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플레이]아웃풋 이미지에 대하여, 에드가 윈터 그룹 〈Autumn〉

랜덤 플레이: 오늘의 선곡 #1



그때의 역사를 찾아본다. 노태우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했고, 남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 나라 밖에선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유고와 크로아티아가 충돌했고, 아르메니아와 타지키스탄이 독립국이 되었다. 격동의 1991년의 9월.


나의 개인사는 공부나 연애 같은 탄력 같은 건 붙어본 적 없이 대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고, 사회의식에 눈을 떠 학생운동에 참여한다든가 하는 일도 없는, 남들에겐 아마도 눈에 띄지 않는 무취(無臭)의 존재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무취 이면에 제법 들끓는 자의식과 호기심이 있었다고 한들 격동의 1991년 9월에 누가 신경이나 써 줬을까? 나부터가 세상에 대한 크나큰 두려움으로 소심하게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그 두렵고도 궁금했던 세상에서 결국엔 대단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나름대로 옹골찬 희망은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완전하게 내려앉았던 가계 덕에 다가올 시간은 거의 내 힘만으로 챙겨야 했지만, 잿빛 현실을 방어기제를 발동해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다.


1991년 9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물론, 학교생활에 무감각해지기로, 아니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로 했다. 군 입대. 사회를 등졌다 해서 즐겁게 군대를 갈 수 있을까? 입대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해 초 발표된 김광석의 2집과 신해철 《Myself》 앨범이 더욱 각별해졌고, 입대일 즈음해서는 당시 국민가요 격으로 유행했던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를 들으며 기분이 더 착잡해졌다. 



춘천의 한 보충대에서 1차 분류가 끝난 후, 원주에 있는 어느 육군 사단 신병훈련교육소로 들어갔다. 여름 더위가 유독 길게 이어졌던 9월, 시쳇말로 ‘사제물’을 쏙 빼고 2년 반 가량 군 생활을 보낼 수 있는 6주간의 집중 기본 훈련 기간에 맞은 추석. 명절 ‘대통령 하사품’이라며 특식으로 아이스커피가 나왔다. 인스턴트 커피가루를 큰 얼음 덩어리가 가득한 대야에다 한 가득 부어 만든 그 달고 찬 커피를 플라스틱 바가지에 떠서 나눠주었다. 


“원하시는 대로 더 드릴 테니까 많이들 드세요”


입영 후 거의 한 달여 만에 맛보는 커피, 바가지를 들고 서 있는 장교 부인들의 자애로움, 대여섯 잔을 거푸 마셨던 건 아마도 고마움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카페인 섭취로 한껏 기분이 좋아진 동기들과 연병장 계단에 앉았다. 훈련이 끝나면 어떤 부대에 배치될까? 밖에 두고 온 여자친구 이야기, 내무반으로 돌아가기 전 피우던 마지막 담배 한 대, 저 멀리 보이는 치악산, 연병장 위로 흐르던 푸른 하늘, 작은 솜뭉치 같은 구름, 그 하늘을 배경으로 문득 떠오르는 노래. 에드가 윈터 그룹의 〈Autumn〉이 머릿속에서 플레이된다. 친구가 녹음해 준 믹스테이프에 담겨 있던 곡.


가을이여, 여름보다 더 차가워진 바람이 부네.
가을이여, 내 사랑은 다른 이와 함께 떠나갔네.
나는 이제 내게서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가을에 이곳 뉴잉글랜드에 머물 것 같다네.



미국 텍사스 출신 뮤지션 에드가 윈터(Edgar Winter)가 1972년에 발표한 록 앨범 《They Only Come Out at Night》에 수록된 포크 발라드 곡이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알비노 증후군의 암살자 폴 베타니와 흡사한 금발에 새하얀 피부를 한 백인 남성 에드가 윈터의 벗은 상반신 사진이 커버에 실려 있다. 〈Frankenstein〉이나 〈Free Ride〉 같은 곡들이 인기를 끌었다. 〈Autumn〉은 이를테면, 블랙 사바스의 〈Changes〉나 엘리스 쿠퍼의 〈You and Me〉 같은 마초 대마왕 외양의 록커들이 가끔씩 뜬금포로 내놓는 의외의 발라드 계보를 잇는 곡이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거칠게 보여도 말이지, 마음 한 편에는 이런 보석 같은 순정과 감성이 있단 말이야.” 하고 툭 던지는 듯한 느낌의 발라드. 



원주 변두리에서 맞은 가을, 연병장에서 올려다 본 하늘, 72년에 세상에 발표된 가을 노래. 그것이 내게 어떤 ‘아웃풋 이미지(Output Image)’로 작용했나 보다. 하던 일의 최종 결과물, 또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난 뒤에 벌어질 수 있는 결말 같은 것. 입대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뿐인데, 어쩐지 막연했던 군 생활에 대한 두려움도 걷히면서 언젠가 이곳을 나가게 될 땐 모든 게 잘 되어가지 않을까, 뜬금없는 희망 한 자락이 스쳐갔다. 그 한 자락 희망, 아직도 생생하다. 


실연에 상심한 뉴잉글랜드에 거주하는 한 남성이 멜랑콜리한 심정을 노래한다. 내 기억만큼 랜덤으로 떠오른 선곡, 하드록 천재의 뜬금포 발라드. 그것은 다가올 시간을 오로지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던 무취, 소심한 소년에게 툭 던져진 단서였다. 두려워하지 말자, 군생활도, 학교도, 사회도. 


〈Autumn〉의 러닝타임은 3분. 각별하고도 운 좋은 인생의 단서를 얻기에 넘치고도 충분한 시간이다.





글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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