생기로 살아있음을 매 순간 느끼게 하는 것.
이 계절의 끝자락에 소개하고 싶은 책과 음료는 따스하게 손 내미는 백수린 작가의 소설 『눈부신 안부』와 사소한 일상을 돌아볼 수 있는 김소연 시인의 산문 『시옷의 세계』, 정혜윤 작가의 에세이 『아무튼 메모』, 그리고 ‘피치 우롱 선티’와 ‘복숭아 아이스티’이다.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는 유년에 상실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 성인이 되어 과거의 어린 나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대학동창 우재와 재회하는 소설의 도입부는 겨울을 닮은 주인공 해미를 서서히 녹여준다.
이모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우재를 통해 과거를 반추하며 이모의 첫사랑 찾기를 시작하고, 지난한 과정에서 모두가 서투를 수밖에 없던 것을 이해하고 비로소 자신도 인정하게 된다. 여기서 어리고 상처받은 해미를 환대하는 선자 이모와 독일에서 만난 파병 간호사들, 그리고 친구들, 모든 등장인물이 약하고 보호받고 싶었던 어린 소녀를 품어주고 반겨주는 다정한 존재들이다.
파란 표지가 여름과 어울리는 이 책을 읽으며, 해 질 무렵 바라본 강가의 금귤빛 윤슬이 떠올랐다. 따뜻하면서 아련하고, 일렁이면서도 잔잔한 물결에 비친 늦은 오후의 여름빛이 한결 유연해 보였다. 함께 곁들인 음료는 피치 우롱 선티(Sun tea)인데 오랜 시간 추출한 차에 과일과 허브를 넣어 상큼하고 향긋한 맛을 느낄 수 있다.
* * *
언제부터였을까. 김소연 시인이 내가 운영하는 작은 책방에 산책하다 우연히 들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아마도 작가의 한 산문집에서 서점이 위치한 성산동을 산책하는 이야기를 보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문을 닫는 시점까지 현실이 되진 못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작가를 자주 생각하니 내적 친밀감이 쌓여 더욱 특별해진 기분이었다. 유난히 이 작가의 책을 주변에 많이 추천했으니 말이다.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는 머리말 「사귐」에서 시작해 「사라짐」, 「사소한 신비」, 「산책」 등을 거쳐 「씩씩하게」까지, 35개의 낱말을 국어사전에 실린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시인의 언어로 표현된 산문집을 읽다 보면 우리가 놓친 시선과 삶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음 깊이 넣어둔 그리움이 어느새 비집고 나와 연필을 들고 싶게 만들고.
그럴 땐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를 읽으며 일상 속 사소한 일부터 적어보는 건 어떨까? ‘사소한 일’이란 말을 언젠가는 ‘자그마한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것이다.
'자그마한 기적'은 매일 우리의 식탁에서도 마주할 수 있다. 길었던 장마에도 기적처럼 열매들이 열렸으니 말이다. 달콤한 복숭아에 홍차를 냉침해서 만든 ‘복숭아 아이스티’는 여름의 맛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끝으로, 『눈부신 안부』의 책 속 문장으로 인사를 하려 한다.
다정한 안부가 여러분에 가 닿아 눈부시게 반짝이기를. 올해의 여름도 부디 안녕하기를.
책 소개 이유리
성산동에서 책방 '그렇게 책이 된다'를 운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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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 레시피/사진 반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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