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걷고 쉬며 일본 여행][여행] 벳푸 지옥온천을 건너 시코쿠 마쓰야마로

2023-06-12

먹고 걷고 쉬며 보낸 22일간의 일본 여행 #3

 


규슈올레 트레킹 이후 벳푸로 향했다. 겨울 날씨에 오래 걷느라 온몸이 욱신거려서 온천 생각이 간절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는 벳푸를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시냇물 따라 작은 온천욕장이 모여 있는 시골 마을로 상상했었다. 예상과 달리 벳푸는 멋진 건물과 여유로운 사람들이 인상적인, 상당히 크고 세련되며 부유한 도시였다.

 

바닷가, 시내, 지옥 온천을 구경하고 꽤 비싼 료칸에 하루 묵으면서 피로를 풀었다. 료칸은 보통 호텔처럼 방 하나 가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1인당 요금을 받으면서 조식과 석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경비를 더 쓸 수밖에 없다. 가성비를 너무 따지기보다는 집에 돌아가서 라면만 먹을 각오하고 좋은 료칸에 머물며 호사를 누려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일상에서 내가 나에게 멋지게 한턱 쏘는 일은 드무니까 말이다.

 

248ab7356c0e6.jpg

료칸에서의 석식


벳푸의 주요 관광명소인 지옥온천은 펄펄 끓는 여덟 개의 온천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온천들은 너무 뜨거워 들어갈 수는 없으며 관상용이다. 각 온천에 들어갈 때 입장권을 사야 하는데 코스 전체를 볼 수 있는 통합권도 있다. 우리는 가장 유명하다는 바다지옥만 보기로 했다.

 

c7bb39c2fe251.jpg벳푸의 지옥온천 입구


근처에 도착하자 벌써 유황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붉은색과 하늘색 온천 위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신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혹시라도 빠질까 싶어 저절로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온천이 솟아나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이런 풍경을 만들어주니 별다른 산업 없이도 이 도시가 풍요로운 게 아닐까 싶었다.

 

5b99c56e47d79.jpg89b9fabc5c2ed.jpg벳푸의 지옥온천


벳푸역 근처 할아버지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카페에 갔다. 바 안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직접 커피를 내려주는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 점잖은 노인 손님들이 많았고 외국인도 더러 보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백인 남자가 우리에게 “한국에서 오셨나요?” 하며 말을 걸었다. 벳푸에서 영어 강사를 하는 그는 한국에서도 몇 년간 지냈다고 한다.

 

여행지에서 외국인과 한국어로 대화하다니 반가웠다. 이참에 여행 내내 궁금했던 것도 물어보았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이나 유튜브 채널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술집에 가서 “마스타!” 하고 주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따라 해 보고 싶어서 아무 이자카야에서나 “마스타”를 외쳐보았으나 거기에 응해주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아, 머쓱…. 그렇다면 마츠다 부장은 도대체 어떤 때 마스타를 불렀던 것일까? ‘마스타’가 아니라 ‘스미마셍’이 더 적절한 말이었을까? 그의 설명으로는, 주인이 직접 음식을 만들고 내주는 곳에서만 ‘마스터’라고 부르고, 점원이 서빙하는 곳에서는 ‘스미마셍’이라 하는 게 적절하단다. 그것도 모르고 무식을 떨었다니….

 

ce75a10aaa11b.jpeg

할아버지 바리스타가 운영하던 카페애서


일본 문화를 잘 모르는데다 말이 안 통하니 이 외에도 답답한 순간은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파파고 번역기와 구글지도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아, 디지털 기술이란 얼마나 빨리 진보하는지! 파파고가 모든 것을 매끄럽게 번역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식당에서 메뉴판을 보고 무슨 음식인지 가늠할 수는 있게 해주었다. 예전과는 달리 과감한 주문이 가능해진 것이다. 20세기 말, 지도와 여행가이드북을 손에 들고 처음 해외여행을 갔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뽕나무밭 찾아갔다가 갑자기 바다에 풍덩 빠진 듯한 아찔한 느낌이 든다. 기술 덕분에 여행이 점점 만만해져서 좋다.


e8be581f74960.jpg벳푸의 요트 선착장

 

*   *   *

 

여행 전반부를 마무리하고 벳푸항에서 배를 타고 시코쿠의 야와타하마로 갔다. 야와타하마 항구에서 버스를 타고 마쓰야마로 이동한 뒤 시코쿠 여행을 어떻게 할지 본격적으로 궁리해보기로 했다. 시코쿠 여행을 벳푸에 와서야 즉흥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는 일본 열도의 주요 4개 섬이다. 시코쿠섬은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로 이 중 면적이 가장 작은데, 대부분 산이고 인구도 적어 경제 발전이 더딘 곳이라 한다. 확실히 시코쿠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다른 지역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우중충한 느낌이 있었지만, 너무 화려하고 깔끔하고 세련된 것보다 오히려 친숙하고 편안해서 좋았다. 규슈섬에 비해 물가도 싸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나중에 시코쿠 여행을 마친 뒤 후쿠오카로 돌아와 1박을 했을 때 물가가 비싸고 사람들이 뺀질뺀질 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시코쿠에는 푸근함이 있었다.

 

한국에서 시코쿠의 다카마쓰와 마쓰야마로 가는 직항 노선이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아 아직 대중적으로 알려진 지역은 아니다. 한국 관광객은 대부분 이런 도시를 2박 3일 일정으로 여행하는 것 같다. 에히메현의 중심지 마쓰야마는 길게 머물기엔 딱히 뭐가 없는 도시인데, 우리 부부는 타고난 게으름 때문에 마쓰야마에서 5박 6일을 머물렀다.

 

원고 마감에 쫓겨 호텔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종일 글만 쓴 날도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때 되면 밖으로 나가 밥만 챙겨 먹은 날도 있었으며, 바닷가 구경을 갔다 온 날도 있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온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이상하게도 별거 없는 마쓰야마에서의 시간들이 따뜻하게 기억되고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한 구경거리나 체험이 없어도, 낯선 도시에서 남이 차려준 밥 먹으며 멍 때리는 것은 그 자체로 여행의 본질적인 가치에 충실한 일이었다. 

 

7fc1c00ecffe6.jpeg

마쓰야마에서 먹은 굴 튀김


마쓰야마는 나쓰메 소세키와 깊은 관련이 곳이다. 사실 나쓰메 소세키가 마쓰야마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며 지냈던 것은 고작 1년 정도의 기간이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련님(봇짱)』을 썼다 하여 도심 곳곳에서 ‘봇짱’과 ‘소세키’가 들어간 시설을 만날 수 있으니, 소세키와 관련이 깊어지고 싶어 하는 도시라고도 볼 수 있겠다.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도고온천을 자주 갔다고 한다. 도고온천 앞 ‘봇짱 시계탑’이나 ‘봇짱 열차’는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과 열차를 아이디어로 만든 것이다. 소세키가 지냈던 하숙집터도 이 근처에 남아있다고 한다. 마침 배낭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챙겨 왔던지라 이 도시에서 읽는 기분이 더 남달랐다.

 

지난 3월 별세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역시 마쓰야마와 인연이 깊다. 그는 에히메현에서 태어나 마쓰야마 히가시 고등학교(소세키가 교사를 했던 학교이기도 하다)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시설은 없어서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ab1371a750495.jpg나쓰메 소세키가 교사로 일했던 마쓰야마 중학교 터. 현재는 통신회사 건물이 되었다. 나무기둥에 소세키의 하이쿠가 소개되어 있다.


도고온천은 3000년 된 일본 최고(最古)의 온천이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온천의 외관은 이곳을 참고 해서 그린 것이라 한다. 현재 본관은 수리 중이라 별관에서 우리 돈 6,000원짜리 가장 싼 대중탕에 가봤다. 물이야 다르더라만, 시설은 그냥 대중탕이었다.

 

특이한 점은 20~30대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더라는 것이다. 일본 젊은이들에게는 도고온천이 친구들과 추억을 만드는 여행지로 인기가 있나 보다. 저렴하게 이틀을 묵었던 도고온천 앞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매 끼니 신라면을 두 개씩 끓여 먹던 유쾌한 일본 청년을 만나기도 했다. 그가 “소주는 역시 참이슬”이라고 하길래 내가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소주는 역시 일본 소주”라고 아무리 말해줘도(파파고가 말해줘도) 그는 수긍하지 않았다. 미식의 나라에서 왜 굳이 참이슬을….

 

6022afcdca463.jpg수리 중인 도고온천 본관


도고온천 관광안내소에서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어느 블로그에서 본 마쓰야마 근교 시골의 료칸을 가고 싶은데 숙소 예약 사이트에 없으니 예약을 좀 부탁드린다 했더니, 두 명의 직원이 매달려 료칸에 전화 문의를 하고 한국어 통역과 화상통화로 연결하여 과정을 설명해주고 가격 흥정까지 해서 료칸 예약을 해주었다. 그러고도 걱정이 됐는지 가는 길까지 지도로 자세히 알려주었다. 여기저기 전화하고 통역을 거쳐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라 거의 30분이 걸렸는데 우리만을 위해서 이 모든 걸 해줘 너무나 고마웠다.

 

마쓰야마 근교 시모나다는 바다와 가장 가까운 무인역이다. 예쁘고 고즈넉한 풍경 때문에 광고에 많이 나온 곳이라 한다. 기차를 타고 이 역에 내리면 이미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으려고 대기하고 있다. 인증 사진을 찍고 바로 다음 열차를 타고 가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바닷가를 따라 어촌을 좀 더 돌아보기로 했다.

 

7e3d6f6dd37d7.jpg바다가 가까운 시모나다역


또 하나의 촬영 포인트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바다로 가는 철길이다. 실제로는 배를 고쳐서 바다로 내보내는 철로인데, 이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허탕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우리는 약간의 고생을 하고 무사히 인증샷을 찍은 후 바닷가를 한참 걸었다. 심심하고 고요한, 그러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5ec16a6ec26cc.jpg바다로 향한 철길




글/사진 허유미

0fcbd76fefd28.png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춤과 관련된 수업과 글쓰기를 함께 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춤들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 『춤의 재미, 춤의 어려움』, 『춤추는 세계』가 있다.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