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여행] 여름, 우정, 그리고 돌아온 부산

2024-04-04

지난여름의 일이다. 친구 홍선이가 부산에 놀러 왔다. 그녀는 9년 전 캄보디아에서 1년 동안 함께 일을 했던 동료였지만, 지금은 삶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내가 제주에 있을 때는 친구가 있는 서울을 오가며 만났다. 그녀가 내 고향 부산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낯설어진 부산을 어떻게 안내해야 할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나 역시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여행하는 마음으로 함께하기로 했다.


DAY 1

부산역에서 만난 친구는 자기만 한 배낭 하나와 에코백을 메고 있었다. 친구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보자마자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격한 포옹을 나누었다. 본래 중앙동에 있는 오래된 밀면집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친구가 배가 고팠던지 부산역 앞 ‘1984 이바구 밀면’으로 향하길래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갔다. 부산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밀면이라는 음식답게 또 그곳만의 특색 있는 밀면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숙소로 향했다. 나는 지금 부모님과 살고 있지만,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함께 숙소에 머물기로 했다. 우리는 에어컨을 켜고 누웠다. 친구는 먼 길을 오는 여정이, 나는 아침에 있던 일정이 피곤해 잠깐의 낮잠을 청했다. 일어나서는 송도해수욕장에 수영하러 갈 계획이었으나 왠지 귀찮음이 몰려왔다. 내가 수영하고 싶다고 졸라대서 짐을 한껏 챙겨 온 친구에게 미안했지만, 우리는 즉흥적으로 행선지를 변경해 흰여울마을로 향했다. 


94cfb870834e2.jpg흰여울마을에서 보이는 풍광


흰여울마을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오래전 영도를 갈 때면 종종 걷던 길이었는데 어느새 ‘흰여울마을’이라는 이름의 관광지로 변해 있었다. 친구는 탁 트인 바다를 보자마자 연신 너무 좋다고 감탄했고, 나는 그제야 행선지를 급히 바꾼 미안함이 사그라들었다.


b59d0fed313b9.jpg흰여울마을에서


서로 가고 싶은 책방, 소품 가게, 카페를 다니고, 인생네컷에서 사진도 찍었다. 평소 사진을 잘 안 찍지만 홍선이만 만나면 무수한 사진을 남기게 된다. 언젠가부터 만날 때마다 찍기 시작한 ‘인생네컷’은 우리가 학창 시절을 같이 보내는 것도 아닌데 마치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선사했다. 그날도 뭐가 그리 웃기는지 배꼽을 잡고 깔깔대고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여름의 한가운데라 땡볕에 걷는 게 힘들긴 했지만, 더위를 식힐 팥빙수도 먹으며 풍광이 아름다운 흰여울마을을 알차게 둘러보았다.

 

dc178e171f83e.jpg더위를 식혀준 팥빙수


저녁에는 남포동에 갔다. 남포동은 서울의 명동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나는 그중에서도 저녁이 되면 줄지어 불을 밝히는 포장마차 거리를 가장 좋아한다. 20대 초부터 지치고 삶이 버거울 때 혼자 가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포장마차 이모들의 요리를 눈앞에서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술 한잔 나누며 이모나 옆에 앉은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딱히 깊은 이야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다양한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남포동 포장마차를 10년 만에 찾았더니 이모들도, 분위기도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미리 검색해 둔 포장마차 중 사람이 많아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곰장어, 제육볶음과 맥주 두 병. 그날도 옆에 앉은 남성 두 분이 말을 걸어왔다. 캘리 맥주 맛이 궁금하다길래 조금 나눠드리고, 소맥을 딱 한 잔만 먹고 싶었던 나는 그 답으로 소주를 조금 얻어 마셨다. 포장마차에서도 우리는 별일 아닌 일에 박장대소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가 부산에 오면 포장마차 거리를 꼭 소개하고 싶었는데, 그 분위기를 제대로 즐길 수 있던 시간이었다.


9178b1b09fd71.jpg남포동 포장마차거리


포장마차를 나와 노래방도 갔다. 꽤 오래 알고 지내온 사이임에도 함께 노래방을 간 건 처음이었다. 처음 뭔가를 같이 하니 괜히 새로웠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남포동 길을 걸었다. 지나치는 곳곳에 학창 시절의 기억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내일 점심은 회국수를 먹자는, 또 지키지도 않을 계획을 세웠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서 누군가와 동행하는 여행도 무척 오랜만일뿐더러, 고향을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색다르기도 했다. 바랜 추억에 소중한 친구와의 추억이 새로 덧입혀지는 기분이랄까. 마지막으로 맥주 한 캔을 나누어 마시며, 우리가 나이를 먹기 전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되도록 자주 만나자고 약속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DAY2 

둘째 날도 눈을 뜨자마자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불쑥 친구가 묵혀둔 고민을 꺼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담담한 투로 이야기하는데, 담담하게 내뱉기까지 몇 번이고 곱씹었을 친구를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친구는 몇 년 동안 대표로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나에게 회사를 이끌어가는 일은 그저 어른의 꿈 같은 일인데, 친구는 그런 일을 실천으로 옮겨 성장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 막상 고민을 전해 들으니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걱정스러웠다. 


친구의 고민을 듣다 보니 체크아웃 시간을 훌쩍 지나쳐버렸다. 역시 우리답다 싶었다. 나갈 채비를 하기 위해 체크아웃 시간을 30분 정도 늦추고, 황급히 둘째 날 일정을 시작했다. 역시나 회국수를 먹자는 어제의 계획은 온데간데없고, 고등어솥밥을 먹으러 갔다. 직장인들로 붐비는 식당 어느 틈에 자리를 잡았다. 밥 한술을 뜨자마자 너무 맛있어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친구와 나는 좋아하는 음식 취향이 비슷한데,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먹기에 바쁜 데 반해 친구는 어떤 재료를 사용해 맛을 냈는지 유추하는 것을 즐긴다는 점이다. 고등어솥밥을 먹는 동안에도 친구는 씨간장의 재료를 유추하며 맛있게 식사를 했다.


aba13258cbd9a.jpg맛있게 먹었던 고등어솥밥


점심을 먹고 산복도로에 있는 카페에 갔다. 산복도로는 외지인에게는 생소한 관광지이지만, 나에게는 태어났을 때부터 다시 고향에 돌아온 지금까지 익숙한 곳이다. 어릴 적 산복도로에 사는 친구들이 있어 무섭게 가파른 계단에서 뛰어놀았고, 다시 돌아온 지금도 내게는 일상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 곳에 이제는 카페와 식당이 생겨 부산의 원도심과 항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970b1d6a97219.jpg산복도로 카페에서


친구는 카페에서 보이는 광경에 연신 감탄했고, 우리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문득 우리가 회사 동료에서 지금처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그냥 인정해서가 아닐까 싶었다. 서로가 싫어하는 것은 존중하고,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은 서로 배려하며 타협점을 찾아가는 법을 아는 것이다. 나는 너무 해맑은 질문을 싫어하는 편인데, 홍선이는 그런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혹여 궁금한 것이 있어도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편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시시콜콜 내 인생을 캐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상대방이 말하지 못하는 건 나중에 하겠거니 기다리고, 굳이 묻지 않는 적당한 사이. 그 적당한 거리가 좋다.


62896c436c4d5.jpg예쁜 골목에서


오후에는 친구가 가고 싶다던 보수동 책방골목에 들렀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그 이름처럼 중고 서점 여러 곳이 붙어 있는 골목이다. 나에게는 어릴 적 참고서를 사던 시절을 거쳐 지금도 산책로이자 종종 필요한 책을 찾는 곳이다. 이제는 책을 사는 사람들보다 관광객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생소한 책방 골목을 보고 궁금한 게 생긴 친구에게 신이 나서 나의 추억을 줄줄이 꺼내놓자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국제시장에서 당면을 먹고 1박 2일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99f292dbeb37f.jpg보수동 책방골목


지난여름 반짝이던 우리의 추억이 해가 지나면서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서로 멀리 떨어져 지내다 보니 1년에 한 번 정도 보지만,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할머니가 되어서도 고등학생처럼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친구는 곧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다. 내가 친구의 고민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어떤 쓰나미가 몰려올 때, 그 거센 파도를 곱씹고 헤아릴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 짐작해 볼 뿐이다. 순례길을 걷고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그녀의 모든 삶을 열렬히 지지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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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황주(chant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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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래오래 집을 이고 다니며 생활하고 싶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부산에 삽니다. 『할 말은 하고 살게 1』 『할 말은 하고 살게 2』를 펴냈습니다.
http://blog.naver.com/rashimi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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