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여행] 30개월 아이와 함께하는 홋카이도 여행 #1

2023-11-22

“이번에는 카페에 꼭 데려가 줄게.”


아이와 두 번째 여행을 앞둔 며칠 전 그가 나에게 툭 던진 말이었다. 지난 여행인 오키나와에서 아이에게 맞춘 일정을 짜느라 카페에 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서운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생각해 준 마음이 보드랍고 예뻐서 마치 오랫동안 기다린 것처럼 “정말이지? 꼭이야.” 하고 냉큼 답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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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월 아이의 짐 가방은 6개월 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캐리어 하나를 아이의 몫으로 가득 채워 넣고도 왠지 모를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린 홀연히 떠나는 여행을 즐기지만 우리 집 작은 사람과 같이할 때는 비상시를 대비해 머릿속으로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대안까지 세워야 한다. 비상약과 영양제, 아이용 간식 한 꾸러미도 필수.


여행에 있어서 우리의 역할 분담은 확실한 편이다. 남편이 계획을 짜고 숙소 및 레스토랑을 예약한다면 나는 그 일정에 맞춰 옷을 선택하고 여행 가방을 꾸리면 된다. 내가 할 일이 너무 없다고? 내 진정한 역할은 여행지에 가서 마음껏 즐기고 고마움을 표현하며 서로가 느낄 충만함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행을 계획하며 누리는 잔잔한 설렘을 그에게 살포시 밀어 넣고 나는 당신의 수고스러움을 엄지 한껏 치켜올리며 인정해 주면 된다. 아이와 함께 아빠의 노고를 알아주며 “아빠 최고”를 외치면 우리 모두 연거푸 즐거워진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격려하는 일, 더욱 신나게 하는 동력을 만들어 주는 것. 이번 홋카이도 여행은 도시의 즐길 거리와 소도시의 자연 경관을 적절히 섞은 다채로운 여행이라고 그가 말했다.


e2496a78d2cf3.jpg인천공항 옆에서 묵었던 숙소


이제 출발해 볼까. 우리의 해외여행은 전날 공항 근처 숙소에서 시작된다. 


활주로와 비행기가 보이는 숙소에서 하루를 묵으며 아이의 기분을 여행자의 태도로 올려놓으면 비행기를 타는 발걸음부터 경쾌해지고 사소한 것에도 흥미를 느낀다. 눈으로 먼저 적응하고 행동으로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경계가 느슨해지는 거다. 대략 세 시간 가까운 비행시간을 색칠 놀이와 스티커 북, 병원 놀이로 보내며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했다. 유아차를 먼저 찾아 아이를 태우고 수화물을 찾은 후 공항철도에 탑승하면 첫 번째 미션은 성공.


숙소까지 문제없이 도착하겠다는 예상과 다르게 아이는 공항 랜드사이드에 위치한 분홍색, 연두색 범퍼 매트가 놓인 아이들 휴게 공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여기서 춤을 추고 놀겠다고, 자기는 여기면 된단다. 나 참, 어이가 없는데 귀엽다. 그래, 율동 한 번 신나게 뽐내보자. 우리는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힐 때까지 3평 남짓 공간을 콩콩 뛰었다. 삿포로 시내까지는 40km로 공항철도 40분이면 도착하는데 마음의 거리는 400km는 되는 이 기분. 아이를 설득해서 몇 걸음 떼면 움직이는 동물 인형들이 반긴다. 인형의 정교한 움직임에 아이의 입이 떡 벌어지고 돌고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입국심사가 오래 걸린 것도 아닌데 공항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이리 길 줄이야.


아무래도 홋카이도는 공항부터 아이에게 환대를 해주는 것 같다. 


7ddb9cf6fad29.jpg저 멀리 보이는 삿포로 스스키노의 관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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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리 공원에서 보이는 삿포로 시계탑


첫 숙소는 오도리 공원에서 멀지 않은 호텔로 주요 역들을 도보로 갈 수 있고 시장과 맛집들이 가까워 여행자들에게 편리한 위치였다. 3시가 훌쩍 넘은 시간, 체크인을 하고 간단히 짐을 풀며 남은 오후 계획을 물으니 남편이 빙그레 미소 짓는다.


“호텔 근처에 두 블록만 가면 삿포로에서 유명한 커피집이 있어.”


마음은 이미 그 카페에 가 있고 몸은 문 앞에 매달려 있는데 내 레이더망에 걸린 건 낙낙하게 기대어 침대와 한 몸이 되어있는 예쁜 아이다. 몸집만 한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아기 자세로 쉬고 있는 게 너무 사랑스러워 잠시 내버려 두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창살에 비친 햇살이 따사로워 아이에게 밖에 나가볼 거냐고 물었다. 그제야 신발을 신고 따라나선다. 슬며시 아이 손을 잡고 두 블록을 걷자 검은색 벽돌과 나무 지붕 모양의 입구가 감각적인 카페가 눈앞에 보였다. 작은 규모의 커피 바라서 실내에 의자는 없고 스탠딩 테이블만 놓여있다.


3d8c843d3591d.jpg바리스타트 커피


바리스타트 커피는 카페 라테를 주문하면 원두 선택 전 우유를 먼저 고르는데 우유가 무려 네 종류다. 우유 맛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커피 맛이라니. 벌써 고소함이 느껴진다. 한 잔을 포장해 문 앞에 있는 기다란 나무 벤치에 앉았다.


“연아, 이리로 와 봐.” 


아빠는 애타게 아이를 부르고 엄마의 단독 사진을 찍어주려는 아빠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이는 내 손만 꽉 움켜쥐고 어설픈 자세로 옆에 따라 앉는다. ‘여보 나 괜찮아’ 하는 신호를 코를 찡긋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아이를 누가 이겨’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하더니 금세 피식 웃는다. 커피는 찬데 마음은 손에 퍼지는 온기로부터 다정하게 데워진다. 


b06d7970d5e5d.jpg7eb12db8ac46b.jpg홋카이도의 다양한 우유를 판매하는 바리스타트 커피


엄마 등에 업혀서 얼굴을 파묻은 아이의 엉덩이를 손으로 받치며 걷는 우리 세 사람 참 귀엽고 개성 있다. 아빠의 손에 들린 뽀로로 퍼즐 가방과 커피 한 잔, 엄마의 목에 둘린 가방, 꼬질꼬질해진 분홍색 토끼 인형, 아이의 어깨 위로 걸쳐진 아빠의 청재킷. 나란히 걷는 발걸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어떤 힘일까? 나는 일상이 답답하거나 환기가 필요할 때 내 마음에 쏙 드는 카페에 가서 마시는 커피를 한 잔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내게 여행은 좋아하는 것을 새로운 곳에서 하는 것인데, 아이와 함께 커피를 마신다는 건 피곤한 면도 있지만 이전에는 몰랐던 색다른 재미가 있다. 오롯함보다는 넉넉함. 사유는 어렵지만 웃음이 끊기지 않는 정다움, 애틋함 같은 것.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몇 잔의 커피를 마시며 얼마나 정신없이 큰소리로 웃으며 놀까. 화려한 삿포로 시내의 야경을 등지고 어둑한 골목으로 걸어 들어간다.


38110ac11a91e.jpge9e149b4fb612.jpgd95b61cad632b.jpg삿포로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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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유리(그렇게 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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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동에서 책방 '그렇게 책이 된다'를 운영했습니다. @becoming_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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