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 있지만 떠난다]그해 여름, 올드 타이베이를 걷다

떠나 있지만 떠난다 #4



치히로는 이사를 하던 도중 부모님과 함께 인적 없는 낯선 곳을 발견한다. 마을을 둘러보다 우연히 만난 하쿠라는 아이에게서 이곳은 인간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서둘러 부모님을 찾지만, 어쩐 일인지 부모님은 돼지로 변해 있었다.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치히로는 이름까지 뺏긴 채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신들의 온천장 주인인 유바바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많은 모험을 하게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줄거리이다.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초반부에 치히로가 발견하게 되는 낯선 곳. 부모님을 찾아 오르락내리락하던 좁디좁은 계단을 따라 홍등이 줄줄이 이어져 있고, 구석구석 소박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화려함을 머금고 있는 곳. 정말 이런 곳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가 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모티브가 된 곳이 있었다.


대만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하니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하고 들어왔다. 수천 개의 자잘한 수분들이 내 몸에 끝없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곧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타이완의 6월은 우기라는데 예상외로 맑았다. 날씨는 포기했었기에 이것만으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창문 너머로는 한 번도 여행해 본 적 없는 낯선 곳의 풍경이 펼쳐졌다. 한국 같기도 하고 일본 같기도 하지만 역시나 타이완이다. 곳곳에 세워진 표지판이나 간판에 쓰인 언어가 그렇고, 사람들 표정이나 차림새에서 이 나라만의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바오창옌국제예술촌


호텔 체크인을 하고 나오니 어느덧 4시. 무엇을 하기에도, 하지 않기에도 참 애매한 시간이었다. 가볍게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번화가는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바오창옌국제예술촌’. MRT 공관역에서 내려 큰길을 따라 걷다 샛길로 샜다. 아무렴 어때 나에게는 구글 지도가 있다! 좀 더 골목을 누벼 보기로 했다.


한적한 오후. 비교적 낮은 건물들과 낡은 간판들. 칠이 다 벗겨진 맨션으로 보이는 건물 난간에는 이불인지 수건인지 무엇인가가 이따금 펄럭거렸다. 거리는 깨끗했다. 한 할아버지가 라디오를 켜 놓고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었고, 자전거를 탄 동네 꼬맹이들이 갑자기 왼쪽 골목에서 나타나더니 이내 오른쪽 골목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아직은 따가운 햇살이 사이좋게 나란한 우체통 위를 내리쬐고 있었다. 맛집과 쇼핑센터가 즐비한 번화가보다 이런 곳을 걸을 때, 수수한 모습들 앞에서 카메라를 더 자주 들게 된다.



바오창옌국제예술촌에는 보장암(바오창옌寶藏巖)이라고 하는 오래된 절이 있다. 17세기 중국의 강희제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주요역사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에, 국공내전에 패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와 추종자들이 모여 살며 형성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며 한때 철거될 위기에 놓였으나 주민과 시 정부의 타협으로 보존됐다. 이후 마을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후한 건물에 살던 주민들을 시에서 보상 이주시켰고 대신 세계 각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숙소와 작업실로 값싸게 임대함으로써 지금의 예술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예술촌이 시작되는 지점에 커다란 지도와 함께 관광안내소가 있다. 촘촘하게 쌓여 있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중간 중간 공방이나 카페가 있어 잠깐씩 머물며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식혔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과 거리 곳곳에 그대로 남겨져 있는 옛 흔적들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예전 우리나라 달동네나 판자촌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벽화나 조형물은 이 마을만의 개성으로 눈을 즐겁게 했다.


마을 꼭대기에 다다라 탁 트인 풍경과 마주하니, 머리카락 한 올만을 스치고 멈춘 바람이 얄밉다. 마을 옆으로는 신점강(新店溪)이 흐르고 있고 그 옆으로 산책로 겸 자전거 도로가 있다. 저 멀리에는 고층건물과 잘 닦인 도로들이 보이건만 여기만은 아직도 과거를 간직한 듯, 뉘엿뉘엿 해가 지는 시간을 오래 서서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약간 촌스러운 옷에 곱창 머리 끈을 한 여자가 걸어 나와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거 같았다.



언제 맑았었냐는 듯 아침부터 어김없이 비가 쏟아졌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세어졌다. 빠듯한 시간 속, 타이완에 오면 꼭 가봐야 한다는 관광지 중 하나인 예류(野柳)와 진과스(金瓜石)를 제쳐 두고 내가 선택한 것은 핑시셴(平溪線)과 주펀(九份)이었다.


핑시셴은 루이팡(瑞芳)에서 징통(菁桐)까지 총 12개의 역을 연결하는 열차다. 이 중 특히 스펀(十分), 핑시, 징통은 타이완의 오래된 마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1900년대 핑시에서 탄광이 발견된 후 석탄운반을 위해 만들어진 철로였기에 탄광산업이 몰락하면서 자연 방치되어 왔다. 그 버려진 철로 위로 이제는 관광열차가 다닌다.


루이팡역 앞의 풍경


이 열차를 타려면 호텔이 있는 중샤오푸싱(忠孝復興)역 근처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렸을까? 목적지인 루이팡역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90년대를 방불케 하는 정겨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디선가 약간 촌스러운 옷에 곱창 머리 끈을 한 여자가 걸어 나와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거 같았다. 서둘러 핑시셴 1일권을 구입하고 열차에 올랐다.


핑시셴 여행의 첫 목적지, 허우통(猴硐)역에서 내렸다. 이곳 역시 탄광촌이었다. 석탄 연료를 사용하던 시절, 황금기를 누리던 곳이었으나 90년대 이후 석탄 생산이 중단되면서 쇄락했다. 하지만 역 주변에는 아직도 석탄을 운반하던 다리, 공장, 갱도 등이 남아 있고, 타이완 정부도 특별지역으로 지정해 석탄 산업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고양이 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탄광과 산업화 시대의 역사 너머 구름다리 저편 마을은 고양이와 관련된 것들로 잔뜩 꾸며져 있다. 무서워하기는커녕 사람들 사이를 여유롭게 활보하는 고양이의 모습은 흔한 풍경이다. 그리고 한쪽에는 아기자기한 잡화점들도 있다.


허우통에서 만난 고양이들


다시, 스펀으로 향하는 열차 안. 허우통에서 잠시 멎었던 비가 또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특유의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비 사이를 열심히 달리는 핑시 열차.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와 맨 뒤 쪽에 자리 잡았다. 큰 창 너머로 비가 있는 풍경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꽤나 낭만적이었다. 날씨가 맑았다면 귀찮게 우산을 들고 다니는 일도, 카메라 렌즈에 가끔 빗방울이 떨어져 뿌옇게 찍히는 일(이렇게 찍힌 사진이 또 굉장히 마음에 들 때가 있다)도 없었겠지만, 비 오는 날만의 분위기도 있는 것이니. 열차가 스펀에 도착하자 핑시셴 최고의 관광지답게 대부분의 사람이 이곳에서 내렸다. 나는 종점인 징통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들를 예정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열차가 이곳에서 오랜 시간 정차를 했다. 발차 시각까지만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글/사진 정인혜

‘앞으로의 삶에 후회를 남기지 말자’ 라는 생각에 돌연, 평소 동경하던 도시인 도쿄에의 유학길에 올랐다. 여행하며, 산책하며, 사진 찍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다.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37mid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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