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특집][여행] 벚꽃 피는 계절에 도쿄 #1

봄, 그 한 마디에 나는

봄. 나는 이 한 음절만으로 당장에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시작하는 단계에 서 있는 기분, 한 해를 뭔가 잘 살아보고 싶다는 다짐, '좀 더 걸어보자' 혹은 '창문 열어 바람 통하게 하자'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시기. 지긋이 바라보는 느낌까지 든다. 봄을 바라 봄, 봄을 지켜 봄, 봄을 봄. 봄 봄.


목련, 매화, 개나리 그리고 벚꽃. 식물에 무지한 내가 겨우 몇 외우고 있는 꽃 이름 대부분은 봄에 만개하는 것들이다. "내년엔 벚꽃 구경 제대로 해야지"라는 다짐을 올해는 하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올해' 벚꽃 구경 제대로 해보리라. 지금 회사에서 만 10년을 꼬박 일한 대가로 특별 휴가와 소정의 휴가비가 주어졌고, 여행지는 쉽게 결정됐다. 3월 말, 벚꽃이 흐드러진 도쿄로 가자.


이노카시라공원역



비 오는 도쿄

6년 만에 다시 온 도쿄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입국 수속을 빠르게 받고 짐을 찾았다. 한국에서 미리 일본 교통카드인 스이카(Suica)를 애플 페이에 등록해 놓았던 참. 화면이 켜지지 않은 아이폰을 개찰구 단말기 위에 가져다 댔더니 자동으로 스이카 결제가 완료되고 문이 열렸다. 플랫폼 곳곳에 여행객들의 질문을 받는 직원이나 열차가 들어올 때 호루라기를 불며 안전을 주의하는 역무원은 여전했지만, 개찰구 앞에서 가방을 더듬어 지갑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6년의 간극이었다.


도심을 여행지로 가장 볼 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만든 건물, 사람이 밝혀 놓은 불빛,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높은 빌딩 숲의 롯폰기 미드타운의 밤. 미드타운 초입의 조각 〈BLOOM〉을 시작으로 히노키초 공원까지 이어지는 도로 양쪽으로 만개한 벚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꽃잎이 막 튀긴 팝콘 같다. 늘어진 가지가 눈앞까지 내려와 있어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육교에 올라 도로 양 끝을 사진에 함께 담기도 하고 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가 온통 여기에 있다.


미드타운의 벚꽃



이제 여행이구나

여행이구나 싶을 때가 이렇다. 출근을 위해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무리를 나 홀로 거슬러 걸음 할 때. 번화한 롯폰기역 출구 건너편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오자 금세 고요하다. 빗방울 떨어지는 아침, 큰 벚나무 하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아래 블루보틀 카페가 있었다. 가로로 긴 테이블 가운데엔 벚꽃 가지를 꺾어 담은 커다란 화병이 두 개 놓여 있었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아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다. 노트북으로 업무하는 사람, 엄마와 식사하는 사람, 연인과 함께 온 사람 사이 혼자 온 여행객 하나.


롯폰기 블루보틀에서


하타가야, 요요기 우에하라, 요요기 코엔 역으로 이어지는 동네는 골목골목 예쁜 카페나 상점, 바가 많아 현지인뿐 아니라 관광객도 즐겨 찾는 곳이다. 요요기 코엔 출구로 나와 조금 걸으니 이른 시간부터 야외 좌석까지 꽉 찬 푸글렌 카페가 보였다. 예쁘게 세팅한 커피를 카페 외관과 함께 사진에 담으려 이렇게 저렇게 구도를 잡는, 아마도 여행객일 사람들의 곁을 지나며 이럴 때 여행이 좋다, 싶었다. 조금씩 부지런히 조금씩 서둘러 조금씩 행복해지려는 것. 


점심은 셰프 할아버지가 튀김을 튀기고 부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서빙을 하는 아주 작은 튀김집, 덴푸라 미야카와에서 먹었다. 메뉴는 덴푸라 정식, 텐동 딱 둘뿐.  튀김을 하나씩 바로바로 튀겨 접시에 놓아주는 덴푸라 정식은 마음 바쁜 여행객에게는 호사. 튀김이 한 그릇에 나오는 텐동으로 주문했다. 하얀 셰프 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무뚝뚝한 얼굴로 재료를 튀기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마지막 밥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오모테산도 골목 튀김집 '덴푸라 미야카와'


메구로 강을 끼고 벚꽃이 양 옆으로 길게 피어있는 나카메구로로 향했다. 가까운 곳이라 지하철로 금세 도착해 출구로 나섰는데, 인파가 벌써부터 장난이 아니다. 월요일이니 좀 낫겠다 싶었는데 도쿄도에만 천 사백만 명이 살고 있는 걸 자꾸 잊어먹는다. 역 출구에서부터 교통 경찰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동선을 정리하고 있었다. 벚꽃 반, 사람 반. 메구로 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다리마다 벚꽃을 구경하는 사람과 푯말을 들고 통제를 하는 경찰관들이 서 있었다. 인파에 비해 보행이 어렵다고 느껴지지는 않는 정도. 이 정도만 되었어도, 적어도 한 방향으로 몰리게 하지만 않았어도, 란 생각이 불쑥 인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누웠는데 눈앞의 도쿄 타워 색깔이 달라졌다. 첨탑은 그대로 주황색인데 몸통이 보라색이고 동그란 불빛이 점묘화 그림처럼 간격을 두고 밝다. 검색을 해보니 오늘은 '인피니티 다이아몬드 베일'이라는 이름의 라이트 업이 있는 날이었다. 미리 알았으면 이렇게 깜짝 즐겁지 않았을 거다. 보라색에 의미 부여하는 사람에게 특히 더욱더.


보라색 도쿄타워



기치조지의 4945847183번째 벚나무

일본 드라마 〈내가 연애할 수 없는 이유〉에선 여자 주인공이 데이트를 기치조지에서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굳이 기치조지란 지명을 꼭 집어 말한 덕에 아주 오래전 본 드라마인데도 그 대사가 아직 기억에 남았다. 기치조지는 일본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동네로 자주 언급될 정도로 예쁘고 스타일리시하며 아기자기한 곳이다. 생활용품 파는 작은 가게들과 카페, 한 집 건너 있는 카레 집, 옷가게와 빈티지 가게가 자주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를 건너다보게 한다. 


이중 제일 좋아하는 곳은 작은 공원을 향해 너른 창이 있는 마가렛 호월 카페. 간단히 식사하는 사람들 틈에서 하프 보틀 스파클링 와인을 시켰다. 작은 공원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건너편 빵집에 들러 빵을 한 봉지씩 사 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 빵집이 주민들이 찾는 진짜 맛집이구나. 구글 지도에 꾹 저장했다. 


키치죠지 마가렛 호월 카페


기치조지를 살고 싶은 동네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아마도 이노카시라 공원일 것이다. 이노카시라 호수를 품고 있는 이 공원은 역시 벚꽃 피는 봄에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려 물기를 머금은 꽃잎이 바닥에 떨어져 질척거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씩 짝지어 보트에 올라타 노 젓는 이 특유의 호젓한 분위기는 그래도 봄의 멋이다. 같은 공간, 같은 거리에 있어도 벚꽃이 피는 속도는 나무마다 다르다. 초록 잎으로 갈아입은 나무와 벚꽃만으로 생생한 나무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다 자기만의 때가 있는 법. 그렇다면 나는 대부분의 벚꽃이 피어날 때 같이 피어나 다수로 묻어가는 것이 편할 4945847183번째의 벚나무.


벚꽃 피는 계절에 도쿄 #2 읽기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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