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특집]아키하바라 : 장난만은 아닌 세상

도쿄 특집호 #5



인천을 떠나 핸드폰으로 보던 영화 한편이 끝나기도 전에 창문 아래로 타국의 해안선이 보인다. 편집증으로까지 보이는 깔끔하고 반듯한 농지의 풍경. 입국 심사 후 공항을 나서면 맡아지는, 서울과는 분명히 다른 섬나라 공기 냄새. 무표정하지만 묻는 말에는 끝까지 대답해 주려 애쓰는 공항 안내원. 곳곳에 보이는 한국어 안내문. 이국異國이라기보단, 이향異鄕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일 때문에 수없이 드나드는 곳이지만, 과연 내가 이 도시에 어떤 감상을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프라모델, 피규어 등 취미 제품을 유통하는 내가 보통 도쿄를 방문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도쿄의 거래처와 문제가 발행했을 때 아니면 1년에 두어 차례 열리는 Hobby Show를 둘러보기 위해. 메인 거래처는 오사카 덴덴타운에 있기 때문에 도쿄를 방문하는 일은 고작 일 년에 두세 번뿐이다. 그래도 10년이 넘는 동안 1년에 두세 번을 꾸준히 드나들었으니, 한국의 다른 도시들보다는 덜 낯설다. 서울 아닌 다른 지방도시를 이만큼이나 방문할 이유는 없으니까.



공항서 스카이라이너를 타고 우에노에서 내려 야마노테선으로 갈아타면 아키하바라역까지 두 정거장이다. 이쪽에 묵을 곳을 정하는 이유는 거래처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도 하지만, 아키하바라역을 중심으로 피규어나 프라모델을 판매는 소매점이 밀집해 있어 한 눈에 전반적인 트렌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 지상철 바깥으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들을 바라보다 아키하바라역에서 내리면 한국어로 ‘전기상점가입구’라는 출구 안내판이 보인다. 한국의 용산 같은 곳인데, 전자제품, 게임, 프라모델, 피규어, 애니메이션 관련 ‘굿즈’ 등 Hobby산업 상품군들이 밀집해 있는 소위 오타쿠의 성지이다.



아키하바라역과 연결된 렘 호텔이나, 길 건너편 워싱턴 호텔에 주로 여장을 푸는데, 일본의 전형적인 비즈니스호텔이다. 고급 호텔들을 제외한 여느 일본 호텔이 그렇듯, 일본스러운 단정함과 좁지만 효율적으로 구성된 공간이 흥미롭다. 일본의 여느 숙박시설에서도 느끼는 점이지만, 어떻게 이 작은 공간 안에 필요한 것들을 다 욱여넣어 놓을 수 있었을까 감탄하곤 한다. 한 평이 될까 말까 한 욕실 안에 욕조까지 있으니 말이다.



여장을 풀었으면, 주린 배를 채울 차례인데, 출장길이 혼자라도 걱정스럽지가 않다. ‘혼밥’이 어색하지 않은 식당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마주보는 테이블이 아닌 한쪽으로 긴 식탁에 주르륵 앉아 각자 식사에 열중하는 모습들에 나도 제법 익숙하게 끼어든다. 한국에서도 최근 이런 식당이 생겨나고 있지만, 마주보는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돈가스라도 썰 때는 무척 어색해져, 혼자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는 분식집 같은 곳에서 라면이나 후다닥 먹고 나오기 일쑤다.


거래처와의 미팅이나 박람회 등 주된 스케줄이 끝내면, 주로 아키하바라 거리 구석구석을 쏘다닌다. Hobby산업 관련 트렌드를 파악한다는 업무상 핑계도 있지만, 발 아픈 줄 모르고 몇 시간이고 발품을 파는 이유는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이 거리의 수많은 오타쿠 중 하나이니까.




프라모델이나 피규어라고 하면, 한국에서도 최근 들어 조금씩 대중화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어른들이 가지고 노는 비싼 장난감 정도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을 유아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생각한다. 서울 홍대 역 근처에서 내가 운영하고 있는 매장을 찾아오는 사오십 대 남자 고객들 중에는 아내 몰래 사가야 한다며 쇼핑백 말고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줄 수 없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다. 집에 가지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차 트렁크에 몇 달이고 넣어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퇴근 무렵 아키하바라 피규어 상점에서 양복차림에 이것저것 둘러보는 남자들을 보다 보면, 저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저게 존중 받고 사는 여유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의 특별한 점은 중고제품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중고라고는 하지만 흔히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중고제품과는 다르다. 세월의 때로 가치가 떨어져 싸게 살 수 있는 제품이 아닌, 첫 주인의 새 것과 진배없는 관리를 거친 상품들이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A, B, C 세 등급 정도로 나뉘는데, A급은 박스조차 개봉되지 않은 제품이고, B급은 박스만 개봉되어 한 번 정도 꺼내졌다 다시 박스로 들어가 보관되던 제품이다. C등급은 미세한 스크래치가 있는 재품인데, 어느 곳에 어느 정도의 스크래치가 있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는 태그가 달려 있다. 이런 중고 제품들은 희소성이 있어 소위 프리미엄이란 게 붙는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래서 새 제품보다 비싸다. 이런 거래가 가능한 것은 피규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라 수집하고 전시하는 데 목적이 있는 물건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여기에다 일본인들 특유의, 상품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성격이 더해진다.


다른 산업군에서도 이런 성향이 쉽게 발견된다. 일본에서 쇼핑이나 외식을 할 때면, 상품 가격에 대한 스펙트럼이 상당이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싼 것은 매우 싸고 비싼 것은 매우 비싸다. 가성비인가 퀄리티인가가 확실히 구분된다. 열 개 들이 한 팩에 500엔인 모찌가 있고, 한 개에 500엔인 모찌가 있다. 소비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에 지갑을 연다. 전적으로 가격이 상품을 판매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국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으로서 매우 부러운 부분이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좋은 제품이라 인정을 하더라도 무조건 싸길 바란다.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좋은 제품을 만들거나, 수입해서, 그 좋은 가치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으려면 욕을 먹는다. 원가가 얼마나 되느니 하면서 말이다.


일본의 오타쿠들은 자기가 가치를 인정하는 상품에 대해선 불만 없이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에게 그 가치가 떨어졌다면, 이 가치를 안정하는 다른 이들에게 미련 없이 내어 놓는다. 그러기 위해 처음 구입할 때 박스 안에 들어 있던 작은 비닐봉지까지 버리지 않고 새 것과 다름없이 보관한다.


상점들이 닫을 무렵, 저녁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전철을 타고 우에노역으로 간다. 그곳의 재래시장 구경도 하고 테이블을 바깥으로 내놓은 선술집에 들어가기도 한다. 퇴근길 풍경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의자 없이 서서 먹는 선술집은 아직 생경하다. 맥주 한 잔과 몇 백 엔 하는 간단한 안주에 혼자 간단히 마시고 가는 모습들은 어쩌면 오랜 불황이 만들어 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 쓸쓸해 보이지는 않는다. 거기에 섞여 맥주 한 잔에 생선회 한 점을 집어 먹을 땐 비로소 내가 도쿄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까마득히 오래전 그림 공부를 하던 시절, 빈센트 반 고흐가 강렬한 색감과 원색의 나라, 일본을 동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 오래도록 일본은 내게 강렬한 색의 나라로 각인되어 있었다. 아키하바라의 온갖 화려한 색감들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약간은 축축해 보이는 잿빛 우에노에서 밤을 맞이하면 이마저도 강렬한 색의 대비로 여겨진다. 이 강렬한 반전은 이 나라 사람들의 취향 추구가 대체 어느 깊이에까지 닿아 있는지, 그럼에도 한 사람 한 사람 겉으로는 어찌 저리 내색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글/사진/그림 배일우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인 라프드래프트 코리아 2D애니메이션 부서에서 일했다. 지금은 홍대 앞에서 하비 팩토리라는 피규어, 건프라 매장을 운영한다. 하지만 아직 펜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의 일러스트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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