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니즘 일상 속 일본문화][여행] 일본 인형을 안은 인상파 화가 로트레크와 자포니즘

2025-05-30

자포니즘, 일상에서 즐기는 일본 문화 여행 #3

 


한국에서 번역된 일본인 개그맨 마츠바라 타니시의 책 『무서운 방』은 저자가 실제로 살았던 곳에서 직접 경험한 으스스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논픽션 괴담집이다. 이 책에는 남자 아이의 모습을 한 일본 인형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 일본 인형은 ‘이치마쓰 인형(市松人形)’이라고 불리는 전통 인형이다. 남녀 어린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치마쓰 인형은 그 이름이 모델이 된 에도 시대의 인기 가부키 배우 사노가와 이치마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이치마쓰 인형을 선물할 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남아 이치마쓰 인형이 자포니즘이 유행하던 19세기의 유럽과 북미에서 사랑 받은 일본 공예품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남아 이치마쓰 인형을 소장했던 유명한 프랑스 화가가 있었다.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를 화폭에 담았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다. 프랑스어인 ‘벨 에포크’는 '아름다운 시대'를 뜻하는데,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파리가 번영했던 화려한 시대를 가리킨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19세기 말로 한 번 더 시간여행을 했을 때 로트레크를 비롯해 드가, 고갱 등이 함께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풍 복장에 일본 인형을 안고 사진을 찍었던 로트레크. 로트레크는 일본풍 코스프레의 선구자였다.
로트레크가 안고 있던 일본 인형과 비슷한 종류의 인형을 일본의 장인에게 직접 주문했다.  


갑자기 소유욕이 발동했다. 로크레크가 안고 있던 종류의 남아 이치마쓰 인형이 너무 갖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일본에서 4대째 활동 중인 이치마쓰 인형 장인 분을 알고 있었다. 이 인형 장인 분에게 연락해 남아 이치마쓰 인형을 주문 제작했다. 이렇게 해서 로트레크가 소장한 것과 비슷한 종류의 남아 이치마쓰 인형을 받았고, 내친 김에 일본 인형과 자포니즘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 때문에 기본적으로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친근감을 느끼지만, 이 중에서도 로트레크에게 가장 신경이 쓰인다. 그가 일본의 공예품 중 일본 인형을 가장 좋아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던 내가 열정적으로 수집하게 된 것이 이치마쓰 인형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전통 인형이다.


로트레크의 자포니즘 면모를 보여주는 불어권 만화책 번역서와 마우스 패드


로트레크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수년 전, 프랑스어로 된 예술만화책 『화가들의 천국 물랭루주 2 - 로트레크의 연인』을 번역하면서부터였다. 첫 번째 페이지부터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장면이 나왔다. 일본풍 차림으로 길가를 뛰어다니는 로트레크의 모습이다. 첫 번째 페이지에 나오는 문구 “올봄에는 일본 판화가 유행이었다”가 로크레크와 동시대 인상파 화가들의 우키요에 사랑을 한 줄로 요약하고 있었다. 실제로 로트레크도 우키요에를 수입했고 의상, 부채, 인형 등 일본 물건을 소장한 인물이었다.


‘일본의 긴 의자’라는 뜻의 프랑스어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라는 문구 때문에 구입한 마우스 패드는 1893년 로트레크가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음악카페 ‘디방 자포네’로부터 의뢰받아 만든 광고 포스터로 석판화 작품이다. 포스터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실존했던 사람들이다.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성은 인기가 많았던 무희이자 로크레크와 친분이 두터웠던 제인 아브릴이다. 검은색 모자를 쓴 신사는 음악 평론가 에두아르 뒤자르댕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성은 클럽 가수 이베트 길베르다.


로트레크가 작업한 디방 자포네 포스터


현대 그래픽 포스터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로트레크는 <디방 자포네>와 비슷한 그림체의 포스터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포스터 그림에 나타는 밝은 색채, 평면적이면서도 과감한 구도는 우키요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풍 의상, 일본의 부채와 인형 취향에서 알 수 있듯이 로트레크는 상당한 일본 문화 마니아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본풍으로 꾸미고 일본 인형을 안고 흑백사진을 찍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자포니즘의 ‘인간 광고’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 여행도 꿈꾸었지만, 안타깝게도 일본 여행의 꿈은 살아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로트레크에게 자포니즘은 물건을 통해 일본을 느끼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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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도쿄에 파나소닉 시오도메 미술관에서 ‘로트레크, 이치마쓰 인형, 자포니즘’ 전시가 열렸다. 2003년에 문을 연 파나소닉 시오도메 미술관은 JR 신바시역에서 가깝다. 성인 입장료는 1,200엔이고 중학생 이하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20세기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일본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의 대표작 『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 등장하는 조르주 루오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것이 특징인 미술관이다. 


도쿄 파나소닉 시오도메 미술관 | https://panasonic.co.jp/ew/museum/


2024년 10월 파나소닉 시오도메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벨 에포크 - 아름다운 시대 파리에 모인 예술가들>. 로트레크의 포스터 작품도 보인다. 


여기에 전시된 로트레크의 포스터는 친한 친구이자 가수였던 브뤼앙을 위해 그려 준 공연 포스터이다. 로크레크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포스터에는 검은색 의상과 모자가 붉은색 스카프로 한껏 멋을 낸 브뤼앙의 모습이 담겨 있다. 역시 과감한 색채와 구도가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우키요에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자신의 포스터가 21세기 일본 도쿄에서 전시될 것이라는 사실을 로트레크는 상상이나 했을까?


전시를 본 후 아사쿠사바시로 향했다. 내게 로트레크가 가지고 있던 것과 비슷한 이치마쓰 인형을 만들어 주신 인형 장인을 만나뵙기 위해서였다. 이치마쓰 인형 작가로 유명한 분이며, 현재의 1만 엔권 지폐의 초상 인물인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1927년 추진했던 미일인형교류에서 인형 제작과 수리에 참여했던 집안 출신이다.


‘우라라’전이 열린 요시토쿠


아사쿠사바시는 도쿄에서 ‘인형 동네’로 통한다. 아사쿠사바시의 일본 인형 가게 중에서도 가장 크고 유명한 인형 가게가 ‘요시토쿠’다. 가을의 요시토쿠는 인형 축제 장소로 변한다. 유명한 인형 전시회인 ‘우라라전’이 열리기 때문이다. 인형 장인분과는 우라라전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침 그분도 우라라전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종종 연락을 해서 그런지 직접 만난 그분은 나를 편하게 대해 주셨다. 우라라전에 출품한 그분의 작품들도 보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로트레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해 보기도 했다.


로트레크가 안고 있던 종류의 남아 이치마쓰 인형을 제작해 준 인형 장인(四代松乾斎東光)의 전시 공간 


2024년 도쿄 시부야에서 녹음을 마친 NHK <하나카페>의 홈페이지에 실린 사진. 19세기의 자포니즘에서는 남아 이치마쓰 인형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1927년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미일인형교류를 계기로 여아 이치마쓰 인형이 일본을 대표하는 인형으로 부상했고 미국 현대문학의 자포니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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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에 한국인과 일본인 집필진의 공저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의 첫 시리즈가 태어났다. 나는 여기에서 「인형의 나라 일본」을 집필하며 이치마쓰 인형을 안고 있던 로트레크의 사진도 소개했다. 유명한 화가 로트레크가 남아 이치마쓰 인형을 자포니즘 소재로서 특별하게 대했다는 내용에 이치마쓰 인형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하는 한국인 및 일본인 독자들의 연락도 받았다.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의 첫 시리즈는 출판을 통한 한국인과 일본인의 민간 협력을 상징하며 2021년에 국내는 물론 <주니치 신문>과 <도쿄 신문> 등 일본 언론에게도 주목을 받았다. 동시에 NHK 국제라디오 한국어 방송 <하나카페>와 영어 방송 <Friends Around The World>에도 소개되었는데, 당시 나도 온라인으로 두 방송에 출연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매년 일본 인형을 중심 테마로 다양한 자포니즘 분야를 소개해 오고 있다. 한편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는 NHK 스튜디오에도 비치되었으니 사진 속의 로트레크는 일본 여행을 넘어 일본 생활까지 하게 된 꿈을 이룬 것 아닐까?


2021년 NHK <하나카페> 홈페이지에 소개된 일본 인형과 자포니즘 연구에 관한 사진. 로트레크의 모습도 보인다. 


2022년 NHK <하나카페> 홈페이지에 실린 사진. 마침내 남아 이치마쓰 인형의 관점에서 바라 본 자포니즘 테마를 다루면서 로트레크와 남아 이치마쓰 인형의 인연을 또 한 번 소개했다.『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2』에서는 ‘자포니즘, 일본 문화가 있는 서양 미술’을 기고했다. 




글·사진 | 이주영

프랑스어와 일본학을 전공했다. 프랑스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를 활용해 다언어 일본학도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 집필진의 공저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시리즈에서는 2021년부터 매년 자포니즘 연구가 타이틀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자포니즘 테마로 NHK 국제라디오 한국어 방송 <하나카페>와 영어 방송 <Friends Around The World> 에 출연했다. 최근 역서로는 프랑스 소설 『할복』과 일본 도서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윤리경영 리더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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