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in there #9
홍콩을 간다고 하자 지인들의 반응은 엇비슷했다. "홍콩을?" "또?" "대체 몇 번을 가는 거야?" 그럴 만도 하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이번 홍콩은 여행으로 어느덧 열 번째. 홍콩 영화나 홍콩 배우의 리즈 시절에 자라난 키드도 아니고, 중국에 반환되기 전의 아득한 부유감을 지닌 홍콩은 아예 모르는 데다 매번 여행할 때마다 비슷비슷한 것들을 하고 오면서도 또, 홍콩이다.
머리 위로 쏟아질 듯한 옥외 간판, 속도를 따라가기도 힘든 광둥어, 뜨겁고 습한 공기, 늘 어딘가로 이동해야 할 것만 같은 바쁜 분위기. 전생에 홍콩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내게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이 모든 것들. 팬데믹 3년간 국경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갔던 홍콩이 드디어 격리와 PCR 의무를 없앴다. 홍콩의 문이 열렸고 그렇다면 나는 홍콩에 가야만 했다.
날이 습하고 흐리다 싶더니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우산을 챙겼지만 펼칠 필요는 없었다. 2층이 튀어나온 홍콩 건물 구조상 우산을 쓰지 않고도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다. 얇은 셔츠에 재킷 하나 걸쳐 입고 코즈웨이베이로 향하는 트램 2층 맨 앞자리에 앉았다. 목적지는 타이항.
타이항
타이항은 골목골목 세련된 카페들과 맛집이 노상 다이파이동과 함께 자리 잡은 아주 작은 동네다. 마음 바쁘고 욕심 많은 여행객이라 한 번에 여러 카페를 다니는 법. 카페 MUSE에서 따뜻한 라테를, 카페 oma에선 캐러멜 푸딩에 진한 커피를 사 먹었다.
카페 oma
센트럴에 있는 식당에 미리 점심을 예약해 두었다. 타이항에서부터 천천히 걸으면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한다. 코즈웨이베이, 완차이, 애드미럴티, 센트럴로 이어지는 홍콩섬의 중심부. 명품 광고와 K-아이돌 생일 서포트 래핑이 되어 있는 트램과 초록불이 켜질 때마다 달그락 거리는 신호등, 도로를 가로지르는 리어카를 지나쳤다.
딤섬
센트럴 두델(Duddell) 스트리트는 오래된 가스등 계단이 있는 곳으로 영화 〈천장지구〉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특히 이 가스등 계단 옆으로 옛 홍콩 다방을 콘셉트로 한 특별한 스타벅스 매장이 이어져 있어 이 거리 자체가 필수 관광 코스처럼 여겨져 왔는데 지금 보니 스타벅스가 없어지고 다른 상점으로 바뀌어 있다. 21년에 폐점했단다. 타이항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비슷한 감정을 많이 느꼈는데, 비가 오면 야외 좌석에 앉아 와인을 기울이곤 했던 The Pawn도, 한 끼 먹기 좋았던 대만 음식점도 모두 없어지곤 낯선 상호가 걸려 있었다.
두델 스트리트 가스등 계단
센트럴 역에서 IFC몰을 지나 센트럴 페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없어지고 새로 생기는 것이 반복되는 홍콩에서 스타 페리 직원들의 움직임만큼은 여전하다. 침사추이 페리 터미널에 도착하자 해군복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은 나이 든 직원이 막대를 들고 기다리다 밧줄을 걸어 배를 정착시켰다. 눅진한 기름 냄새도 그대로다. 홍콩이란 도시에도 여전함이란 단어가 붙을 수 있다.

스타페리
아시아 최대 아트 페어가 아트 바젤 홍콩인 것처럼 홍콩은 좋은 전시, 좋은 작품을 보기에 좋은 곳이다. K11 MUSEA에서 가까운 갤러리 페로탕 홍콩으로 향했다. 컨시어지에 여권 정보와 연락처를 제시한 뒤 출입증을 받아 입장했다. 진행 중이었던 전시는 카테리나 올쉬바우어(Katherina Olschbaur)의 〈Midnight Spill〉.
창밖으로 이스트 침사추이 일부와 홍콩섬이 건너다보이는 작은 갤러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흔치 않은 홍콩의 정적. 관람객을 직시하는 듯하면서도 모호한 색채를 띤 여성들.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존재의 주체성이 느껴진다. 낯선 작가라 검색을 해보았는데 어느 사이트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여성성'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아마도 여성의 말 그대로 '리얼'일 모습에 '저항, 전복'이란 해석이 붙는 게 진정한 의미의 '리얼리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페로탕 홍콩
인파가 가득한 트램 몇 대를 지나쳐 보낸 뒤 조금 한산한 트램에 탑승해 1층에 자리 잡았다. 홍콩에서 현지인처럼 다녀보고 싶다면 트램이나 버스 1층에 앉아볼 것.
* * *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니 어제와 비슷하게 희뿌연 아침 하늘이 보인다. 거짓말 같은 4월 1일이 되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굵어진 빗방울을 맞으며 트램을 타고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로 이동했다.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걷는데 앞서 가는 여성분의 하얀 에코백에 ‘레슬리’란 이름과 함께 장국영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바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근처에 다다랐다는 것을 이 향기 때문에 안다. 매년 4월 1일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전달한 화환과 꽃들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벽면에 놓이고 주변은 꽃향기로 뒤덮인다. 꽃들에, 장국영에 가까워졌다. 호텔 직원이 나와 사람들이 수월히 지나다닐 수 있도록 안내를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인 빨간 장미 속 단어 哥哥. 만우절 거짓말 같았던 그날.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홍콩 영화나 홍콩 배우의 리즈 시절에 자라난 키드도 아니고, 그가 사망하던 때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어린 학생이었다. 나는 다 자라 장국영을 알았고 다 자라 그의 대표작을 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있나. 예정된 결말을 이미 알고 보는 그의 삶을 어떻게 지나칠 수 있나. 이 서글픈 이끌림. 사진 찍고, 꽃을 놔두고, 움직이지 못하고 호텔을 향해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4월 1일이 되면 어쩌지 못하고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는 마음들. 나이 먹었나, 멋쩍게 이 앞에서 조금 울었다.

만다린 오리엔탈
눈 깜짝할 사이에 식당이 사라지고 또 생기는 홍콩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식당들이 있다. 그중 오랫동안 미슐랭 빕그루망에 이름 올리고 있는 침차이키를 찾았다. 관광객들에게 워낙 잘 알려진 유명 맛집인데도 홍콩을 열 번 오는 동안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오후 5시 즈음 도착하니 웨이팅 없이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침차이키에서 먹어야 하는 메뉴는 완탕면이다. 에그 누들의 완탕면을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뉴가 나왔다. 통통한 새우가 큼직하게 씹히는 완탕에 꼬들꼬들한 에그 누들, 바로 해장이 될 듯한 진한 국물을 먹으니 이제야 와 본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오랜 시간 사랑을 받는 식당엔 이런 한 방이 있다.

침차이키의 완탕면
내내 흐리지만 덕분에 덥지 않고 춥지 않아 걷기 좋다. 나는 홍콩에 오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아침 일찍 짐 정리를 마쳐놓고 버스를 타고 바다 아래로 뚫린 해저 터널을 지나 카오룽에 도착했다. 리츠 칼튼 호텔이 있는 ICC 건물과 카오룽역 외에는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 굳이 찾는 동네는 아니었는데, 홍콩 고궁박물관, 엠플러스(M+) 뮤지엄, 프리스페이스, 아트 파크가 있는 서구룡 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란 이름의 새로운 문화 공간이 생겼다기에 꼭 와 보고 싶었다.
조깅하고, 산책하는 사람들 조금. 홍콩섬을 바라보는 위치. 그야말로 휴식과 같은 공간이었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잔뜩 흩날려도 기분이 좋다.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 마셨다. 날 좋은 날 몇 시간이든 앉아 놀 수 있는 공간일 듯했다.
서구룡문화지구
엠플러스 뮤지엄에서는 개관 1주년 기념으로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이 개최되고 있었다. 특별전은 전시 배치 자체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처럼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다. 전시 벽면 하나에 수십 개의 작품이 걸려 있다가 특유의 '땡땡이' 무늬를 입은 조형물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그중 작가가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내려다본 감상을 캔버스에 옮긴 작품들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단순한 '땡땡이' 무늬만 있는 듯한데 가까이 다가가면 물감의 마티에르가 제각각에 색감도 섬세하게 음영 지어 있다. 떠나고 있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세계다.
카오룽역에서 출발해 난청역에서 내렸다. 타이항과 더불어 골목골목 세련된 카페나 상점들이 많은 삼수이포가 걸어서 금방이었다. 가죽 전문 가게, LP와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가게, 일본 레트로 상품 가게, 여럿 카페와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골동품 가게들이 보물을 발견하듯 튀어나왔다. 한국 노래가 플레이 리스트에 섞여 있는 카페 Dozy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다. 카페는 만석이라 몇몇 사람들은 아쉽게 걸음을 돌렸다.
이런 동네라면 장국영과 관련된 물건 하나쯤은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골목을 지그재그로 꼼꼼히 돌다가 이거다 싶은 가게를 발견했다. 2000년대 초반 장국영 콘서트 포스터나 영화 속 모습을 재연한 그림, 옛 카세트테이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중 뭘 살까 신나게 고민하는데 장국영과 관련된 모든 물건에 붙어 있는 ‘비매품’ 안내. 주인이 그저 자랑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쉽게 구경만 했다.
삼수이포에서
만약 여행객으로 야우마떼이를 방문한다면 보통 미도 카페에 가기 위해서겠지만 나는 큐브릭 때문이다. 시네마테크 1층에 자리한 서점 겸 DVD 판매점 겸 카페인 곳. 안쪽의 DVD 코너에서 영웅본색 1편을 찾아 결제했다. 넷플릭스에서 한국어 자막을 달아 편하게 관람할 수 있지만 굳이, 큐브릭까지 와서, 광둥어로 된 〈영웅본색〉 DVD를 구입하는 것.
부슬비를 사흘 내내 맞고 다녀도 괜찮았는데, 여행이 끝날 시점에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약국에서 종합 감기약 하나를 사서 그 자리에서 삼켰다. 그럼에도 걸었다. 붉은 등이 켜진 리퉁 애비뉴를, 헤네시 로드를. 날이 어두워지니 더욱 빛을 발하는 빨간색 간판들을 질리지도 않게 바라보며, 일요일 저녁의 북적북적함이 있는 어느 신호등 끝자락에 서서 신호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이 풍경을 사진과 동영상에 담았다.

이번 홍콩 일정을 돌아보면 바쁘게 걸은 기억이 먼저다. 팬데믹 기간 동안 새로 생겼거나 와 보지 않았던 곳들을 찾아다녔고, 딱 그만큼 매번 했던 것들을 또 했다. 경험과 상상이 뒤섞이는, 열 번을 와도 이런 곳.
홍콩은 흥미롭다. 변화하는 도시라서다. 스스로 말미암은 변화와 어쩔 수 없는 변화,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도시다. 반갑기도, 두렵기도, 기대되기도, 무서워지기도 한다. 변화하는 도시라서다. 하지만 홍콩은 그런 채로 존재할 것이다. 홍콩이기 때문에, 홍콩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나는 같고도 다를 홍콩을 보러 또 올 것이다. 안 해봤던 걸 하고 해 봤던 걸 또 하려고. 이번과 크게 다르지 않을 여행. 어쩌겠는가, 홍콩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한데.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
제이 in there #9
홍콩을 간다고 하자 지인들의 반응은 엇비슷했다. "홍콩을?" "또?" "대체 몇 번을 가는 거야?" 그럴 만도 하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이번 홍콩은 여행으로 어느덧 열 번째. 홍콩 영화나 홍콩 배우의 리즈 시절에 자라난 키드도 아니고, 중국에 반환되기 전의 아득한 부유감을 지닌 홍콩은 아예 모르는 데다 매번 여행할 때마다 비슷비슷한 것들을 하고 오면서도 또, 홍콩이다.
머리 위로 쏟아질 듯한 옥외 간판, 속도를 따라가기도 힘든 광둥어, 뜨겁고 습한 공기, 늘 어딘가로 이동해야 할 것만 같은 바쁜 분위기. 전생에 홍콩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내게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이 모든 것들. 팬데믹 3년간 국경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갔던 홍콩이 드디어 격리와 PCR 의무를 없앴다. 홍콩의 문이 열렸고 그렇다면 나는 홍콩에 가야만 했다.
날이 습하고 흐리다 싶더니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우산을 챙겼지만 펼칠 필요는 없었다. 2층이 튀어나온 홍콩 건물 구조상 우산을 쓰지 않고도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다. 얇은 셔츠에 재킷 하나 걸쳐 입고 코즈웨이베이로 향하는 트램 2층 맨 앞자리에 앉았다. 목적지는 타이항.
타이항은 골목골목 세련된 카페들과 맛집이 노상 다이파이동과 함께 자리 잡은 아주 작은 동네다. 마음 바쁘고 욕심 많은 여행객이라 한 번에 여러 카페를 다니는 법. 카페 MUSE에서 따뜻한 라테를, 카페 oma에선 캐러멜 푸딩에 진한 커피를 사 먹었다.
센트럴에 있는 식당에 미리 점심을 예약해 두었다. 타이항에서부터 천천히 걸으면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한다. 코즈웨이베이, 완차이, 애드미럴티, 센트럴로 이어지는 홍콩섬의 중심부. 명품 광고와 K-아이돌 생일 서포트 래핑이 되어 있는 트램과 초록불이 켜질 때마다 달그락 거리는 신호등, 도로를 가로지르는 리어카를 지나쳤다.
센트럴 두델(Duddell) 스트리트는 오래된 가스등 계단이 있는 곳으로 영화 〈천장지구〉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특히 이 가스등 계단 옆으로 옛 홍콩 다방을 콘셉트로 한 특별한 스타벅스 매장이 이어져 있어 이 거리 자체가 필수 관광 코스처럼 여겨져 왔는데 지금 보니 스타벅스가 없어지고 다른 상점으로 바뀌어 있다. 21년에 폐점했단다. 타이항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비슷한 감정을 많이 느꼈는데, 비가 오면 야외 좌석에 앉아 와인을 기울이곤 했던 The Pawn도, 한 끼 먹기 좋았던 대만 음식점도 모두 없어지곤 낯선 상호가 걸려 있었다.
센트럴 역에서 IFC몰을 지나 센트럴 페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없어지고 새로 생기는 것이 반복되는 홍콩에서 스타 페리 직원들의 움직임만큼은 여전하다. 침사추이 페리 터미널에 도착하자 해군복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은 나이 든 직원이 막대를 들고 기다리다 밧줄을 걸어 배를 정착시켰다. 눅진한 기름 냄새도 그대로다. 홍콩이란 도시에도 여전함이란 단어가 붙을 수 있다.
스타페리
아시아 최대 아트 페어가 아트 바젤 홍콩인 것처럼 홍콩은 좋은 전시, 좋은 작품을 보기에 좋은 곳이다. K11 MUSEA에서 가까운 갤러리 페로탕 홍콩으로 향했다. 컨시어지에 여권 정보와 연락처를 제시한 뒤 출입증을 받아 입장했다. 진행 중이었던 전시는 카테리나 올쉬바우어(Katherina Olschbaur)의 〈Midnight Spill〉.
창밖으로 이스트 침사추이 일부와 홍콩섬이 건너다보이는 작은 갤러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흔치 않은 홍콩의 정적. 관람객을 직시하는 듯하면서도 모호한 색채를 띤 여성들.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존재의 주체성이 느껴진다. 낯선 작가라 검색을 해보았는데 어느 사이트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여성성'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아마도 여성의 말 그대로 '리얼'일 모습에 '저항, 전복'이란 해석이 붙는 게 진정한 의미의 '리얼리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파가 가득한 트램 몇 대를 지나쳐 보낸 뒤 조금 한산한 트램에 탑승해 1층에 자리 잡았다. 홍콩에서 현지인처럼 다녀보고 싶다면 트램이나 버스 1층에 앉아볼 것.
* * *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니 어제와 비슷하게 희뿌연 아침 하늘이 보인다. 거짓말 같은 4월 1일이 되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굵어진 빗방울을 맞으며 트램을 타고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로 이동했다.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걷는데 앞서 가는 여성분의 하얀 에코백에 ‘레슬리’란 이름과 함께 장국영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바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근처에 다다랐다는 것을 이 향기 때문에 안다. 매년 4월 1일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전달한 화환과 꽃들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벽면에 놓이고 주변은 꽃향기로 뒤덮인다. 꽃들에, 장국영에 가까워졌다. 호텔 직원이 나와 사람들이 수월히 지나다닐 수 있도록 안내를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인 빨간 장미 속 단어 哥哥. 만우절 거짓말 같았던 그날.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홍콩 영화나 홍콩 배우의 리즈 시절에 자라난 키드도 아니고, 그가 사망하던 때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어린 학생이었다. 나는 다 자라 장국영을 알았고 다 자라 그의 대표작을 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있나. 예정된 결말을 이미 알고 보는 그의 삶을 어떻게 지나칠 수 있나. 이 서글픈 이끌림. 사진 찍고, 꽃을 놔두고, 움직이지 못하고 호텔을 향해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4월 1일이 되면 어쩌지 못하고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는 마음들. 나이 먹었나, 멋쩍게 이 앞에서 조금 울었다.
만다린 오리엔탈
눈 깜짝할 사이에 식당이 사라지고 또 생기는 홍콩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식당들이 있다. 그중 오랫동안 미슐랭 빕그루망에 이름 올리고 있는 침차이키를 찾았다. 관광객들에게 워낙 잘 알려진 유명 맛집인데도 홍콩을 열 번 오는 동안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오후 5시 즈음 도착하니 웨이팅 없이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침차이키에서 먹어야 하는 메뉴는 완탕면이다. 에그 누들의 완탕면을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뉴가 나왔다. 통통한 새우가 큼직하게 씹히는 완탕에 꼬들꼬들한 에그 누들, 바로 해장이 될 듯한 진한 국물을 먹으니 이제야 와 본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오랜 시간 사랑을 받는 식당엔 이런 한 방이 있다.
침차이키의 완탕면
내내 흐리지만 덕분에 덥지 않고 춥지 않아 걷기 좋다. 나는 홍콩에 오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아침 일찍 짐 정리를 마쳐놓고 버스를 타고 바다 아래로 뚫린 해저 터널을 지나 카오룽에 도착했다. 리츠 칼튼 호텔이 있는 ICC 건물과 카오룽역 외에는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 굳이 찾는 동네는 아니었는데, 홍콩 고궁박물관, 엠플러스(M+) 뮤지엄, 프리스페이스, 아트 파크가 있는 서구룡 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란 이름의 새로운 문화 공간이 생겼다기에 꼭 와 보고 싶었다.
조깅하고, 산책하는 사람들 조금. 홍콩섬을 바라보는 위치. 그야말로 휴식과 같은 공간이었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잔뜩 흩날려도 기분이 좋다.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 마셨다. 날 좋은 날 몇 시간이든 앉아 놀 수 있는 공간일 듯했다.
엠플러스 뮤지엄에서는 개관 1주년 기념으로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이 개최되고 있었다. 특별전은 전시 배치 자체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처럼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다. 전시 벽면 하나에 수십 개의 작품이 걸려 있다가 특유의 '땡땡이' 무늬를 입은 조형물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그중 작가가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내려다본 감상을 캔버스에 옮긴 작품들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단순한 '땡땡이' 무늬만 있는 듯한데 가까이 다가가면 물감의 마티에르가 제각각에 색감도 섬세하게 음영 지어 있다. 떠나고 있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세계다.
카오룽역에서 출발해 난청역에서 내렸다. 타이항과 더불어 골목골목 세련된 카페나 상점들이 많은 삼수이포가 걸어서 금방이었다. 가죽 전문 가게, LP와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가게, 일본 레트로 상품 가게, 여럿 카페와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골동품 가게들이 보물을 발견하듯 튀어나왔다. 한국 노래가 플레이 리스트에 섞여 있는 카페 Dozy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다. 카페는 만석이라 몇몇 사람들은 아쉽게 걸음을 돌렸다.
이런 동네라면 장국영과 관련된 물건 하나쯤은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골목을 지그재그로 꼼꼼히 돌다가 이거다 싶은 가게를 발견했다. 2000년대 초반 장국영 콘서트 포스터나 영화 속 모습을 재연한 그림, 옛 카세트테이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중 뭘 살까 신나게 고민하는데 장국영과 관련된 모든 물건에 붙어 있는 ‘비매품’ 안내. 주인이 그저 자랑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쉽게 구경만 했다.
만약 여행객으로 야우마떼이를 방문한다면 보통 미도 카페에 가기 위해서겠지만 나는 큐브릭 때문이다. 시네마테크 1층에 자리한 서점 겸 DVD 판매점 겸 카페인 곳. 안쪽의 DVD 코너에서 영웅본색 1편을 찾아 결제했다. 넷플릭스에서 한국어 자막을 달아 편하게 관람할 수 있지만 굳이, 큐브릭까지 와서, 광둥어로 된 〈영웅본색〉 DVD를 구입하는 것.
부슬비를 사흘 내내 맞고 다녀도 괜찮았는데, 여행이 끝날 시점에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약국에서 종합 감기약 하나를 사서 그 자리에서 삼켰다. 그럼에도 걸었다. 붉은 등이 켜진 리퉁 애비뉴를, 헤네시 로드를. 날이 어두워지니 더욱 빛을 발하는 빨간색 간판들을 질리지도 않게 바라보며, 일요일 저녁의 북적북적함이 있는 어느 신호등 끝자락에 서서 신호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이 풍경을 사진과 동영상에 담았다.
이번 홍콩 일정을 돌아보면 바쁘게 걸은 기억이 먼저다. 팬데믹 기간 동안 새로 생겼거나 와 보지 않았던 곳들을 찾아다녔고, 딱 그만큼 매번 했던 것들을 또 했다. 경험과 상상이 뒤섞이는, 열 번을 와도 이런 곳.
홍콩은 흥미롭다. 변화하는 도시라서다. 스스로 말미암은 변화와 어쩔 수 없는 변화,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도시다. 반갑기도, 두렵기도, 기대되기도, 무서워지기도 한다. 변화하는 도시라서다. 하지만 홍콩은 그런 채로 존재할 것이다. 홍콩이기 때문에, 홍콩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나는 같고도 다를 홍콩을 보러 또 올 것이다. 안 해봤던 걸 하고 해 봤던 걸 또 하려고. 이번과 크게 다르지 않을 여행. 어쩌겠는가, 홍콩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한데.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