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무게: 작가 노트]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쉽게 보이지 않아

여백의 무게: 작가 노트 #4



조각가와 음악가, 글 쓰는 사람이 모여서 작업 이야기를 나누고 인스타그램 라이브와 유튜브 등으로 송출해 보는 건 어떨까? 브릭스 매거진 이주호 편집장, 싱어송라이터 더준수, 그리고 조각가인 나는 지난 해 ‘우리는 비틀즈가 아니잖아’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뭐 거창하게 결성이랄 것도 없는, 그저 장르가 다른 작가들끼리 가끔씩 만나서 뭔가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겹쳤던 것이다. 작업이 잘 안 되거나 작품이 흡족하지 않을 때 주호가 종종 하는 말이 ‘내가 비틀즈는 아니잖아’다. 라이브에서 나눌 이야기 주제는 ‘밤은 또 우리에게’이다. 이 모임을 만든 주호의 제안인데, 제목만 정하고 나머지는 생각을 안 해봤다고 한다.



밤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초저녁에 잠들어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작업을 준비하는 하루를 지향하지만,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아이와 아내 덕에 늦게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밤이 반복되고 있다. 그래도 밤은 나에게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고, 이런 이미지가 각인된 것도 2년이 넘었다. 매일 하루를 열면서 나의 존재에 대하여 되묻고 무엇을 할지 숙고하며, 삶의 의미를 캐묻는다. 밤은 나에게 숭고한 시작이다.


인스타 라이브 방송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준비한 이야기를 나눴고, 한 번씩 일상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벌어지는 것도 즐겁다. 주호 편집장은 ‘밤은 또 우리에게’라는 주제를 맥주, 인식, 해방 같은 키워드로 좁혀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도 이 주제로 작업을 시작해 봐야겠다. 밤은 내게 하루의 시작을 의미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고요하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떠오르는 작품을 만들어 글과 조각을 함께 전시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최근 만들었던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의 모습이 이 주제에 맞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한쪽 팔을 잃어가며 명상하는 사람의 모습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사라지는 사람. 지상의 몸은 점점 사라져 가지만 궁극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변화.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그럴 때가 많다. ‘밤은 또 우리에게’라는 주제를 그냥 떠올렸듯, 나도 그냥 떠올라서 만들고, 다 완성한 후 한참 지나서 그걸 왜 만들었는지 설명이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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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주호가 쓴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라는 자전적 소설(?), 에세이를 읽었고, 그 소설에 나오는 ‘메리레인’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우비를 입은 아이가 암바사를 채운 종이컵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아이의 그림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메리레인이 진짜 인물인지, 허구의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전화로 물어보기도 했지만, 정확한 대답을 안 해준다. 그 아이는 소설 속 주인공 화자를 상징하고, 화자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러나 매우 무력한 존재이다. 비 오는 날이면 가장 좋아하는 우비를 입고 당구장 앞에 서 있던 그 아이는 지금쯤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결국 글을 쓴 주호의 모습을 비출 수밖에 없다.



메리레인. 눈 내리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메리 크리스마스’는 있어도 6월 말 장마를 좋아하는 이를 위한 ‘메리 레인’은 없었다. 주인공은 무료하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고 그 독백들이 나의 20대 이야기가 되어 귀에 쏙쏙 박힌다. 이럴 땐 내가 글을 좀 잘 써서 홍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나는 조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니 작품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황학동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지만, 도시가 아닌 것 같은 정취가 짙게 밴 곳이다. 오래된 동네가 늘 그렇듯 뒤죽박죽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와 규칙이 정갈하다. 세상은 그런 낡은 풍경을 견디지 못해 송두리째 허물고 높은 빌딩으로 담을 세워 옛것과의 조화를 부정한다. 신구의 조화가 갈등 요소를 내재한 값비싼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그리 쉽게 갈아엎는지 모르지만, 예술가는 오래된 기억을 머금고 있는 동네의 풍경을 붙잡아 선으로 기록한다. 곧 사라질지 모를 허물어져 가는 것들을 포착하고 마음에 새기는 이런 시도가, 너무 익숙하여 쉽게 간과하고 지나치는, 조금 사소하고 헛돼 보이는 것들에 잠시 애정 어린 시선을 던지게 할 수 있다면, 사라지고 나면 그리워할 기억이나마 한 조각 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은 언젠가 옛것이 된다. 사물도 풍경도 사람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모든 것들이 머지않아 옛것이 된다. 옛것이 되어서도 우리의 아이들과 오래된 거리를 산책하며, 낮의 분주함과 밤의 고요를 함께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요즘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생각들, 그것이 어떻게 내 삶에 작용하고 표출되고 있는지, 나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것이 나를 움츠리게 하거나 두렵게 만드는지, 또 어떤 일이 나를 설레게 만드는지. 내 삶의 화두는 무엇인지, 내가 왜 이곳에 머무는지,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삶을 이끄는 것은 의지라고 생각한다. 주어지는 대로, 여건 닿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나의 삶을 바꾸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연다고 생각한다. 그냥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 내게 주어진 삶의 방향을 어떤 의지를 갖고 꾸려갈 것인지, 그런 것에 대한 각성. 머리로만 떠오르는 각성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서게 만드는 의지.


내가 무뎌지는 만큼 세상에 놀라운 것도, 신기한 일도, 아름다운 것도 없어진다. 나는 나의 삶이 무뎌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래야 작품이 떠오른다. 작품 <메리레인>과 황학동에 설치한 메리레인이 세상에 가볍게 스며들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쉽게 보이지 않아.”


황학동 메리레인 작품의 이름이다. 비옷 입은 아이는 그림으로 그렸고, 황학동에 맞게 숟가락을 모아 학 오브제를 만들었다. 밤이 되어 가로등이 켜지면 학은 어른의 얼굴이 되어 아이와 마주본다. 아이의 말풍선에는 ‘정말 소중한 것들은 늘 곁에 있지만, 쉽게 잊곤 하지’라고 써 넣었다. 그림자와 여백, 조각으로 구성되는 내 작업에 관한 궁극적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의미 있는 순간을 만난다거나 어떤 사건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내 삶과 동떨어진 어딘가에서 찾는 게 아니라 살면서 마주하는 순간순간에 달려있다.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이러기도 쉽지 않다 싶을 정도로 일이 잘 되었다. 이 작업으로 우리가 얻은 소득은 없지만, 다음 작품의 씨앗을 뿌릴 토양이 한 결 비옥해진 것 같다.




글 안경진

조각가. 동국대학교 미술학부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조소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현재 그림자와 여백을 통해 하나의 형태에서 여러 가지 형상이 빚어지는 조각을 만들고 있다. 2004년 첫 번째 개인전 〈여행〉 이후 아홉 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백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저서로 『여백의 무게』, 공저로 『그럴 수밖에 없는 그릴 수밖에 없는』을 펴냈다.

인스타그램 @artin_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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