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여행] 30개월 아이와 함께하는 홋카이도 여행 #2

2023-12-15

아이와 함께하는 홋카이도 여행 #1 먼저 읽기


둘째 날은 아침 산책 때 발견한 카페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카페에 진열된 소품을 구경하던 아이는 어느새 옆으로 와 음료수를 달라고 손을 내민다. 준비해 온 홍삼 음료를 가방에서 꺼내주니 조용히 한 자리 차지하고 마신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 두 잔의 커피. 만족스러운 아침 티타임이다.


유아차를 밀며 공원으로 향하는 길, 오도리 공원 입구가 심상치 않게 북적인다. 마침 우리 여행 기간과 겹친 ‘어텀 페스트’ 축제였다. 어텀 페스트(9/8~9/30)는 가을을 맞아 삿포로를 비롯한 홋카이도 지역에서 수확한 제철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선보이는 축제이다. 오도리 공원 곳곳에 총 7개 테마의 300여 개 점포가 들어섰을 정도로 지역 활성화와 관광객 유치를 위한 그 규모가 꽤 큰데, 토요일 오전이라 많은 사람이 몰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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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891d1dbc7c.jpg삿포로 어텀 페스트 / 삿포로 관광청 제공


날씨는 쾌청하지, 형형색색 꽃과 나무는 춤을 추지, 길거리 음식엔 기본적으로 낭만이 서려 있는데 날씨마저 좋으니까 구경하는 발걸음이 더 가볍다. 점심으로 카레 수프 식당을 예약한지라 홋카이도 우유아이스크림을 한입씩 나눠 먹고 구운 옥수수를 사러 향했다. 그사이 남편은 삿포로 생맥주를 들고 환한 웃음으로 나타난다. 유난히 고른 치아가 돋보인다. 야외에서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은 왜 이렇게 맛있을까. 샤워 후 마시는 개운함과는 다른 계절이 함께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그런 맛이다.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데 부모와 함께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예쁘고 귀하다. 말간 얼굴로 웃고 있는 아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다. 아이를 키우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많이 바뀌었다. 발 닿는 모든 것들을 살피는 태도로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낮추게 된다. 아이가 바라보는 눈높이로 세상을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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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리 공원 ⓒ신태진


점심을 먹고 초콜릿 팩토리에 가려고 지하철에 탑승했다. 아이가 좋아할 아기자기한 곳이라 기대가 컸다. 근래 들어 지하철을 타보기 시작해서 대중교통 에티켓을 반복해서 일러주고 있다. 그러나 낮잠 시간이 훌쩍 지나선지 연이의 눈꺼풀은 무겁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무릎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든다. 의자 옆으로 삐져나온 발이 옆 사람을 불편하게 할까 봐 신발을 벗기려는데 그가 괜찮으니 염려 말라고 말해준다. 불쑥 찾아오는 이런 다정함이 반갑다. 아이를 향한 배려를 받을 때면 아이와 내가 동시에 존중받는 것 같아 몇 배의 기쁨과 감사함을 느낀다.


내릴 역에 다 왔는데도 아이는 일어날 기미가 없어 유아차에 살포시 눕혔다. 남편을 따라 한적한 주택가 사이를 걸으니 소담하게 정돈된 놀이터가 보인다. 둥그런 모래사장과 철봉, 아기용 그네가 우리의 시선을 붙잡았다. 동네를 돌며 놀이터를 탐색하는 일은 아이와 내가 즐겨 하는 놀이인데, 여행지에서 발견한 놀이터라니 몹시 멋지지 않은가. 그것도 모든 동네에 하나쯤 다 있을 법한 그런 놀이터. 그늘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건너편 카페로 들어갔다. 파란색 건물이 우산 모양 로고와 참 잘 어울리는 곳이다.


반지하 높이 1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늘어진 목티와 안경 쓴 본새가 장인 같은 바리스타 한 분이 수줍은 미소로 반긴다. 간단히 원두 설명을 듣고 산미가 있는 커피를 주문한 후 앞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로스팅 날짜가 적혀있는 곱게 간 원두를 저울로 재더니 안쪽 커피 바로 가져가신다. 쪼르르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한참 들린 후 한 잔의 커피가 나온다. 


커피를 손에 쥐고 놀이터로 돌아오자 아이는 잠에서 깨어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이내 ‘우아’라는 탄성과 함께 망설일 없이 양말을 벗고 모래사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9965a81bbd96b.jpg놀이터에서


이렇게 용감했다니. 새삼 아이의 적응력에 놀란다. 모래사장에 열심히 발자국을 내더니 아무렇게나 놓인 나뭇가지를 발자국 사이에 꽂는다. 마치 족적을 남기듯. 그리곤 아빠에게 그네를 타자고 제안한다. 아직 그네를 무서워하는 아이는 아빠에게 앉아보라고 말한다. 제 몇 배의 아빠를 밀며 재밌냐고 묻는 모습이 우습다.


다음은 철봉. 아빠가 제일 크니까 아빠 철봉은 여기. 엄마는 중간. 나는 여기. 키 순서로 철봉을 지정해 주는 걸 보니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아이의 성장에 놀라며 이 시간이 조금 더 천천히 지나가길 바란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철봉에 매달렸고 제일 먼저 떨어지는 건 나다. 아빠가 연이어 떨어지자 아이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나 잘하지요?” 묻는다. 고작 5초면 아이의 자신감을 채우기 충분한 시간. 온전한 행복에 코끝이 시리다. 어느 것 하나 부자연스럽게 애쓸 필요가 없다. 관광객들에게 치이며 뭘 봐야 하나 헤매는 게 아닌, 우리만의 세상에서 유영하고 있다. 

 

초콜릿 팩토리에서 서연이는 꼬마 요리사로 변신했고 고사리손으로 진지하게 쿠키에 모양을 그려 넣었다. 도와주려는 내 손을 제지한다. 뭐든 스스로 해보고 싶은 시기다. 어느덧 어둠이 찾아오고 등에 업힌 아이의 배가 홀쭉해졌다.


51d7c9c565330.jpg초콜릿 팩토리


삿포로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 중 하나가 징기스칸(일본 홋카이도 지방의 양고기 요리)이라는데 아이가 먹기에 유명한 식당들은 줄도 길고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어 화로구이 집으로 들어갔다. 신선한 와규가 테이블 위에 올라오자 세 사람의 배고픔이 극에 달한다. 계란을 톡 터트린 밥에 고기 한 점을 어서 올려 먹고 싶은데 아기 새 배부터 채우는 게 어미 새 마음이다.


하루를 알차게 보냈는지 첫날과 달리 5분 만에 곯아떨어진 아이 덕에 우린 번갈아 숙소 근처 이자카야에서 맥주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밤에 아이를 두고 나가본 적이 없어 별것 아닌 외출에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괜스레 어색하다. 밤거리가 이렇게 거칠었나. 분명 나도 술을 마시는 저 무리 중 한 명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생경하다. 혼자 마시는 맥주는, 그것도 타지에서 모국어가 아닌 낯선 언어들이 흘러나오는 곳에서 마시는 생맥주 한 잔은 육아 노동의 고됨을 잊게 해준다.


ccaa35550991b.jpgⓒ신태진




글/사진 이유리(그렇게 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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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동에서 책방 '그렇게 책이 된다'를 운영했습니다. @becoming_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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