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여행] 이야기가 있는 일본 소도시 여행 : 히로시마현 다케하라(広島県竹原)

2024-07-30

‘히로시마 여행’ 하면 원자폭탄 투하로 목숨을 잃은 한국인 피해자들의 넋이 남은 평화공원(広島平和公園)과 신성함이 살아 숨쉬는 섬 미야지마(宮島), 미야자키 하야오가 두 달 간 머물며 ‘벼랑 위의 포뇨’를 구상한 도모노우라(鞆の浦), 레트로한 감성이 가득한 오노미치(尾道) 등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밖에도 색다른 매력을 품은 소도시와 작은 마을이 여럿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지금부터 소개할 다케하라(竹原)이다.

 

히로시마 버스센터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15분 거리, 혹은 히로시마 역에서 오카야마(혹은 이토사키)행 완행열차를 타고 1시간 40분 거리에 위치한 다케하라(竹原)는 인구 2만 3천의 작은 소도시이다. 히로시마현 북동부에 위치한 이 동네는 많은 선박과 물자가 오가던 세토내해(瀬戸内海)와 맞닿은 지리적 환경 덕분에 일찍이 항구 마을로 번영했고, 에도 시대(1603년~1868년)에 이르러 제염업과 죽세공품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이때 벌어들인 돈으로 세운 상가와 창고 건물이 곳곳에 남아 역사 보존 지구(重要伝統的建造物群保存地区)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이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 계기는 역사 보존 지구 지정과 지역의 주력 상품인 ‘죽세공품’도 아닌, 《타마유라(たまゆら)》라고 하는 다케하라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과 오래전 방영된 NHK TV 소설 《맛상(マッサン)》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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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타마유라(たまゆら)》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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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타마유라(たまゆら)》의 배경 다케하라시 ⓒ佐藤順一・TYA / たまゆら製作委員会


아버지의 유품인 롤라이 카메라로 일상 담기를 즐겨하는 고1 소녀가 다케하라로 이사 오면서 학교 친구들과 함께 하는 소소한 일상을 그린 애니메이션. 일본 내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제작사가 다케하라시와 협력하여 지역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는데 성공하면서 작품 개봉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장소를 ‘성지순례’하려는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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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하라역 앞에서


입구 바닥에 ‘다녀오셨어요?(おかえりなさい 오카에리나사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다케하라역 오른편. 앞서 언급한 《타마유라》의 캐릭터 광고판이 걸린 관광 안내소에서 마을 안내 지도를 얻은 후 맞은편 상점가로 진입하면 다시 《타마유라》의 캐릭터 푯말이 등장해 ‘역사 보존 지구’ 쪽을 알려준다. 이들 푯말을 따라 700m 가량 걸으면 지역 특산물 판매장 및 휴게소를 겸하는 미치노에키 다케하라(道の駅竹原)가 나오고, 거기서 300m 남짓 더 나아가면 낡은 목조건물인 히노마루 사진관(日の丸写真館)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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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하라 거리 보존 지구에 있는 히노마루 사진관


역시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사진관을 끼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옛 창고와 상가 사이로 비좁은 골목이 이어지는데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는 골목 양 옆으로는 낡은 시계방과 전통 가옥을 활용한 호텔, 카페 등이 자리하고 골목 끝자락엔 검은색 양조장 건물이 있다. 이곳은 혈혈단신 영국으로 건너가 위스키 제조 기술을 배워와 훗날 닛카 위스키를 제조하며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 불린 다케쓰루 마사타카(竹鶴政孝)의 본가인 ‘다케쓰루 주조(竹鶴酒造)’이다. 이곳에서는 오늘날에도 술을 양조하고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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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쓰루 주조


1894년, 양조장을 운영하는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술과 가까이 지냈던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오사카 대학교의 전신인 오사카 공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셋츠 주조(摂津酒造)에 입사한다. 당시 셋츠 주조는 다양한 서양 술을 판매하는 한편, 알코올에 착색료와 향료를 섞여 만든 모조 위스키를 제조하여 팔기도 했다. 이를 보고 ‘진정한 위스키’를 만들고 싶었던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셋쯔 주조의 아베 기헤에(阿部喜兵衛) 사장의 지원 하에 2년 6개월간의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영국에서는 위스키 제조법을 배우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 청강생 자격으로 들어가 위스키 제조법과 보관 방법을 열심히 보고 배운다.


그런 와중에 ‘리타’라는 여성과 만나 사랑을 키웠고, 스코틀랜드에서 사랑과 위스키 제조법을 얻은 그는 일본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전역을 휩쓴 경제 불황으로 인해 셋츠 주조는 위스키 사업을 포기하고, 이에 그는 셋츠 주조를 퇴사한 후 오늘날 일본 주요 주류 업체 중 하나인 산토리의 창업자 토리이 신지로와 손을 잡는다.


맛상과 리타의 이야기 ⓒAsahiGroupHol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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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쓰루 마사타카와 리타의 동상


당시 아카다마 포드 와인으로 큰 이익을 얻은 토리이 신지로는 10년간 연 4,000엔을 지급하는 파격적인 조건(당시 대학 졸업자의 평균 연봉이 480엔~600엔)으로 다케쓰루를 영입했다. 하지만 일본인 입맛에 맞는 위스키 제조를 원했던 토리이 신지로 사장과 본고장 맛에 충실하고자 한 다케쓰루가 대립하며 ‘일본 최초 위스키 제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여러 실패까지 겹치며 1929년 4월 4일에 이르러서야 일본 최초의 위스키를 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위스키는 당시 시중에 판매되던 가짜 위스키에 밀려 부진한 판매고를 기록했고 이에 토리이 사장과의 갈등도 깊어지며 10년의 계약을 채운 후 회사를 나와 북해도에 공장을 세운 후 그의 이상을 담은 ‘닛카 위스키’ 제조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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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카 우즈키 홋카이도 공장 요이치 증류소 · 닛카 위스키 ⓒvisit-hokkaido.jp, NIKKA WHISKEY


이렇듯 평생을 위스키 제조에 헌신한 다케쓰루 마사타카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믿고 지원한 아내 리타의 사랑을 담은 TV 소설 《맛상》이 방영된 해, 일본 위스키 판매량이 20% 증가한 한편, 성지순례를 위해 다케하라에 방문한 여행객들의 발길에 다케쓰루 주조는 잠시 문을 닫기도 했다.  


한편 다케쓰루 주조에서 오른편으로 걸어가면 100m 맞은편으로 2층짜리 전통 건축물이 보인다. 오래 전 제염업으로 큰 돈을 번 가사이 가문 저택(笠井邸)이다. 무료로 입장 가능한 이곳에는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장식품과 죽세공품이 남아있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간 2층 창가에서는 평온한 마을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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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이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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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이 저택 2층에서 바라 본 마을 정경


창가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와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낸 후 건물 밖을 나온다. 다시 다케쓰루 주조를 지나 좀 더 걸어 나가자 마쓰사카 저택(松阪邸)이 등장한다. 182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곳은 마을에 남은 전통 상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곡선미를 실은 지붕이 인상적이다. 입장료 300엔을 내고 들어간 널찍한 내부에는 집안 사람들이 쓰던 생활용품과 잡화, 옷 등 다양한 물품이 남아 시선을 끌었고, 건물 옆에 꾸려진 정원은 정갈함을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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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사카 저택(松阪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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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사카 저택 내부 


한편 마쓰사카 가문 저택 근처에는 《타마유라》에 등장한 주인공들의 단골집으로 알려진 호리카와(堀川)가 있다. 히로시마 풍 오코노미야키(お好み焼き)와 캐릭터 그림을 꽂은 크림소다 등을 판매하는 호리카와는 옛 양조장 창고를 활용한 덕분에 에어컨을 세게 켜지 않아도 몹시 시원하다. 또한 실내 곳곳에 비치된 낡은 장식품들은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부다페스트》를 보고 “지나 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라 말한 것과 같이 경험하지 않은, 그러나 어딘가 익숙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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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카와 건물 외관


아울러 함께 주문한 오코노미야키는 밀가루 반죽 위에 면과 숙주, 양배추, 고기 등을 듬뿍 올린 후 이를 꾹꾹 눌러 구워 낸 덕에 몹시 식감이 풍부하고 씹는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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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카와 오코노미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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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소다


식사 후 가게 맞은편, 가파른 계단 길 끝에 위치한 사원 사이호우지(西方寺)에 올라 마을 전경을 눈에 담고, 호리카와 근처에 있는 다케하라 역사 민속 자료관에 들렀다. 이 파란색 근대건축물에는 한 때 히로시마 지역에서 생산된 소금 80% 이상이 다케하라에서 생산되었음을 알리는 염전 관련 자료 및 앞서 언급한 다케쓰루 마사타카의 손길이 남은 소지품들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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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호우지에서 바라 본 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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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하라 역사 민속 자료관


자료관에서 마을 역사를 둘러본 후 양옆으로 길게 뻗은 거리를 거닐었다. 대나무로 만든 바람개비를 내 건 죽세공품 전시관과 갤러리, 낡은 노렌을 내 건 식당과 찻집, 흰 외벽에 검은 기와를 올린 전통 가옥들을 지나 옛 민가를 객실로 개조한 숙박 업소인 니포니아 호텔이자 찻집 ‘샤료 이치에(茶寮一会 - ICHIE)’에 들렀다.


100년도 훨씬 전에 지어진 이소베 료칸(礒辺旅館)을 찻집으로 재개장한 건물 현관 뒤로는 우리네 ‘마루’와 흡사한 넓은 현관이 있는데 짙은 다다미 냄새와 더불어 목조 가구 향이 흘렀다. 그리고 현관 오른쪽에는 고풍스러운 장식품이 자리한 취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 은은한 음악을 더하니 실내는 몹시 낭만적이고 따사로웠으며, 이를 벗삼아 먹는 파르페(1,320엔)은 몹시 달고 시원하여 하루 종일 따라 다니던 무더위를 깨끗이 씻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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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료 이치에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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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료 이치에 파르페


오늘 소개한 곳 이외에도 다케하라에는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거리가 몹시 많으며, 주말에도 마치 마을을 전세 낸 듯 몹시 느긋한 기분으로 거리를 거닐 수 있는 매력이 존재한다. 따라서 히로시마에 방문하게 된다면 ‘미야지마’와 더불어 다케하라에 들러 고즈넉하고 여유 있는 여행을 즐겨보는 것을 추천한다.


※다케하라 가는 방법 (전차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환승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에 버스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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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버스센터 or 히로시마역 남쪽 출구 우체국 앞 23번 버스 정류장에서 고속버스 카구야히메호(かぐや姫号)에 탑승(1,300엔) 다케하라역에서 하차




글·사진 | 박탄호

일본 생활 13년차를 맞이한 외국인 노동자. 『일본 소도시 여행』(넥서스), 『늘 곁에 있어주던 사람에게』(부크럼). 『아는데 모르는 나라, 일본』(따비)을 썼습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raveler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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