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니즘, 일상에서 즐기는 일본 문화 여행 #6
2026년 새해가 시작된 1월 1일. <주니치신문>과 <도쿄신문>의 서울특파원 일본인 기자님에게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는 연락이 왔다. 일본 문화를 기반으로 자신의 분야를 발전시켜 나가는 외국인들을 조명한 특집기사였는데, 자포니즘을 연구하는 한국인으로서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

2026년 1월 1일자 <도쿄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 서구권에서는 자포니즘 테마로 종종 연구되는 이치마쓰 인형과 분라쿠 인형 자료와 함께.
<도쿄신문>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저자들의 공저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를 알게 된 뒤 NHK 월드재팬의 한국어 방송 <하나카페>는 2021년부터 매년 이 시리즈를 소개해 주고 있다. 작년에는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다섯 번째 이야기와 함께 한국의 자포니즘이 소개되었는데, <하나카페>의 일본인 총괄 PD님이 평소처럼 회사에서 <도쿄신문>을 펼쳤다가 우연히 나의 자포니즘 인터뷰 기사를 발견했다고 메일을 보내주셨다.
새해의 ‘新’, <도쿄신문>의 ‘東京’, 그리고 자포니즘ジャポニズム, 이렇게 세 일본 단어가 머릿속에서 움직이며 하나의 뜻으로 정렬되었다. 자포니즘 연구를 위해 매년 도쿄에 가고 있지만, 2025년 도쿄 ‘신자포니즘’ 여행은 유달리 특별했다. 혹시 ‘자포니즘(Japonisme)’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리는 독자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한국에 수입된 일본 후쿠이현의 안경 브랜드 ‘자포니즘’을 떠올리는 분들이 계실지도. 자포니즘은 프랑스어다. 19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과 북미에서 일본 문화 붐이 크게 일었다. 이 현상은 단순히 이국적인 일본 문화를 소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본 문화를 창작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움직임, ‘자포니즘’으로 이어졌다. 이 흐름을 이끌었던 유명한 예술가들이 고흐, 모네, 마네, 로트레크 등 인상파 화가들이다.
자포니즘을 일으킨 일본 문화 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다색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이다. 우키요에는 일본 만화의 원류 중 하나다. 현대 사회에서 한국인을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이 일본 만화를 좋아하듯,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은 우키요에에 열광했다.
2025년 봄. 하네다 공항과 도쿄 시내를 연결해주는 시나가와(品川) 역. 뜻하지 않게 신자포니즘 여행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에도(도쿄의 옛 이름)와 현대의 도쿄를 연결해주는 안내자는 우키요에 출판업자이자 일본 팝컬쳐의 초석을 다진 츠타야 주자부로(蔦屋重三郎)이다. 시나가와 역에 도착하자 츠타야 주자부로를 연기한 요코하마 류세이(영화 <국보>에서 슌스케 역을 맡은 배우)가 환하게 웃고 있는 NHK 대하드라마 <베라보(べらぼう)>의 포스터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시나가와 역. NHK 대하드라마 <베라보> 포스터
2025년은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자 NHK가 방송 10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우키요에를 다룬 대하드라마 <베라보>는 NHK가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드라마이다. 18세기 에도시대의 츠타야 주자부로로 분한 요코하마 류세이가 포스터 속에서 “설마 자포니즘을 연구하러 온 사람이 우키요에 굿즈를 지나치는 건 아니겠죠?”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변명 같지만, 자포니즘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우키요에 굿즈 코너를 지나칠 수는 없지, 하는 생각으로 매대 앞으로 갔다. 우키요에 굿즈의 유혹에 매료된 사람은 당연히 나만이 아니었다. 일본인 손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서구권 관광객들도 굿즈 쇼핑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나야 물론이고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우키요에가 새겨진 굿즈는 일본산 과자, 작은 일본 전통 인형과 마찬가지로 자국에 돌아가서도 일정 기간 동안, 혹은 지속적으로 ‘일본 여행 추억’을 느끼게 해주는 구체적인 ‘사물’이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과 감각은 희미해져도 물건은 남는다. ‘구입’이냐 ‘수집’이냐 하는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시나가와 역. 우키요에 굿즈를 판매하던 팝업 스토어.
나에게 우키요에는 자포니즘 테마에서 다루는 출판 콘텐츠다. 요코하마 류세이가 연기한 츠타야 주자부로에게도 우키요에가 출판 콘텐츠였다. 우키요에가 유행하던 에도시대는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신분의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무사, 상인, 승려, 유녀 상관없이 신분사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사람들은 이 답답한 현실에서 헤이안 시대의 시 ‘와카(和歌)’ 형식을 빌려 평소에는 말할 수 없던 본심을 노래했다. 그 노래의 이름은 ‘교카(狂歌)’. 한국어 발음으로는 ‘미칠 (광)’과 ‘노래 (가)’가 합쳐진 ‘광가’이다. 미치지 않으려면 노래를 해야 했던 사람들, 아니 어쩌면 미친 듯이 노래를 해야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었던 사람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츠타야 주자부로는 생각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들의 속내를 문화 콘텐츠로 만들기로 했다. 불특정 다수의 마음이 모인 곳에서 대중문화가 탄생한다. 츠타야는 많고 많은 무명인들의 광가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 책으로 엮었고 여기에 서민들이 즐기던 예술 우키요에를 삽화로 넣었다. 츠타야는 뛰어난 출판 기획자였다. 무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신분사회의 대체 가능한 부품이 아니라 창작자가 되었다.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문화를 활용해 자유를 만들어간다는 츠타야의 발상은 일본 특유의 창의력과 연결된다. 츠타야가 출판한 교카 모음집의 정신은 현대 일본 만화에도 이어진다.
배우 요코하마 류세이를 다시 만난 곳은 도쿄국립박물관의 <신자포니즘> 전시회 포스터였다. 전시회 포스터에서 요코하마 류세이는 21세기 현대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도쿄국립박물관 안에 설치된 <신자포니즘> 전시회 포스터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자포니즘도, 성장한다. 성장은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포니즘이 탄생하고 약 150년 후, 서구권뿐만 아니라 한국, 대만, 태국, 중동 등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만화, 음악, 요리, 디자인 등 다양한 일본 문화가 인기를 끌었다.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들이 일본 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현지의 정서와 문화와 접목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NHK는 이러한 현상을 100주년 스페셜 방송에서 ‘신자포니즘(新ジャポニズム)’이라고 불렀다. 이 방송의 1~4회까지 나레이터를 맡은 것도 요코하마 류세이였는데, 신자포니즘 전시회의 나레이터 역시도 요코하마 류세이였다. 드라마 <베라보>에 나왔던 신사의 도리이를 연상시키는 전시회 입구는 먼 과거로 시간여행으로 떠나는 관문 같았다.
요코하마 류세이의 나레이션이 전시회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지금, 다시 세계에서 일본 문화가 크게 물결치고 있습니다. 일본 문화에는 어떤 매력이 숨어 있을까요? 신자포니즘, 그것은 우리 일본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한 ‘일본’의 이야기입니다.”
이 전시회의 가장 큰 장점은 박물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 영상을 무한 반복해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크린의 동영상은 촬영 금지였지만 영상전시가 끝날 때마다 5분간의 포토타임이 주어졌다.

<신자포니즘> 전시장 입구. <신자포니즘>전은 성인 기준 입장료가 2,000엔.
‘조몬시대에서 우키요에,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신자포니즘> 전시회는 몰입형 영상 체험 전시를 표방한다.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일본도 아득히 먼 과거부터 주어진 환경 속에서 독자적인 미의식을 탄생시켰고, 수없는 진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몬 토기, 두루마리 그림(에마키), 토기 장식 유물인 ‘하니와’, 갑옷과 투구, 우키요에로 대표되는 전통 문화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애니메이션 등 일본 팝컬쳐로 이어지고 있다.

<신자포니즘> 전시회 팜플렛의 뒷면. 체험은 몸과 머리가 기억한다. 팜플렛을 볼 때마다 전시장에서 시각, 청각, 촉각으로 느낀 신자포니즘이 재현된다.

전시회에서 만난 우키요에와 노가면. 평소 DVD, 엽서, 도서, 굿즈 등으로 집에서도 즐기는 일본 전통 문화여서 친근한 풍경.

전시회에서 만난 일본의 전통과 현대. 애니메이션 <우주 소년 아톰>의 포스터.
<우주 소년 아톰>의 주제곡이 도쿄 다카다노바바 역에 흐르는 멜로디. 그리고 일본 최초의 만화이자 국보인 <조수인물희화(鳥獣人物戯画)>.

전시회에서 만난 2021년도 일본 애니메이션 <용과 주근깨 공주>. 한국에서도 개봉되어 친근한 작품.
일본 문화를 테마로 한 시간여행을 선물하기 위해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 중인 국보와 주요 문화재, NHK의 고화질 영상 기술, 우리에게 익숙한 피카츄와 일본 애니메이션이 손을 잡았다. 정면에는 높이 7m의 스크린이, 좌우에는 길이 13m의 거대 고정밀 8K LED가 설치되어 일본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중간 중간 나오는 <미래소년 코난>, <우주소년 아톰> 등의 애니메이션은 나의 소중한 유소년 시절과 맞닿아 있다. 피카츄와 애니메이션 <용과 주근깨 공주>, 다양한 일본 전통 문화는 현재 나의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본 문화이자 자포니즘의 테마를 대표한다. 그러니 적어도 나에게는 단순한 전시장일 수 없다. 여기에는 나의 어린 시절이, 청소년기가, 지금 현재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시부야 역에서 NHK 방송국으로 걸어가다 보면 츠타야 서점이 나온다. 츠타야 서점은 츠타야 주자부로와 ‘츠타야’라는 발음만 같을 뿐, 사실 아무 관계가 없다. 츠타야 주자부로, 자포니즘 에세이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는 <브릭스 매거진>, 한일 공저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5권의 자포니즘 이야기, 그리고 도쿄에서 직접 체험한 신자포니즘 이야기를 NHK 월드재팬 한국어 방송 <하나카페>에 출연해 청취자들에게 들려 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츠타야 서점을 지나며, 2015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에 이어 2025년 60주년에도 KBS와 공동기획 프로그램을 연출한 다나카 신 PD님에게 받은 신자포니즘 관련 질문 목록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작년 NHK 월드재팬 한국어 라디오 방송 <하나카페>에 소개하고 온 신자포니즘 전시회. 전시회 현수막 사진이 1회 방송에 게재되었다.
이미지 출처 : NHK 하나카페 홈페이지

작년에도 자포니즘 연구가 타이틀로 출연한 NHK <하나카페>.
<브릭스 매거진>의 자포니즘 에세이, 2025년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5』의 자포니즘 이야기가 같이 소개되었다. 이미지 출처 : NHK 하나카페 홈페이지
자포니즘과 신자포니즘 연구는 나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일본 문화를 활용해 출판, 강의,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활동하는 외국 사람들의 사례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어 국내 일본학 콘텐츠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비슷한 경험은 공감을 만든다. 둘째,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한국이라는 공간에 수용되거나 현지화를 거쳐 재창조된 일본 문화를 관찰해 한국 사회의 니즈를 읽는 일이다.
NHK 하나카페 녹음을 마치고 숙소에서 메일을 확인했더니, 부천에 있는 범박고등학교에서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1권에 소개된 이치마쓰 인형과 자포니즘 테마로 특강을 의뢰해 왔다는 출판사의 메일이 와 있었다. 2025년을 가득 채울 고등학교, 대학교에서의 신자포니즘 특강 시리즈를 여는 스타트였다. 나는 특강 때마다 요코하마 류세이를 부활시켰다. 특강 내용에 따라 한국에서 요코하마 류세이는 때로는 NHK <베라보>의 에도시대의 복장으로, 때로는 NHK <신자포니즘>의 21세기 현대 일본인의 복장으로 등장했다.

부천 범박고등학교에서 신자포니즘 특강을 마치고 선물로 받은 라무네와 삼각김밥.
떡갈비 삼각김밥은 한국에 도입된 일본의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 문화가 한국의 떡갈비 문화와 만나 재해석된 것으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신자포니즘의 예시.
글·사진 | 이주영

프랑스어와 일본학을 전공했다. 프랑스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를 활용해 다언어 일본학도 번역가와 출판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 집필진의 공저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시리즈와 시사일본연구소에 자포니즘 연구가 타이틀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자포니즘 테마로 NHK 국제라디오 한국어 방송 <하나카페>와 영어 방송 <Friends Around The World> 에 출연했다. 신권 1만엔 지폐의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미일인형교류가 일으킨 미국문학의 자포니즘을 논문과 특강에서 다루었고 NHK 출판사의 도서『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윤리경영 리더십』을 번역했다.
자포니즘, 일상에서 즐기는 일본 문화 여행 #6
2026년 새해가 시작된 1월 1일. <주니치신문>과 <도쿄신문>의 서울특파원 일본인 기자님에게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는 연락이 왔다. 일본 문화를 기반으로 자신의 분야를 발전시켜 나가는 외국인들을 조명한 특집기사였는데, 자포니즘을 연구하는 한국인으로서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
2026년 1월 1일자 <도쿄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 서구권에서는 자포니즘 테마로 종종 연구되는 이치마쓰 인형과 분라쿠 인형 자료와 함께.
<도쿄신문>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저자들의 공저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를 알게 된 뒤 NHK 월드재팬의 한국어 방송 <하나카페>는 2021년부터 매년 이 시리즈를 소개해 주고 있다. 작년에는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다섯 번째 이야기와 함께 한국의 자포니즘이 소개되었는데, <하나카페>의 일본인 총괄 PD님이 평소처럼 회사에서 <도쿄신문>을 펼쳤다가 우연히 나의 자포니즘 인터뷰 기사를 발견했다고 메일을 보내주셨다.
새해의 ‘新’, <도쿄신문>의 ‘東京’, 그리고 자포니즘ジャポニズム, 이렇게 세 일본 단어가 머릿속에서 움직이며 하나의 뜻으로 정렬되었다. 자포니즘 연구를 위해 매년 도쿄에 가고 있지만, 2025년 도쿄 ‘신자포니즘’ 여행은 유달리 특별했다. 혹시 ‘자포니즘(Japonisme)’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리는 독자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한국에 수입된 일본 후쿠이현의 안경 브랜드 ‘자포니즘’을 떠올리는 분들이 계실지도. 자포니즘은 프랑스어다. 19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과 북미에서 일본 문화 붐이 크게 일었다. 이 현상은 단순히 이국적인 일본 문화를 소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본 문화를 창작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움직임, ‘자포니즘’으로 이어졌다. 이 흐름을 이끌었던 유명한 예술가들이 고흐, 모네, 마네, 로트레크 등 인상파 화가들이다.
자포니즘을 일으킨 일본 문화 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다색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이다. 우키요에는 일본 만화의 원류 중 하나다. 현대 사회에서 한국인을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이 일본 만화를 좋아하듯,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은 우키요에에 열광했다.
2025년 봄. 하네다 공항과 도쿄 시내를 연결해주는 시나가와(品川) 역. 뜻하지 않게 신자포니즘 여행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에도(도쿄의 옛 이름)와 현대의 도쿄를 연결해주는 안내자는 우키요에 출판업자이자 일본 팝컬쳐의 초석을 다진 츠타야 주자부로(蔦屋重三郎)이다. 시나가와 역에 도착하자 츠타야 주자부로를 연기한 요코하마 류세이(영화 <국보>에서 슌스케 역을 맡은 배우)가 환하게 웃고 있는 NHK 대하드라마 <베라보(べらぼう)>의 포스터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시나가와 역. NHK 대하드라마 <베라보> 포스터
2025년은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자 NHK가 방송 10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우키요에를 다룬 대하드라마 <베라보>는 NHK가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드라마이다. 18세기 에도시대의 츠타야 주자부로로 분한 요코하마 류세이가 포스터 속에서 “설마 자포니즘을 연구하러 온 사람이 우키요에 굿즈를 지나치는 건 아니겠죠?”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변명 같지만, 자포니즘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우키요에 굿즈 코너를 지나칠 수는 없지, 하는 생각으로 매대 앞으로 갔다. 우키요에 굿즈의 유혹에 매료된 사람은 당연히 나만이 아니었다. 일본인 손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서구권 관광객들도 굿즈 쇼핑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나야 물론이고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우키요에가 새겨진 굿즈는 일본산 과자, 작은 일본 전통 인형과 마찬가지로 자국에 돌아가서도 일정 기간 동안, 혹은 지속적으로 ‘일본 여행 추억’을 느끼게 해주는 구체적인 ‘사물’이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과 감각은 희미해져도 물건은 남는다. ‘구입’이냐 ‘수집’이냐 하는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시나가와 역. 우키요에 굿즈를 판매하던 팝업 스토어.
나에게 우키요에는 자포니즘 테마에서 다루는 출판 콘텐츠다. 요코하마 류세이가 연기한 츠타야 주자부로에게도 우키요에가 출판 콘텐츠였다. 우키요에가 유행하던 에도시대는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신분의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무사, 상인, 승려, 유녀 상관없이 신분사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사람들은 이 답답한 현실에서 헤이안 시대의 시 ‘와카(和歌)’ 형식을 빌려 평소에는 말할 수 없던 본심을 노래했다. 그 노래의 이름은 ‘교카(狂歌)’. 한국어 발음으로는 ‘미칠 (광)’과 ‘노래 (가)’가 합쳐진 ‘광가’이다. 미치지 않으려면 노래를 해야 했던 사람들, 아니 어쩌면 미친 듯이 노래를 해야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었던 사람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츠타야 주자부로는 생각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들의 속내를 문화 콘텐츠로 만들기로 했다. 불특정 다수의 마음이 모인 곳에서 대중문화가 탄생한다. 츠타야는 많고 많은 무명인들의 광가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 책으로 엮었고 여기에 서민들이 즐기던 예술 우키요에를 삽화로 넣었다. 츠타야는 뛰어난 출판 기획자였다. 무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신분사회의 대체 가능한 부품이 아니라 창작자가 되었다.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문화를 활용해 자유를 만들어간다는 츠타야의 발상은 일본 특유의 창의력과 연결된다. 츠타야가 출판한 교카 모음집의 정신은 현대 일본 만화에도 이어진다.
배우 요코하마 류세이를 다시 만난 곳은 도쿄국립박물관의 <신자포니즘> 전시회 포스터였다. 전시회 포스터에서 요코하마 류세이는 21세기 현대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도쿄국립박물관 안에 설치된 <신자포니즘> 전시회 포스터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자포니즘도, 성장한다. 성장은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포니즘이 탄생하고 약 150년 후, 서구권뿐만 아니라 한국, 대만, 태국, 중동 등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만화, 음악, 요리, 디자인 등 다양한 일본 문화가 인기를 끌었다.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들이 일본 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현지의 정서와 문화와 접목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NHK는 이러한 현상을 100주년 스페셜 방송에서 ‘신자포니즘(新ジャポニズム)’이라고 불렀다. 이 방송의 1~4회까지 나레이터를 맡은 것도 요코하마 류세이였는데, 신자포니즘 전시회의 나레이터 역시도 요코하마 류세이였다. 드라마 <베라보>에 나왔던 신사의 도리이를 연상시키는 전시회 입구는 먼 과거로 시간여행으로 떠나는 관문 같았다.
요코하마 류세이의 나레이션이 전시회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지금, 다시 세계에서 일본 문화가 크게 물결치고 있습니다. 일본 문화에는 어떤 매력이 숨어 있을까요? 신자포니즘, 그것은 우리 일본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한 ‘일본’의 이야기입니다.”
이 전시회의 가장 큰 장점은 박물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 영상을 무한 반복해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크린의 동영상은 촬영 금지였지만 영상전시가 끝날 때마다 5분간의 포토타임이 주어졌다.
<신자포니즘> 전시장 입구. <신자포니즘>전은 성인 기준 입장료가 2,000엔.
‘조몬시대에서 우키요에,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신자포니즘> 전시회는 몰입형 영상 체험 전시를 표방한다.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일본도 아득히 먼 과거부터 주어진 환경 속에서 독자적인 미의식을 탄생시켰고, 수없는 진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몬 토기, 두루마리 그림(에마키), 토기 장식 유물인 ‘하니와’, 갑옷과 투구, 우키요에로 대표되는 전통 문화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애니메이션 등 일본 팝컬쳐로 이어지고 있다.
<신자포니즘> 전시회 팜플렛의 뒷면. 체험은 몸과 머리가 기억한다. 팜플렛을 볼 때마다 전시장에서 시각, 청각, 촉각으로 느낀 신자포니즘이 재현된다.
전시회에서 만난 우키요에와 노가면. 평소 DVD, 엽서, 도서, 굿즈 등으로 집에서도 즐기는 일본 전통 문화여서 친근한 풍경.
전시회에서 만난 일본의 전통과 현대. 애니메이션 <우주 소년 아톰>의 포스터.
<우주 소년 아톰>의 주제곡이 도쿄 다카다노바바 역에 흐르는 멜로디. 그리고 일본 최초의 만화이자 국보인 <조수인물희화(鳥獣人物戯画)>.
전시회에서 만난 2021년도 일본 애니메이션 <용과 주근깨 공주>. 한국에서도 개봉되어 친근한 작품.
일본 문화를 테마로 한 시간여행을 선물하기 위해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 중인 국보와 주요 문화재, NHK의 고화질 영상 기술, 우리에게 익숙한 피카츄와 일본 애니메이션이 손을 잡았다. 정면에는 높이 7m의 스크린이, 좌우에는 길이 13m의 거대 고정밀 8K LED가 설치되어 일본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중간 중간 나오는 <미래소년 코난>, <우주소년 아톰> 등의 애니메이션은 나의 소중한 유소년 시절과 맞닿아 있다. 피카츄와 애니메이션 <용과 주근깨 공주>, 다양한 일본 전통 문화는 현재 나의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본 문화이자 자포니즘의 테마를 대표한다. 그러니 적어도 나에게는 단순한 전시장일 수 없다. 여기에는 나의 어린 시절이, 청소년기가, 지금 현재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시부야 역에서 NHK 방송국으로 걸어가다 보면 츠타야 서점이 나온다. 츠타야 서점은 츠타야 주자부로와 ‘츠타야’라는 발음만 같을 뿐, 사실 아무 관계가 없다. 츠타야 주자부로, 자포니즘 에세이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는 <브릭스 매거진>, 한일 공저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5권의 자포니즘 이야기, 그리고 도쿄에서 직접 체험한 신자포니즘 이야기를 NHK 월드재팬 한국어 방송 <하나카페>에 출연해 청취자들에게 들려 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츠타야 서점을 지나며, 2015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에 이어 2025년 60주년에도 KBS와 공동기획 프로그램을 연출한 다나카 신 PD님에게 받은 신자포니즘 관련 질문 목록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작년 NHK 월드재팬 한국어 라디오 방송 <하나카페>에 소개하고 온 신자포니즘 전시회. 전시회 현수막 사진이 1회 방송에 게재되었다.
이미지 출처 : NHK 하나카페 홈페이지
작년에도 자포니즘 연구가 타이틀로 출연한 NHK <하나카페>.
<브릭스 매거진>의 자포니즘 에세이, 2025년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5』의 자포니즘 이야기가 같이 소개되었다. 이미지 출처 : NHK 하나카페 홈페이지
자포니즘과 신자포니즘 연구는 나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일본 문화를 활용해 출판, 강의,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활동하는 외국 사람들의 사례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어 국내 일본학 콘텐츠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비슷한 경험은 공감을 만든다. 둘째,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한국이라는 공간에 수용되거나 현지화를 거쳐 재창조된 일본 문화를 관찰해 한국 사회의 니즈를 읽는 일이다.
NHK 하나카페 녹음을 마치고 숙소에서 메일을 확인했더니, 부천에 있는 범박고등학교에서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1권에 소개된 이치마쓰 인형과 자포니즘 테마로 특강을 의뢰해 왔다는 출판사의 메일이 와 있었다. 2025년을 가득 채울 고등학교, 대학교에서의 신자포니즘 특강 시리즈를 여는 스타트였다. 나는 특강 때마다 요코하마 류세이를 부활시켰다. 특강 내용에 따라 한국에서 요코하마 류세이는 때로는 NHK <베라보>의 에도시대의 복장으로, 때로는 NHK <신자포니즘>의 21세기 현대 일본인의 복장으로 등장했다.
부천 범박고등학교에서 신자포니즘 특강을 마치고 선물로 받은 라무네와 삼각김밥.
떡갈비 삼각김밥은 한국에 도입된 일본의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 문화가 한국의 떡갈비 문화와 만나 재해석된 것으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신자포니즘의 예시.
글·사진 | 이주영
프랑스어와 일본학을 전공했다. 프랑스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를 활용해 다언어 일본학도 번역가와 출판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 집필진의 공저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시리즈와 시사일본연구소에 자포니즘 연구가 타이틀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자포니즘 테마로 NHK 국제라디오 한국어 방송 <하나카페>와 영어 방송 <Friends Around The World> 에 출연했다. 신권 1만엔 지폐의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미일인형교류가 일으킨 미국문학의 자포니즘을 논문과 특강에서 다루었고 NHK 출판사의 도서『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윤리경영 리더십』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