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걷고 쉬며 보낸 22일간의 일본 여행 #5
호조에서 기차를 타고 이마바리로 향했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57번 절 에이후쿠지와 58번 절 센유지를 보러 갔다. 도심에서 두어 시간 걸어가면 되는 거리이긴 하지만, 국도와 논밭 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지쳐서 ‘아니 내가 여길 왜 걷고 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마 어떤 순례길을 걷더라도 어떤 시점에는 이런 회의감과 만나지 않을까 싶다. 별다른 풍경이 없는 심심한 구간도 지나야 하고, 피로와 통증이 점점 내 감정까지 건드리는 시점이 오면, 왜 쓸데없이 이 길을 걷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짜증과 함께 밀려온다.

57번 절 에이쿠지
그런데 그 쓸데없는 시간을 일상에서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시간을 내어 순례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몸도 마음도 쉽게 지치는 나약한 나 자신을 온전히 만나야 하는 시간이고, 나를 다독이고 돌봐야 하는 시간이다. 물론 결국 목적지에 닿는다. 그러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58번 절 센유지는 산 위에 자리 잡은 크고 아름다운 절이어서 역시나 온 보람이 있었다. 이 절에는 슈쿠보(절에서 운영하는 민박)도 있는데, 한 번쯤 슈쿠보를 경험해보고 싶긴 했으나 보아하니 오헨로 복장을 해야 묵을 수 있을 듯하여 포기했다.


58번 절 센유지와 센유지로 가는 길
이마바리는 에히메현에서 두 번째 크기의 중소도시다. 이마바리역 앞에 ‘조선과 타월의 고장 이마바리’라는 알림판이 세워져 있다. 이마바리 조선소와 이마바리 타월 외에는 특별한 게 없는 고장이기도 하다. 이 심심한 도시에서 어쩌다 보니(물론 게을러서) 4박 5일을 지내게 되었다. 숙소에 누워 있다가 밥때 되면 밥 먹고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는데, 여행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이상하게 많이 생각나는 곳이다. 항구 근처에 있는 ‘KAPPO SETO'라는 이자카야는 매우 훌륭한 저녁 정식이 2~3,000엔이라 이틀 연달아 갔다.
이마바리 조선소에 2008년 만든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프로펠라
이 외에도 철판에 눌러서 굽는 게 특징인 이마바리식 야키도리집, 진한 국물이 인상적이었던 라멘집도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는 두 배 이상의 가격을 주고도 이런 수준의 음식을 맛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싸고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약간 우중충한 길거리 풍경 같은 것들이 쓸쓸하고도 푸근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크고 화려한 것들을 좋아하던 청춘을 지나,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한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중년의 취향에 도달하게 된 듯하다.
이마바리 KAPPO SETO 이자카야의 음식들
이마바리식 야키도리
이마바리에 머무는 동안 일본 7대 명산 중 하나인 이시즈치산에 가보았다. 1,982미터의 높은 산으로, 스키장 중급코스가 있는 곳이다. 이마바리에서 사이조까지 기차로 이동, 사이조에서 다시 이시즈치 로프웨이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가는 길부터 매우 아름다웠다. 1,400미터까지 올라가는 로프웨이(케이블카)를 타고 푸르던 숲이 중간부터 점점 설산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설레었다. 로프웨이에서 내리니 완전히 하얀 세상이었다. 눈 덮인 산을 걸어보는 게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높은 산에서는.

이시즈치산 가는 길
나무마다 갖가지 모양으로 달린 상고대, 푹신푹신한 눈길, 어디를 둘러봐도 하얀 풍경, 참으로 황홀했다. 이번 여행 여기서 다 이루었구나 싶었다. 케이블카에 같이 탔던 아저씨와 조쥬사라는 신사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이분은 큰 소라로 된 악기를 목에 걸고 와서는 중간 중간 멈춰서 악기를 불었다. ‘부우~~~’하는 나각 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 신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용한 설산에서 영성을 청각적으로 만나는 참 귀한 경험이었다.


나각을 부는 남자
우리는 대략 1,500미터까지 두 시간 반 정도 걸었다. 더 이상 가려면 아이젠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 정도에서 충분히 만족하고 내려왔다. 이시즈치산은 산 자체가 멋있어서 다른 계절에 와도 좋을 것 같다.


이시즈치산
이마바리 여행을 마친 후 후쿠오카로 돌아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21박 22일의 일본여행을 마무리했다. 일본은 숙박비와 교통비가 비싸다 보니 역시 일주일 이상 여행하기에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곳이긴 했다. 하지만 자연이 아름답고 문화가 비슷하고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으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불만이 없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이래서 일본을 연달아 자주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나도 다음엔 일본 어느 지역을 여행할까 궁리 중이다. 그때는 히라가나라도 익히고 가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글/사진 허유미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춤과 관련된 수업과 글쓰기를 함께 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춤들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 『춤의 재미, 춤의 어려움』, 『춤추는 세계』가 있다.
먹고 걷고 쉬며 보낸 22일간의 일본 여행 #5
호조에서 기차를 타고 이마바리로 향했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57번 절 에이후쿠지와 58번 절 센유지를 보러 갔다. 도심에서 두어 시간 걸어가면 되는 거리이긴 하지만, 국도와 논밭 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지쳐서 ‘아니 내가 여길 왜 걷고 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마 어떤 순례길을 걷더라도 어떤 시점에는 이런 회의감과 만나지 않을까 싶다. 별다른 풍경이 없는 심심한 구간도 지나야 하고, 피로와 통증이 점점 내 감정까지 건드리는 시점이 오면, 왜 쓸데없이 이 길을 걷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짜증과 함께 밀려온다.
57번 절 에이쿠지
그런데 그 쓸데없는 시간을 일상에서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시간을 내어 순례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몸도 마음도 쉽게 지치는 나약한 나 자신을 온전히 만나야 하는 시간이고, 나를 다독이고 돌봐야 하는 시간이다. 물론 결국 목적지에 닿는다. 그러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58번 절 센유지는 산 위에 자리 잡은 크고 아름다운 절이어서 역시나 온 보람이 있었다. 이 절에는 슈쿠보(절에서 운영하는 민박)도 있는데, 한 번쯤 슈쿠보를 경험해보고 싶긴 했으나 보아하니 오헨로 복장을 해야 묵을 수 있을 듯하여 포기했다.
이마바리는 에히메현에서 두 번째 크기의 중소도시다. 이마바리역 앞에 ‘조선과 타월의 고장 이마바리’라는 알림판이 세워져 있다. 이마바리 조선소와 이마바리 타월 외에는 특별한 게 없는 고장이기도 하다. 이 심심한 도시에서 어쩌다 보니(물론 게을러서) 4박 5일을 지내게 되었다. 숙소에 누워 있다가 밥때 되면 밥 먹고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는데, 여행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이상하게 많이 생각나는 곳이다. 항구 근처에 있는 ‘KAPPO SETO'라는 이자카야는 매우 훌륭한 저녁 정식이 2~3,000엔이라 이틀 연달아 갔다.
이 외에도 철판에 눌러서 굽는 게 특징인 이마바리식 야키도리집, 진한 국물이 인상적이었던 라멘집도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는 두 배 이상의 가격을 주고도 이런 수준의 음식을 맛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싸고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약간 우중충한 길거리 풍경 같은 것들이 쓸쓸하고도 푸근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크고 화려한 것들을 좋아하던 청춘을 지나,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한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중년의 취향에 도달하게 된 듯하다.
이마바리에 머무는 동안 일본 7대 명산 중 하나인 이시즈치산에 가보았다. 1,982미터의 높은 산으로, 스키장 중급코스가 있는 곳이다. 이마바리에서 사이조까지 기차로 이동, 사이조에서 다시 이시즈치 로프웨이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가는 길부터 매우 아름다웠다. 1,400미터까지 올라가는 로프웨이(케이블카)를 타고 푸르던 숲이 중간부터 점점 설산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설레었다. 로프웨이에서 내리니 완전히 하얀 세상이었다. 눈 덮인 산을 걸어보는 게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높은 산에서는.
이시즈치산 가는 길
나무마다 갖가지 모양으로 달린 상고대, 푹신푹신한 눈길, 어디를 둘러봐도 하얀 풍경, 참으로 황홀했다. 이번 여행 여기서 다 이루었구나 싶었다. 케이블카에 같이 탔던 아저씨와 조쥬사라는 신사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이분은 큰 소라로 된 악기를 목에 걸고 와서는 중간 중간 멈춰서 악기를 불었다. ‘부우~~~’하는 나각 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 신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용한 설산에서 영성을 청각적으로 만나는 참 귀한 경험이었다.
우리는 대략 1,500미터까지 두 시간 반 정도 걸었다. 더 이상 가려면 아이젠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 정도에서 충분히 만족하고 내려왔다. 이시즈치산은 산 자체가 멋있어서 다른 계절에 와도 좋을 것 같다.
이마바리 여행을 마친 후 후쿠오카로 돌아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21박 22일의 일본여행을 마무리했다. 일본은 숙박비와 교통비가 비싸다 보니 역시 일주일 이상 여행하기에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곳이긴 했다. 하지만 자연이 아름답고 문화가 비슷하고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으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불만이 없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이래서 일본을 연달아 자주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나도 다음엔 일본 어느 지역을 여행할까 궁리 중이다. 그때는 히라가나라도 익히고 가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글/사진 허유미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춤과 관련된 수업과 글쓰기를 함께 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춤들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 『춤의 재미, 춤의 어려움』, 『춤추는 세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