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차 일본 만화 번역가의 설렁설렁 일본 여행 #5
언제부터였을까?
절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게 된 건.
문득 깨닫고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절은 그저 관광지일 뿐이었다. 풍광 좋고 분위기 좋은 역사적 유물. 볼거리로 지정된 것들을 한 바퀴 훑고 나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금방 자리를 떠나는, 여행 일정 중의 한 지점. 그런데 요즘 절에 가면 마음이 가라앉으며 하염없이 그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유물이나 유적이 없어도, 마음을 흔드는 아름다운 경치가 없어도, 역사적 이야깃거리가 없어도, 그저 그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시간을 보내려 한다.
겐코안 입구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이런 변화가 생긴 건 아무래도 나이 탓인 걸까? 아마 다른 종교 시설에 가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종교색에 물든다기보다는 종교라는 것이 가진 경건함과 엄숙함에 동화되는 그런 느낌.
교토의 겐코안은 그런 면에서 아주 특별하게 다가오는 사찰이다. 이곳에선 그저 마음이 편안하기만 한 게 아니다. 각종 걱정거리와 싸우다 나 자신을 반성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하고, 결국엔 마음이 정리되며 차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끔찍하고 비참한 역사적 흔적에 몸서리치게 되는, 특별한 장소이다.
겐코안
이 절의 본당에는 원형인 ‘깨달음의 창(悟りの窓)’과 사각형인 ‘방황의 창(迷いの窓)’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깨달음의 창’의 원형은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과 관음보살님의 마음과 대우주를 의미하며, ‘방황의 창’의 사각형은 인간의 생애를 상징한다. 생로병사의 온갖 번뇌가 그 사각 안에 들어 있다.
본당에 들어서면 이 두 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뭐라면 좋을까, 성당으로 치자면 고해성사라도 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이다. 벽에 뚫린 창문일 뿐인데, 마치 내 속내가 속속들이 파헤쳐지기라도 하는 느낌이 든다.

‘깨달음의 창’과 ‘방황의 창’
머뭇머뭇 자리를 잡는다. 나도 모르게 정좌를 하고 앉는다. 왜 그럴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혼나러 온 마냥 쭈뼛거린다. 가만히 앉아 두 창을 지그시 응시한다. 방황의 창을 바라보니 내 마음속의 온갖 고뇌와 번민이 모서리에 부딪히는 느낌이 든다. 속이 번잡스러워지며 가슴이 벌렁거리다 괜스레 눈물도 난다. 저 사각형 창문에 어쩐지 나의 모든 속앓이가 다 갇혀 있는 것만 같다. 큰 네모, 작은 네모에 큰 걱정, 작은 걱정들이 저마다 틀에 갇혀 싸우고 있다. 모난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각진 창문이 야속하기까지 하다.
방황의 창
한참을 사각형과 씨름하다 조금 진정될 때쯤 깨달음의 창을 바라본다. 천천히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가 저 깊은 우주 심연으로 스윽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건 물론 아니지만, 둥근 원이 모났던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며 가라앉힌다. 그래서 방황의 창보다 더 오래, 넋을 잃고 멍하니 둥근 창문을 쳐다본다.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창문에서 부처를 마주본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정원인가, 선(禪)의 세계인가. 마치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며, 어쩐지 뭔가에 압도된 듯 겸손해진다.
깨달음의 창
모난 마음은 부딪치고 부서지고 깎이며 점차 둥글어진다고 했던가. 아직은 갈 길이 먼 내 인생, 얼마나 더 아파야 둥근 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방황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다. 내 마음이 진정한 원형이 되는 건 그저 ‘네모의 꿈’일 수도 있지만, 지금 순간만이라도 자그마한 원 하나를 마음에 품어 본다.
창밖으로 보이는 녹색 나무들에 다시 한 번 위안을 받으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려한 불전에 가만히 목례를 올린다. 겐코안의 불전은 다른 절들에 비해 가까이에서 참례할 수 있어 좋다.


장지문 밖으로 보이는 정원
그리고 또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피천장(血天井).
잘 보면 천장 여기저기에 얼룩이 져 있고, 선명한 발자국도 보인다. 모든 것이 핏자국이다.
이 피천장은 1600년에 벌어진 후시미 성 전투에서 패배해 자결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하들이 흘린 피가 스며든 마루판으로 만들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도쿠가와 가문과 인연이 있는 몇몇 사원들에서 이 마루판을 보존하도록 하였는데, 다시는 누구에게도 밟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천장으로 올려졌다.
피천장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천장을 경건한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얼굴을 찡그리며 쳐다본다. 많은 권력자들은 피 웅덩이 위에 반석을 세웠다. 무슨 마음으로 이 천장의 마루판을 보존하도록 한 건지,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에겐 권력자를 품을 자질 따위 전혀 없는 게 틀림없다.
불전을 지나쳐가면 반대쪽으로 난 문 앞에 설치된 의자나 툇마루에 앉아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며 피천장으로 어지러워진 마음을 가라앉힌다. 내 마음을 휘저었다가 가라앉혔다가, 겐코안은 나름 바쁘게 나를 자극하고 또 다독인다.

마루와 정원
완벽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건 언제쯤일까?
그때까지 몇 번이고 찾아와봐야겠다.

밖에서 본 본당의 창
글·사진 박소현

16년차 일본 만화 번역가. 18년차 일본 여행 초보자. 28년차 기혼자. 일본어를 읽는 데 지치면 일본어를 말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게 삶의 낙인 고양이 집사. 그저 설렁설렁 일본을 산책하는 게 좋다.
『걸스 인 도쿄』 『도서 번역가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공동 저자.
15년차 일본 만화 번역가의 설렁설렁 일본 여행 #5
언제부터였을까?
절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게 된 건.
문득 깨닫고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절은 그저 관광지일 뿐이었다. 풍광 좋고 분위기 좋은 역사적 유물. 볼거리로 지정된 것들을 한 바퀴 훑고 나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금방 자리를 떠나는, 여행 일정 중의 한 지점. 그런데 요즘 절에 가면 마음이 가라앉으며 하염없이 그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유물이나 유적이 없어도, 마음을 흔드는 아름다운 경치가 없어도, 역사적 이야깃거리가 없어도, 그저 그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시간을 보내려 한다.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이런 변화가 생긴 건 아무래도 나이 탓인 걸까? 아마 다른 종교 시설에 가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종교색에 물든다기보다는 종교라는 것이 가진 경건함과 엄숙함에 동화되는 그런 느낌.
교토의 겐코안은 그런 면에서 아주 특별하게 다가오는 사찰이다. 이곳에선 그저 마음이 편안하기만 한 게 아니다. 각종 걱정거리와 싸우다 나 자신을 반성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하고, 결국엔 마음이 정리되며 차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끔찍하고 비참한 역사적 흔적에 몸서리치게 되는, 특별한 장소이다.
이 절의 본당에는 원형인 ‘깨달음의 창(悟りの窓)’과 사각형인 ‘방황의 창(迷いの窓)’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깨달음의 창’의 원형은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과 관음보살님의 마음과 대우주를 의미하며, ‘방황의 창’의 사각형은 인간의 생애를 상징한다. 생로병사의 온갖 번뇌가 그 사각 안에 들어 있다.
본당에 들어서면 이 두 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뭐라면 좋을까, 성당으로 치자면 고해성사라도 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이다. 벽에 뚫린 창문일 뿐인데, 마치 내 속내가 속속들이 파헤쳐지기라도 하는 느낌이 든다.
‘깨달음의 창’과 ‘방황의 창’
머뭇머뭇 자리를 잡는다. 나도 모르게 정좌를 하고 앉는다. 왜 그럴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혼나러 온 마냥 쭈뼛거린다. 가만히 앉아 두 창을 지그시 응시한다. 방황의 창을 바라보니 내 마음속의 온갖 고뇌와 번민이 모서리에 부딪히는 느낌이 든다. 속이 번잡스러워지며 가슴이 벌렁거리다 괜스레 눈물도 난다. 저 사각형 창문에 어쩐지 나의 모든 속앓이가 다 갇혀 있는 것만 같다. 큰 네모, 작은 네모에 큰 걱정, 작은 걱정들이 저마다 틀에 갇혀 싸우고 있다. 모난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각진 창문이 야속하기까지 하다.
한참을 사각형과 씨름하다 조금 진정될 때쯤 깨달음의 창을 바라본다. 천천히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가 저 깊은 우주 심연으로 스윽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건 물론 아니지만, 둥근 원이 모났던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며 가라앉힌다. 그래서 방황의 창보다 더 오래, 넋을 잃고 멍하니 둥근 창문을 쳐다본다.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창문에서 부처를 마주본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정원인가, 선(禪)의 세계인가. 마치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며, 어쩐지 뭔가에 압도된 듯 겸손해진다.
모난 마음은 부딪치고 부서지고 깎이며 점차 둥글어진다고 했던가. 아직은 갈 길이 먼 내 인생, 얼마나 더 아파야 둥근 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방황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다. 내 마음이 진정한 원형이 되는 건 그저 ‘네모의 꿈’일 수도 있지만, 지금 순간만이라도 자그마한 원 하나를 마음에 품어 본다.
창밖으로 보이는 녹색 나무들에 다시 한 번 위안을 받으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려한 불전에 가만히 목례를 올린다. 겐코안의 불전은 다른 절들에 비해 가까이에서 참례할 수 있어 좋다.
장지문 밖으로 보이는 정원
그리고 또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피천장(血天井).
잘 보면 천장 여기저기에 얼룩이 져 있고, 선명한 발자국도 보인다. 모든 것이 핏자국이다.
이 피천장은 1600년에 벌어진 후시미 성 전투에서 패배해 자결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하들이 흘린 피가 스며든 마루판으로 만들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도쿠가와 가문과 인연이 있는 몇몇 사원들에서 이 마루판을 보존하도록 하였는데, 다시는 누구에게도 밟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천장으로 올려졌다.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천장을 경건한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얼굴을 찡그리며 쳐다본다. 많은 권력자들은 피 웅덩이 위에 반석을 세웠다. 무슨 마음으로 이 천장의 마루판을 보존하도록 한 건지,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에겐 권력자를 품을 자질 따위 전혀 없는 게 틀림없다.
불전을 지나쳐가면 반대쪽으로 난 문 앞에 설치된 의자나 툇마루에 앉아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며 피천장으로 어지러워진 마음을 가라앉힌다. 내 마음을 휘저었다가 가라앉혔다가, 겐코안은 나름 바쁘게 나를 자극하고 또 다독인다.
마루와 정원
완벽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건 언제쯤일까?
그때까지 몇 번이고 찾아와봐야겠다.
밖에서 본 본당의 창
글·사진 박소현
16년차 일본 만화 번역가. 18년차 일본 여행 초보자. 28년차 기혼자. 일본어를 읽는 데 지치면 일본어를 말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게 삶의 낙인 고양이 집사. 그저 설렁설렁 일본을 산책하는 게 좋다.
『걸스 인 도쿄』 『도서 번역가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공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