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고 싶은데요 #2



코로나 이후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마지막 여행이 어디였는지조차 까마득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조금 더 많이 여행이 그립고 어디든 간절히 떠나고 싶다. 그저 상상밖에 할 수 없다는 아쉬움에 복받칠 때면 지난 여행을 들춰보곤 한다.


나의 첫 해외여행은 유럽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무용을 배우고 있었는데, 같이 배우던 친구 하나가 아이디어를 내 ‘장단 프로젝트’라는 팀을 만들어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무용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만든, 파리 테러를 추모하는 ‘pray for paris’라는 공연이었다. 공식적인 초청 공연은 아니었지만, 해외 페스티벌에 나간다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지금껏 줄곧 극장 무대만 바라보는 배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공연을 마친 후 팀은 각자의 여행길로 떠나갔다. 나는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을 거쳐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는 일정을 짰다. 32일간의 여행은 마치 긴 꿈을 꾸는 듯한, 환상 속에 있는 듯한, 현실 걱정은 전혀 없고, 당장 눈앞에 나타난 것들에 환호하는 달콤한 날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에펠탑이었는데, 처음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도 에펠탑이었다. 현실감이 없어서였는지 사진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 사실 두 번 다 별 감흥은 없었다.


‘아, 이게 에펠탑이구나! 아!’



마지막 밤 에펠탑은 왠지 쓸쓸하기도 했다. 이제 남은 일정은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으니. 지하철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안내 방송이 몇 번 나왔지만 마담, 무슈밖에 못 알아들었다. 승강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갔지만, 심상찮았지만, 역무원이 내게 다가올 때까지 가만 서 있었다. 마담, 하고 긴 이야기를 했지만, 역시 마담밖에 못 알아들었다.


열두 시가 한참 넘었다. 역 밖을 나서며 어쩌지,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 해 볼까 싶다가도 수줍은 소녀가 불쑥 튀어나와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못했다. 지하철에서 봤던 인상 좋은 커플에게 다가가 본다. 혹시 파리 북역으로 가는 버스가 있을까요? 음, 나도 그쪽으로 가는 버스를 찾고 있는데, 아무래도 다 끊긴 것 같아. 택시를 타야 할 것 같은데? 프랑스 여자의 말이었다. 아 그게, 내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거든. 그래서 아까 돈을 다 써버렸어. (신나게 사 먹었지.) 아 그래? 우리도 야간 버스를 찾고 있는데 아무래도 여기는 다 끊긴 것 같고 다른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갈래?


끄덕끄덕. 나는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몇 시가 됐는지도 모르게 걷고 또 걸었다. 개선문을 지나 샹젤리제거리.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하며 에클레어 먹었던 그 거리가 맞는가. 그나저나 둘은 정말 커플인가? 포토그래퍼라는 프랑스 여자가 그냥 친구라고 했다. 가구 디자이너라는 프랑스 남자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서울도 지하철이 마음대로 운행을 중단하는 일 있어? 파리는 정말이지.


저기 버스다! 프랑스 남자의 첫 마디. 우리는 버스를 향해 뛰었다. 프랑스 여자가 기사에게 내가 요금을 낼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을 전해 주었고, 기사는 나를 그냥 태워주었다. 메르시.


근데 어떡하지? 우리는 너보다 먼저 내려. 괜찮아, 잘 내릴 수 있을 거야. 이때 계시처럼 프랑스 아주머니가 등장한다. 그리고 프랑스 여자에게 내가 파리 북역에 내릴 수 있도록 인계 받는다. 걱정 마, 내가 알려줄게. 메르시, 메르시.


드디어 파리 북역이다. 와, 정말 암흑이네? 여기서는 어떻게 가야 하지? 버스에서 같이 내린 인상 좋아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간다. 내가 파리 제너레이터 숙소에 가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프랑스 남자는 내 핸드폰을 달라 한다. 그런데 나는 이곳 유심 칩을 사서 끼지 않았다. 지도 앱을 열어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기 핸드폰으로 내 숙소를 검색한다. 그리고 말없이 앞장선다. 메르시, 메르시, 메르시.


일본인이야? 아니! 나 한국인. 근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 위험한 곳인데. 파리 북역은 우범지대였나 보다. 좀 으스스한 구석이 있었다. 무시무시한 사람들도 보이고. 저기 봐, 저렇게 배드 가이즈가 많은데! 그런데 말이야, 내가 배드 가이면 어쩌려고 그래? 휴먼 다큐에서 스릴러로 바뀌려는 것인가? 약간 당황했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은 듯이, 너는 절대 아니라고 말했다.


잠시 뒤 숙소 앞에 도착했다. 프랑스 남자가 굿바이 키스를 날렸다. 방에 들어오니 새벽 세시. 에펠탑을 마지막으로 담겠다는 의지 때문에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프랑스 여자, 아줌마, 남자의 무난한 바통 터치로 무사히 숙소에도 오고 한국에도 잘 왔다. 인스타 아이디라든가, 메일 주소라도 물어 봤어야 하는데, 사진이라도 같이 찍을 걸. 휴대폰 사진첩을 뒤적이다 후회를 한다.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에 있긴 한데, 잘 살고 있겠지? 마음 전할 길은 없지만, 이 엄혹한 시기 부디 건강하기를, 다시 한 번, 메르시 보꾸.





글/사진 황소윤

춤. 사진. 글. 로 대화하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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