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쓰는 일기][여행] 추석 연휴, 제주에서 서울로 떠난 역여행

2025-10-08

섬에서 쓰는 일기 #6


유난히 긴 추석 연휴였다. 제주는 여행객으로 붐볐고, 나는 그 틈을 피해 그동안 걸어보지 못한 오라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서울로 올라가는 비행기가 뜻밖에 저렴했다. 평소의 편도 가격에 왕복까지 가능하니 섬이 잠시 떠나라고 권하는구나. 일종의 역여행이었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연휴가 긴 만큼 텅 빈 서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역시 인구 천 만에 육박하는 대도시. 사람은 어딜 가도 많았다. ‘더 현대’ 같은 쇼핑몰은 그냥 평범한 매장에서도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제주의 오버투어리즘은 우리가 제주에 정착하기 한참 전에 이미 끝났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기다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나는 적적한 섬의 리듬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곳은 피하자.


선유도공원이 떠올랐다. 작년 여름, 인터뷰 때문에 오랜만에 찾았던 선유도 공원의 기억이 좋아서였다. 마침 아내도 아이도 서울에 살던 동안 한 번도 선유도공원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한갓진 선유도역 부근 주택가를 걷다가 선유교로 향하는 길에 날씨가 꾸물꾸물했다. 공원에서 한바탕 비를 맞으려나 싶었는데, 눈에 띄는 펍이 하나 있었다. 빨간 차양 아래, 잠깐 내린 비 때문에 접어둔 빨간 의자. 공원보다 이곳이 한강을 더 멋지게 즐길 장소일지 몰랐다. 유난히 많이 붙은 체코 맥주 광고도 그냥 떨쳐내기 어려웠다.



바람에는 적당한 습도와 기분 좋은 냉기가 실려 있었다. 제주에 아직 오지 않은 가을 바람이었다. 전용컵을 사은품으로 준다는 체코 맥주 부드바르를 세 병 주문하고, 아이의 간식으로 피자를 골랐다. 감미로우면서 그루브가 있는 배경 음악이 흘렀다. 마마스 건의 This is the day. 전용잔에는 330ml 맥주 한 병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고스란히 담겼다. 간조의 차이 없이 수위가 일정한 한강처럼. 과연 오늘이 바로 그날이군.


제주에 분위기 있는 펍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바다가 지천인데 강을 부러워할 이유도 없지만, 한강의 분위기는 과연 한강에만 있었다. 한강공원 근처에 살던 사람이 거기서 멀어지면서 느끼는 결핍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주인은 주방 안으로 자주 사라졌다. 빔 프로젝터로 쏜 영상만 벽 위에 흘렀다. 한강 산책을 나선 사람들이 펍 안쪽을 자꾸 기웃거렸다.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부심이랄까, 공간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흔히 내보이는 으쓱함을 맛봤다. 대부분이 동네 주민이고 개중에는 우리보다 이 펍을 잘 아는 단골도 있겠지만, 여행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게 하는 묘미가 있다. 사람들이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낯선 공간이 주는 고양감이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착각을 선사하기 때문일지도.



쌉싸름하다가 꿀맛으로 끝나는 부드바르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침 로고도 빨간색이라 이 펍의 이름이 ‘부드바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앞으로 마트에서 이 맥주를 발견하면 고민 없이 선택할 것이다. 우리에겐 사은품으로 받은 전용컵도 있다. 섬에서 온 사람들이 섬에 가려다가 걸음을 멈춰도 좋을 그런 맥주를 한 잔 더 가득 채웠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아무리 즉흥 계획이라지만 마무리는 지어야 해서 선유도공원까지 마저 걸었다. 맥주 1.5병 정도야 산책에 지장을 줄 리가 없었다. 옛 정수장 시설을 ‘자연스럽게’ 섬 위의 숲처럼 만든 조경은 날것 같은 매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숲의 깊이감 같은 게 채워지지 않았다. 한강 근처에 살다가 한강을 떠난 사람이 느끼는 결핍 같은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시의 피로가 그리워 역여행을 떠났지만, 그리운 건 떠나온 섬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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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 신태진

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를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litt.ly/ecrire_lire_vi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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