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 있지만 떠난다]빗속여행의 낭만

떠나 있지만 떠난다 #5



많은 사람이 ‘천등’ 빼곡히 자신의 소원을 적어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스펀 하면 역시 ‘천등’이다. ‘공명등’이라고도 불리는 이 풍등은, 제갈공명이 사방으로 적에 둘러싸였을 때 ‘구조’, ‘구원’의 의미로 자신의 갓 모양을 본 따 만든 등을 만들어 하늘로 올린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는 ‘기원’의 의미를 담아 천등에 소원을 적어 날린다.


나는 20분 정도밖에 남은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천등을 날리진 못했다. 스펀 폭포에도 가보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해야 했지만, 오히려 남김이 있어서 좋았다. 다음 여행을 기다리며 철길을 따라 옛 거리를 가볍게 걸어 보았다. 그리고 다시 종점인 징통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탔다.


스펀 역의 풍경. 사람들이 천등을 날리려고 준비중이다.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배경지로 유명해진 징통은 옛 탄광촌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일단 역부터가 딱 시골 간이역 느낌이어서 내리기 전부터 두근두근했다. 역을 나오면 짧은 옛 거리가 이어지는데, 그때 갑자기 하늘이 뚫린 것 같이 억센 비가 쏟아졌다. 안 되겠다 싶어 일회용 비닐 우비를 샀다. 옷과 가방이 비에 젖지 않게 하려니까 물방울이 조금만 튀어도 신경이 쓰였는데 잠시 뒤 아예 포기하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해방된 기분이었다.


옛 거리 상점가에서 타이완 우체통 모형을 하나 샀다. 도쿄 유학 전까지는 모든 나라의 우체통이 우리나라와 같은 모양일 줄 알았다. 여행을 다니며 모양도 색도 나라마다 제각각이란 걸 알게 되었다. 대만의 우체통은 특이하게 초록색이었다. (빨간색도 있다) 옛 거리를 따라 역 뒤쪽으로 걷다 보면 소원을 적은 대나무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데, 보송보송한 대나무가 아니고 비에 젖어 축축하니 좀 더 낡은 느낌이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운치 있긴 했다. 그 옆으로는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두 주인공이 걸었던 철길이 지난다. 느릿느릿 철로를 걸어보다가 대나무를 사서 소원을 적어 걸어 놓았다.


징통옛거리에 있는 상점. 초록색 우체통에 예쁘다


징통거리를 걷다 보면 볼 수 있는 소원이 적힌 대나무들


핑시역으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타려고 보니 다음 열차가 약 40분 후에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저녁에 주펀을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 핑시까지 걷기로 했다. (징통에서 핑시까지는 한 정거장이다.) 철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을 벗어나게 된다. 길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차 한 대 지나지 않았다. 비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 멀리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 보였다. 맞게 가고 있나? 반갑게도 이정표들이 등장해 주어서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고 혼자 힁얼힁얼 걷다 보니 어느새 핑시 마을이었다.


징통거리를 걷다 보면 볼 수 있는 소원이 적힌 대나무들.



"그날 유독 그런 기분이었던 걸까?"



핑시셴平溪線으로 여행을 하다 보면 ‘라오지에老街’ 라는 단어를 자주 접할 수 있는데 한자에서 의미를 유추해 보면, ‘옛길’ 정도로 쓸 수 있겠다. 스펀, 핑시, 징통이란 이름 자체는 지명이고 여기에 ‘라오지에’가 붙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거리가 된다. 이 거리에서 천등도 날리고 만만해 보이는 음식을 먹고 누군가를 생각하며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여기저기 소원을 빈다.


라오지에 거리의 귀여운 벽화그림을 따라 핑시를 걸었다. 징통보다는 번화하고 규모가 큰 것 같았다. 마을 사이 흐르는 강은 색다른 정취를 주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봤지 날씨 좋을 때 와 본 적은 없지만,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의 핑시가 더 멋있을 것이라고 100% 확신했다.


핑시 라오지에.


마을 사이로 강이 흐르는 핑시.


루이팡瑞芳역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드디어 주펀九份으로 향했다. 아주 산꼭대기에 있는지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올라갔다. 주펀이라고 해서 내렸는데 그냥 평범한 길 위였다. 눈 크게 뜨고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로 입구는 좁았다. 세븐일레븐 옆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지산제基山街가 시작된다. 좀 전까지와는 확 다른 분위기에 마치 새로운 세상에 들어와 있는 듯 신비로운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취두부 냄새에 코를 틀어막고 걸어야 했다. 귀를 잡아끄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와 찾아가 보니 오카리나 가게 사장님이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OST들을 차례대로 연주하고 있었다. 비 내리는 주펀에서의 오카리나 연주라, 연주가 다 끝날 때까지 듣고 있다가 오카리나 하나 사 들고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겼다.


만국기가 걸려있는 곳까지 걸어오면 수치루竪崎路와 만나는 교차점이 있다. 주펀의 골목들은 동서를 이어주는 지산제와 남북으로 이어지는 수치루, 크게 이 두 길을 기준으로 잡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가 된 곳, 주펀을 대표하는 홍등이 걸린 수치루는 가뜩이나 좁은 길에 항상 사람들이 많다. 일단 후퇴. 좁은 길에 참 알차게도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사소한 재미가 넘치는 골목길 여행에 푹 빠져버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골목을 빠져나오니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과 그 옆으로 바다가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산제. 지금도 사진을 보면 왠지 취두부 냄새가 날 거 같다.


주펀의 골목길은 재밌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홍등이 달려있는 수치루. 이곳은 비수기라는게 없다!


본래 산비탈에 9가구만이 살았다고 해서 주펀九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1920년대 금광이 발견되면서 그 좁은 길 양옆으로 술집과 찻집, 극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채광산업이 쇠퇴했고, 주펀은 그 시간에 멈춰버렸다. 그러나 세월이 다시 흐르고, 멈춘 시절 옛 거리가 매력으로 알려지는 시대가 오게 되었다. 지금 주펀은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제1의 전성기를 넘어선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어둠이 찾아드니 낮과는 다른 얼굴이 슬슬 고개를 내밀었다. 수치루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산들이 그득한 수치루 계단 위로 홍등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아메이차로阿妹茶樓 건너편에 촬영하기 좋은 곳이 있었다. 운 좋게 좋은 자리를 선점했다. 황홀한 밤이었다. “내가 드디어 실제로 이걸 보다니” 이런 감흥은 언제나 짜릿하다. 여행의 묘미를 맛보는 와중에 촉촉함을 머금은 주펀의 밤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여전히 비 오는 날의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대만이었기 때문일까? 그날 유독 그런 기분이었던 걸까? 지난 시절의 풍경과 비의 조합은 굉장한 시너지를 냈다. 대만은 4월이 가장 날씨도 좋고 여행하기 좋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나는 그래도 비 내리는 타이완 여행이 더 좋다고 말하고 있다.


주펀의 하이라이트. 저 많은 사람들 중 '치히로'가 있을것만 같다.




글/사진 정인혜

‘앞으로의 삶에 후회를 남기지 말자’ 라는 생각에 돌연, 평소 동경하던 도시인 도쿄에의 유학길에 올랐다. 여행하며, 산책하며, 사진 찍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다.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37mid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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